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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미대사관, 미 문화원

옛 미 대사관, 미 문화원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서울의 지하철역에서 시청 앞과 을지로 입구 역은 가장 붐비는 역 중 하나지만 의외로 두 역 사이는 한적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람이 많지 않다. 두 역 사이에 등록문화재 238호인 서울시청 을지로 별관이 있다.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고 많은 일본인들이 서울에 왔지만 종로 상권만은 넘보지 못했다. 대안으로 그들은 을지로와 명동 일대를 그들의 상권으로 만들었다. 일본 굴지의 대기업인 미쓰이 물산(三井物産) 주식회사는 경성지점 사옥을 이곳에다 지었다.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4층의 규모로서 1937년 9월에 착공되어 1938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미군이 접수한 이 건물은 1948년 한미 간에 `재정과 재산에 대한 최초 협정`이체결되자 정식으로 미국의 재산이 되어 대사관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한국 현대사에서 두 번 큰 역할을 한 주요한 장소이다. 4.19 혁명 당시에 미국대사관저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미국은 이승만에 퇴진을 요구하여 4.19 때 이승만의 하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후 대사관이 세종로로 이전하자 문화원 건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85년 5월 23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미 문화원 점거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잠시나마 한국 현대사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1980년 광주 학살은 민주화 세력 특히 학생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특히 군작전권을 가지고 있던 미국이 광주학살에 병력을 동원하도록 허락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결국 1982년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이 벌어졌고 광주 미 문화원과 대구 미 문화원도 공격을 받았다. 

1985년 학생운동 세력은 크게 성장하였고, 특히 4월 신민당의 총선 승리로 더욱 고양되었다. 전국적인 학생조직의 건설과 더불어 5월 18일 광주항쟁 기념일을 맞아 `광주학살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단투쟁`을 전개하면서 전두환 정권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기 위한 투쟁을 준비했다. 

이 투쟁의 연장선에서 1985년 5월 23일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이 일어났다. 5월 투쟁이 정점을 향하고 있던 시점인 16일, 성균관대 학생회관에서 서울대를 비롯한 5월 투쟁 위원장들과 실무자들이 모였다. 가장 상징성이 강한 공간인 대사관은 경비가 너무 삼엄해 제외되었고, 비교적 접근이 쉽고 치외법권 지역이기도 한 서울 미문화원 2층 도서관이 점거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서류를 남기지 않고 도청을 대비해 필담으로만 진행하는 등 철저한 보안 속에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의 소속 학생 73명이 차출되어 22일 12시 거사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당일 경비 병력이 증강된 것을 확인한 지도부는 거사를 유보했는데, 알고 보니 그 날 한미연례안보협의회가 건너편 롯데호텔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거사는 다음 날로 미뤄졌고, 23일 12시 진입과 점거에 성공하였다. 미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은 `우리는 왜 미문화원에 들어가야만 했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광주민중항쟁 당시 미국이 미군 지휘하의 4개 대대를 광주 진압을 목적으로 풀어주어 신군부를 지원한 것에 대한 해명과 공개 사과, 그리고 이후 군사독재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워커 주한 미 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도서관장실 전화를 통해 주요 신문사에 전화를 걸었다. 한편 작년 말 작고하신 김근태 의장이 이끌고 있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도 미 문화원 주위 5개 빌딩에 현수막을 걸고 유인물을 뿌리며 학생들의 행동을 지원했다. 그런데 사실 민청련 역시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을 뿐, 점거를 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미국은 진압을 요청하지 않고 부대사까지 협상 테이블에 잠시나마 등장하는 등 신사적인 태도로 임했지만 `선 농성해제, 후 대화`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었고, 이에 대해 학생 측은 `공식문서화와 학살동조 책임 인정 및 공개사과`요구를 내세우며 팽팽히 맞섰다. 이 농성은 국내 언론은 물론 외신의 관심까지 모아 학생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투쟁성과를 올렸다. 당시 문화원 도서관 차도 쪽 창문은 개폐가 되지 않은 통유리여서 학생들과 기자들은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학생들은 72시간의 농성과정에서 "미국 측의 미온적인 태도에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5월 27일에 있을 남북 적십자회담을 고려하여 농성을 풀기로 하고…, 농성해제가 문제의 해결이 아닌 보다 효과적인 싸움을 위한 재출발"임을 밝히고 5월 26일 평화적으로 농성을 풀었다. 이후 함운경 등 25명의 학생이 구속되고, 43명 구류, 5명 훈방으로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구속된 학생들은 재판 자체를 완강하게 거부하여 재판 자체가 또 다른 사건이 되었다. 당시 재판을 맡았던 이재훈 판사는 훈계문을 법정에서 낭독하여 훈계문 판사라는 별명까지 붙었지만, 판사 사직 후 학생들, 부모님들과 화해했으며, 10주년 기념식에 참가하여 학생들의 용기를 치하하기도 했다. 

농성기간 동안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학생운동조직들을 좌경용공으로 매도하다가 나중에는 폭력 사대주의로 몰아갔다. 또한 5월 27일에 있을 남북 적십자회담을 겨냥하여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행위라는 식으로 국민의식에 깊이 뿌리박힌 반공 이데올로기를 자극, 위기의식을 조장하여 문제의 확산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비해 미국은 이 사건을 통해, 한국에서 가시화되기 시작한 반미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 역점을 두고 광주항쟁에 대한 책임을 전두환 정권에 전가하기에 급급했다. 

당시 학생들은 반미를 좌경용공으로 매도하는 정권의 시도에 대해 `반미는 아니다`는 수세적 입장을 취했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됨으로써 전 국민과 세계 여론의 관심을 크게 끌었으며, 이로 인해 미국이 한국 국민의 영원한 우방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광범위하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이 사건은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사에서 `민족의 자존을 일깨운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여담이지만 농성참가자들이 훗날 미국비자를 신청했을 때 `테러리스트`로 분류되어 비자가 거절된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작년부터 모 대기업이 투자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이 사건을 영화화하기로 했는데 제목은 `구국의 강철대오`, 장르는 코미디라고 한다. 그 장렬한 황산벌 전투조차 코믹영화로 만드는 문화인들이고 아직 내용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이니 뭐라 평하기는 어렵지만 25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 아닐까? 

이 건물은 현대사에서 우리나라에게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느냐에 대한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게 하는 상징적 장소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쉬운 점은 미국과 재산 교환으로 서울시 소유가 된 이후 시가 사용하고 있기에 내부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서울시 신청사가 완공되면 서울시도 공간에 여유가 생길 터이니 적어도 2층 옛 도서관 부분은 기념관으로 전용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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