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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 일대

혜화동 일대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서울이 역사도시라고 하지만 처음 서울에 온 외국인들은 잘 믿지 않는다. 고궁을 제외하면 전통을 알 수 있는 공간이 별로 많지 않고, 근대는 물론이고 몇 십 년밖에 되지 않은 현대사의 무대조차 많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의 역사적 현장이 가장 많은 곳은 아마도 정동일 것이다. 그 다음은 혜화동, 동숭동, 연건동, 명륜동 일대가 아닐까?

이 일대는 서울대와 성균관대가 있고, 기독교회관이 인접해서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이런 ‘불온한’(?) 분위기는 조선시대부터 존재했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당시 이 일대를 일컬었던 ‘반촌’이 중요한 무대가 되면서 많은 이들이 반촌이라는 고유명사를 알게 되었다.

천자의 나라에 세운 교육 기관은 벽옹(辟雍)이라 불렀으며, 제후의 나라에 세운 교육 기관은 반궁(泮宮)이라 불렀다. 벽옹과 반궁의 주위는 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벽옹은 완전히 둘러싸서 거의 섬이나 마찬가지였고, 반궁은 반만 둘러쌌기에 반궁을 두른 물을 반수(泮水)라고 불렀다. 조선은 형식상 명나라와 청나라의 제후국이었으므로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반궁이라 불렀다. 그래서 성균관 주위에 있는 마을은 반촌이라 불렀고, 반촌에 사는 사람은 반민 또는 반인(泮人)이라 불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반민의 유래는 고려 말 문성공 안향이 자기 집안의 노비 1백여 명을 희사하여 학교를 부흥할 것을 도운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노비들의 대부분 여진족 출신이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한양으로 천도하여 국학(國學)인 성균관을 옮기자, 노비 자손 수천 명이 반수를 둘러싸고 집을 짓고 살아 마을을 이루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곳을 반촌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곳 사람들은 반민 또는 반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들의 생계는 성균관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는데 특이한 부분은 도살장 기능이 마을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인데, 이는 반민들이 유목민족인 여진족 출신이라는 것과 큰 관련이 있다. 그들이 도축한 고기는 성균관 유생의 밥상에 올라갔다.

이 마을은 성균관 유생의 하숙촌이기도 했다. 성균관 유생은 원칙적으로 성균관에 딸린 재(齋, 기숙사)에서 먹고 자야 했다. 그러나 성균관에 숙식할 곳이 모자라면 어쩔 수 없이 성균관 밖 반촌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성균관의 식당 정원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균관의 규칙이 너무 딱딱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과거 때 지방에서 올라온 선비들이 머무르는 여관촌 역할도 하였다.

성균관에서는 유학 경전이 아닌 다른 학문, 즉 천주교 경전 등에 대한 토론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불온사상’에 관심이 많은 성균관 유생들에게 일종의 지하 서클 활동 장소로서 반촌은 이상적인 곳이었다. 실학의 거두 정약용과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인 이승훈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둘은 과거공부를 핑계로 반촌사람 김석태의 집에서 천주교 교리를 학습하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혜화동 로터리에는 가톨릭 대학교와 동성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주류 문화와 비주류 문화가 기묘하게 동거하고 있던 혜화동 일대는 근대화를 맞이하면서 구한말 일본의 힘에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대한의원이 세워졌고,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교가 1929년 4월 5일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변신을 하게 된다. 해방이 되자 이곳은 이승만이 이화동에 자리 잡고, 여운형 선생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살당하면서 다시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는 서울대생들이, 25일에는 대학교수단이 이곳에서 시위를 시작했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장소되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생 시위대는 태평로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다가 돌아가면서 종로4가 옛 천일백화점 앞에서 정치깡패들의 테러로 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당했다. 다음 날 이에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가장 먼저 나온 학생들은 고려대와 인접한 신설동의 대광고등학교였다. 대광고 학생들은 종로5가까지 진출했다가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공격을 받고 혜화동 서울대 쪽으로 밀려났다. 또한 부통령 장면이 교장으로 재직했던 적이 있었던 동성고등학교 학생들 역시 서울대 쪽으로 진출했다. 눈에 잘 뜨이진 않지만 장면 총리의 집과 동성고등학교의 4·19기념비도 혜화동 로터리 부근에 있다.
 


이미 시위를 준비하긴 했지만 어린 후배들의 호소와 비명에 자극받은 문리대생들은 사복경관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나섰다. 법대, 미대, 수의대생들도 합세했다. 경찰들을 곤봉을 휘두르며 저지에 나섰지만 학생들은 공사장의 돌을 모아 투석전을 벌이며 저지선을 돌파했다. 거의 모든 대학과 시민들이 거리에 나왔고 경무대까지 진출했지만 경찰의 총격으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바로 이날이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올라있을 정도로 한국 민주화운동의 빼놓을 수 없는 고유명사 4.19였다.

4월 19일 계엄령이 내려졌고 이승만 정권은 이기붕의 부통령 부정 당선을 취소하는 정도로 무마하려 했지만 국민들의 분노는 식지 않았다. 결국 4월 25일 오후 3시 서울 각 대학교수 258명이 서울대 의대 교수회관에 모여 2시간 반 동안의 토론 끝에 14개 항목에 달하는 시국선언을 채택하였다. 4월 19일에 이어 제2의 횃불을 올린 대학교수단의 시위는 오후 5시 50분 경 교수회관 앞에서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각 대학교수단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사열종대로 질서정연하게 출발하였다. 교수단의 행렬을 따라 계엄 하에서 움츠렸던 시민과 학생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다음 날 이승만은 하야하고 국민들은 주권과 자유를 되찾았다.

다음해 4.19혁명 1주년에 문리대 앞에 다음과 같은 기념비가 세워졌다.
“상아탑은 진리의 탐구자요 정의의 수호자다.”

하지만 1년 후인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박정희 독재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는 미국의 숙원이기도 했던 한일국교정상화를 시작했다. 1964년 3월 5일 청와대는 4월 초순에 한일 정상회담을 갖고 하순에는 협정문 초안을 작성하여 5월 초에 조인을 하겠다는 일정을 발표하였다. 그러자 3월 24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지금의 마로니에 공원에서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모의화형식”을 감행했다.

이 화형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서울의 다른 대학 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고 박정희 정권은 당황했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3월 30일 11개 대학의 학생 대표들이 박정희를 면담하고 요구사항을 전달함으로써 한일회담 반대 운동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무시하고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하였으며 이에 다시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일어섰다. 그들은 5월 20일에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감행했다. 이후 한일회담 반대 운동은 다시 거세게 타올랐고 6월 3일 수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이에 박정희는 그날 오후 8시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병력을 서울 시내에 투입하는 강경책으로 나왔다. 결국 이듬해인 1965년 6월 22일 한일회담은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1973년 10월 2일 문리대 학생 250여 명은 4·19기념탑 앞에 모여 비상총회를 열고 자유민주체제 확립,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유신의 총구 앞에 겁도 없이 나섰다. 이는 유신선포 이후 유신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수용하지 않는다는 박정희의 엄포를 거부한 최초의 움직임이었다. 전국의 각 대학들도 이에 호응하여 유신철폐 시위를 벌였으며 재야인사들도 잇달아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지난 한일회담 반대 운동 이후 다시 한 번 문리대가 전국적 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에게 도심에 위치한 서울대 캠퍼스는 눈에 가시였기에 그들은 관악으로 이전을 추진하여 학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5년에 실행에 옮겼다. 이 때 4·19기념탑도 같이 이전되었다.

서울대 문리대 자리에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마로니에 공원이 있고, 그 곳에는 옛 서울대 교정을 축소 제작한 모형과 함께 서울대학교 유적 기념비가 함께 서 있다. 서울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공원 오른쪽에 자리한 옛 문예진흥원 앞에 가면 더욱 실감이 난다. 이 건물이 사적 278호로 지정된 옛 서울대 본관 건물이었음을 알리는 푯말이 서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94년 문익환 목사가 서거했을 때도 수만의 인파가 이곳에 모였고 작년에 세상을 떠난 이소선 여사와 김근태 의장의 빈소도 서울대 병원에 있었다. 이곳은 서울대가 떠나도 여전히 한국 민주화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방송통신대와 서울의대 일대는 근대 건축물로 인해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마로니에 공원 북쪽은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화려한 소비지역인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옛 반촌의 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탓이 아닐까? 며칠 후는 4월 19일이다. 술 마시러 연극 보러 혜화동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때의 함성을 한 번 되새겨 보기 위해 그 곳에 가보는 이가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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