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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문익환과 봄길 박용길의 길을 가다 : 통일의 집, 한신대 수유리 캠퍼스, 한빛교회

늦봄 문익환과 봄길 박용길의 길을가다 : 

통일의 집, 한신대 수유리 캠퍼스, 한빛교회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늦봄이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 후 프린스턴 대학으로 돌아가 신학 석사 학위를 받고 맡은 자리가 한신대 교수였다. 봄길 박용길 역시 이곳 사택에서 오래 살았고 한신 부인회를 조직해서 장학사업, 빈민구제, 탁아소 운영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다. 이어질 민주화 운동의 ‘예행연습’이 된 셈이다. 슬하의 3남 1녀 역시 이곳에서 성장했다. 김용옥 교수가 너무나 아름답다고《노자와 21세기》에 찬사까지 남긴 수유리 계곡은 지금 복개되었고 ‘ㄴ’자 형의 강의동도 철거되고 새로 지어져 옛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옛 강의동은 늦봄의 영결식 때 걸게 그림이 걸려 있었던 건물이어서 더욱 아쉬운데 그래도 모형은 만들어져 있다. 신축이 결정된 당시 즉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대학교 건물 중 ‘연탄난로’를 사용했던 건물이었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존재는 임옥상 화백이 제작한 문익환 ‘시비’이다. 시비에 따옴표를 붙인 것은 바로 그 파격적인 형식 때문이다. 늦봄이 통일을 염원하면서 읊은 `잠꼬대 아닌 잠꼬대`와 `꿈을 비는 마음`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놋쇠 조형물로 형상화한 것으로 2008년 11월 11일에 제막되었다. 시비도 그렇지만 그 앞에 있는 활짝 웃는 청동초상 역시 무척 인상적이다. 사족이지만 원래는 도라산 역이나 임진각에 세우려 했지만 국방부와 경기도의 반대로 이곳에 서게 된 것이라고 한다. ‘전통적인 양식’의 시비는 그 전해 한신대 오산 캠퍼스에 세워졌다. 

수유역에서 1번 마을버스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면 인수동 주민센터 옆에 문익환 목사의 집을 그대로 사용한 ‘통일의 집’이 있다. 인수동이란 이름이 보여주듯이 북한산 인수봉 가는 길에 있고. 집 뒤에는 다른 집이나 건물이 없고 바로 산이다. 서른 평도 안 되는 조그만 집안에는 늦봄와 봄길의 유품과 사진들로 가득 차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유품’은 민통련의 나무현판이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명문의 집이라기에는 너무 작지만 이곳에서 늦봄과 봄길이 마지막 날까지 살았다. 물론 문 씨 집안 특유의 중대사를 토론하여 결정하는 가풍 역시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곳이 지어진 해는 1973년, 늦봄이 세상을 떠난 해는 1994년이니 이곳에서 21년을 보냈지만 실제로 산 시간은 반 밖에 되지 않는다. 왜냐? 거의 11년을 감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늦봄이 간 후, 집 역시 지은 지 20년이 넘어가 낡아 수리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건설노동자들이 모금을 하고 직접 수고하여 집은 다시 태어났고 지금까지 튼튼히 버티고 있다. 집 대문 아래에 “통일을 염원하는 건설노동자의 정성으로. 1997.4.19 (주)건설노동자 공동체 우리건설”이라는 표지석이 붙어있다.

미아동 언덕길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한빛교회. 이 교회는 늦봄의 부친 문재린 목사가 1955년 2월 용정 출신 교인들을 모아 시작한 ‘서울중앙교회’가 원조였다. 문재린 목사가 대구로 떠나자 늦봄이 교회를 ‘세습’했다. 하지만 ‘서울중앙교회’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10여 년 간 건물도 없는 교회였으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예배를 올렸다. 그에게는 이런 철학이 있었다.

“불교는 한국 산천의 아름다움이라도 보존하는데, 한국교회들은 과연 얼마만한 혜택을 주변에 입히고 있는 것일까? 교회들과 계곡에 서 있는 불교 사찰들을 비교해볼 때, 교회건축들은 너무나 꼴불견이다. 버스에서 내려 헐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느꼈는지 모른다. 왜 일반집처럼 짓고 예배를 보면 안 되는가?” (문익환 평전 355쪽)

67년에 교인들의 투표로 정식으로 ‘한빛교회’가 되었고, 얼마 후 늦봄이 성서번역에 전념하기 위해 담임목사를 내놓자 이해동 목사가 뒤를 이었다. 1970년에 이 곳의 집 두 채를 사서 자리 잡았다. 당시에는 지금의 교육관은 없었고 예배당만 간신히 지을 수 있었는데, 이해동 목사는 한 구석을 막아 방을 만들어 그곳에 기거했다. 담임목사직을 내놓았지만 이 곳은 늦봄의 모교회였기에 자주 올 수 밖에 없었다.

늦봄의 ‘늦바람’으로 이 교회는 유명해졌고 기관원들이 주위에 진을 쳤다. 교회 바로 밑 조그만 네거리에 이층집이 있는데, 70,80년대에는 여관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기관원들이 상주하며 문 목사를 감시했고, 특히 주일예배 때에는 교회 입구에 수십명의 경찰이 양쪽으로 도열하여 교인들을 ‘환영’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한빛교회 교인들은 골고타 언덕을 같이 오른 여인들 같이 굴하지 않고 교회를 찾았다. 한빛교회 교인들은 봄길이 “수십 년 된 교회지만 잡음 없이 모두가 한 마음으로 자기 이름 내세우지 않고 자기자리에서 봉사 잘 하시니 너무너무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끝까지 늦봄와 봄길을 믿고 따랐다. 이 교회는 늦봄 가정의 확대판 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루살렘의 골고타 언덕처럼 골목길에 교회가 있다. 예배당은 백 명이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지만 이 곳에서 한국 현대사의 일부가 쓰여졌으니 결코 작은 곳이라 할 수 없다. 십자가에 걸려 있는 가시면류관이 눈에 띄인다.  

예전의 한빛교회는 주일 오후가 되면 갈릴리교회로 변신했다. 아직은 민주화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던 늦봄이 75년 8월 17일, 양심수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한 갈릴리교회>를 만들고 오후에 그들과 함께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역사는 정말 잔인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바로 그날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실족사를 당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늦봄의 ‘늦바람’이 시작된 것이다. 교회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소는 예배당과 교육관 사이에 있는 등나무와 벤치이다, 이곳에서 문익환 목사는 교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몸이 아픈 이들에게는 감옥에서 ‘개발’한 특유의 ‘파스요법’을 시술해주었다. 이 요법은 안쪽은 시커멓고 겉은 하얀 커다란 파스를 콩알만 하게 오려가지고 침 대신 아픈 부위의 혈에 붙여주는 것이다. 효과가 대단해서 나중에는 ‘말씀’을 주는 것보다 ‘파스’를 주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겨레의 혼을 건강하게 하셨던 분이 몸도 건강하게 해주셨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반세기에 가까운 정치인생에서 공식석상에서 세 번밖에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 번은 미국에서 귀국해 망월동 묘지를 참배했을 때,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당사의 오열이고 그 중간에 흘렸던 한 번의 눈물이 바로 문익환 목사 빈소를 찾았을 때 흘린 눈물이었다. 문 목사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증명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통일의 집, 한신대 수유리 캠퍼스, 한빛교회는 모두 강북구에 있어 반나절 정도에 모두 찾아 갈 수 있다. 이곳들 외에 문익환 목사의 숨결이 남아 있는 대표적인 곳을 들면 여섯 차례나 수감되었던 서대문형무소, 3,1구국선언의 무대였던 명동성당, 열사들의 이름을 외쳐 백만 군중을 전율시켰던 연세대 학생회관 앞, 남산의 옛 중앙정보부 건물, 민주화의 성지이기도 한 종로5가 기독교회관 그리고 수많은 열사들과 함께 영면하고 있는 마석모란공원이다. 마지막으로 80년대에 2년 동안 문 목사의 수행비서를 했던 이해찬 전 총리의 회고를 소개하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 양반 모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말이야. 같이 감옥에 가면 툭하면 단식을 하셔서 같이 안 할 수도 없고 참 죽을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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