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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유신 그리고 장준하

10월 유신 그리고 장준하


글 한종수(wiking@hanmail.net)
 

올해는 대한민국을 민주국가라고 할 수 없게 만든 최악의 폭거인 10월 유신이 일어난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운명일까? 바로 올해 대통령 선거가 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씨가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등장했다. 거의 전 국민이 유신의 피해자였지만 가장 대표적인 피해자라면 인혁당사건으로 ‘사법살인’을 당하신 여덟 분과 장준하 선생님을 드는데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새로 조성된 장준하 공원으로 이장하면서 공개된 선생의 유골은 실족사가 아닌 타살의 의혹을 증폭시켰다. 이렇게 장준하! 그 이름이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장준하 선생의 일생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 그 자체였다. 선생은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신학문에 전념하면서 교사 생활도 했다. 17,8세 때부터 곽산에 있는 20미터가 넘는 ‘생별애’라는 벼랑을 타는 ‘모험’을 즐겼다고 하니 그의 운명적인 등산경력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24세 때 일본유학을 갔지만 1년으로 마감하고 귀향, 신안소학교 시절 제자였던 김희숙과 결혼하고 1944년 1월, 사실상 징집에 가까운 학도병으로 참가하였다. 2월 중국 강소성 서주에 주둔한 스카다 부대에 배치되었지만 7월, 홍석훈, 김영록, 윤경빈과 함께 탈출하여 국부군에 합류했다. 이때 먼저 탈출했던 김준엽을 만나 평생 동지가 되었고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까지 6천리 길을 걸었다. 이 대장정 도중 안휘성 임천분교에 있는 광복군 간부훈련 반에서 기초 훈련을 받았고 이곳에서《등불》이라는 필사본 잡지를 발간했다.《등불》은 훗날 박정희 독재정권과 싸우는 최고의 무기《사상계》로 발전하게 된다. 1945년 1월, 53명 동지들의 선두에 서서 그 험준한 파촉령, 그것도 겨울에 넘어 중경임시정부에 도착하여 김구 주석을 만났다. 물론 평소의 등산실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난립한 정파로 혼란스러웠고 국무위원들과 갈등을 일으켜 중경을 떠났다.

1945년 4월, 이범석의 제안으로 광복군 장교가 되었고 국내로 잠입하기 위해 미국 OSS대원에 자원하여 특수 훈련을 받아 광복군 육군 대위가 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작전은 취소되고 말았다. 8월 18일 연합군 군사사절단의 일원으로 이범석, 김준엽과 함께 미군기를 타고 여의도에 착륙하였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하루 만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운명일까? 선생은 정확하게 하루 차이인 30년 후 세상을 떠난다. 그것도 ‘추락사’라는 사인으로․․․ 45년 11월 23일 임정 요인들과 함께 미군기편으로 귀국하였으며 김구 주석의 수행비서를 맡았다.

1949년에는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하여 문화사업을 전개하면서 한길회를 창립하여 뜻을 같이 하는 인사들과 함께 했다. 전쟁 중인 1953년, 피난지 부산에서 문교부장관 백낙준의 추천으로 국민사상연구원에 소속되어 종합교양지《사상(思想)》을 창간하였다. 하지만 이기붕의 방해로 폐간되자 개명하여《사상계(思想界)》를 창간하였다.《사상계》는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데 앞장서 1955년 6월부터 발행부수가 2배로 늘면서 국내 지식인의 필독서인 최고의 잡지로 올라섰다. 이번 장준하 공원을 만드는데 앞장섰던 이인재 파주시장과 김문수 경기지사 역시 《사상계》의 열렬한 독자였다. 4.19혁명 이후 장면 내각에서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이 되어 국가 건설을 위한 정책기획을 담당했다. 5·16군사정변 이후 군부의 민정이양을 놓고 박정희와 김종필을 비판하는데 앞장섰기에 선생과《사상계》는 위기에 몰렸다. 1962년 한국인 최초로 막사이사이 언론상을 수상하면서《사상계》가 이룬 업적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박정희가 추진했던 대일외교, 월남파병 등을 비판하였다. 1967년 정계에 입문, 제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1971년 탈당하고 《사상계》사장으로 복귀하였다. 박정희 독재에 누구보다도 앞장섰지만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선생은 `모든 통일은 선(善)`이라며 환영하였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통일로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있는 것들은 그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되는 개념인 동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되는 것 일 때에는 그것이 거짓 명분이지 진실은 아니다.

한반도 주변 열강, 미·소·일·중의 요구에 따라 남북한이 평화 공존으로 동결되고 그 이상의 통일을 향한 노력을 사실상 포기한다면 민족 분단은 더욱 항구화하고 통일과는 반대쪽으로 치달리게 될 것이다. 민족 통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중이 할 일이다. 통일은 감상적 갈망이기도 하지만 우리들 하루하루의 생활과 직결된 것이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 명령은 없다.

그럼에도 7·4 남북공동성명의 숨겨진 배경도 조심해야 한다며 경계하였지만 결국 석 달 후 유신체제가 시작되었다. 선생은 1973년 12월 24일 YMCA회관에서 전격적으로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시켜 ‘헌법개정백만인서명운동’을 전개하여 유신정권과 정면으로 맞섰다. 결국 1974년 4월 긴급조치 제1호 위반혐의로 구속되었으며, "개헌을 빙자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의 불안을 조성"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12월, 지병의 악화로 형집행정지로 출감하였다.

유신정권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던 1975년 8월 17일, 선생은 호림산악회 회원 약 40여 명과 함께 경기도 포천 이동면의 약사봉에 올랐다. 그리고 이날 오후 약사봉에서 약사계곡 방향으로 뻗은 절벽 아래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이 날 형식적인 사고 조사와 시신 수습이 이뤄진 이후, 시신은 유족들에게 인계되었다. 등산 전문가였던 선생이 이렇게 어이없는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고 정황도 수상한 점이 많았기에 의혹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운구된 시신은 8월 18일 오전에 상봉동 자택 안방에 마련된 빈소에 안치되었다. 부고를 접한 함석헌, 양호민, 김준엽, 계훈제 등이 당일부터 자리를 지켰고, 8월 18일에는 김대중, 양일동, 고흥문, 정일형 등 정치인들과,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 김동길 교수 등 1백여 명이 빈소를 다녀갔다.

8월 21일 오전 8시, 자택에서 가족 발인예배가 엄수되었다. 이어 유해는 영구차로 명동성당으로 옮겨져 오전 10시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하는 영결미사가 엄수되었다. 이 장례식에는 백낙준, 유진오, 김영삼, 김대중, 박순천, 함석헌, 양일동, 김홍일, 김준엽, 김동길, 천관우 등 각계 지인들과 시민 1,500여 명이 참가했다. 영결식 후 유해는 시청 앞, 국회의사당, 중앙청을 거쳐 서대문형무소 앞을 지나 경기도 파주 광탄면의 나사렛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 1개월이 된 9월 17일, 후학 및 민주화운동 동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고현장에서 추모비 제막식이 열렸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오호 장준하 선생!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빼앗긴 민주주의 쟁취, 고루 잘 사는 사회, 민족의 자주평화, 통일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 뜻을 같이 하는 젊은이들이 맨 손으로 돌을 파 비를 세우니, 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 풀뿌리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옳게 증언하리라.

선생이 한 일은 너무나 많지만 가장 큰 공로는 바로 선생의 존재 자체가 아닐까? 그 분 자신이 민주화 운동이 항일독립운동의 맥을 잇고 있다는 가장 좋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새로 조성된 장준하 공원은 통일전망대와 축구대표팀 트레이닝센터(NFC)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사실 장준하 공원은 ‘공원’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곳이다. 묘소와 그 분의 일생을 새긴 석조조형물이 전부이고. 벤치 하나 정자 하나 없다. 다만 묘소는 봉분대신 큰 ‘돌베개’가 대신하고 있었다. 정말 그 분에 어울리는 묘소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기념관도 생길 것이고 선생의 억울한 죽음도 밝혀질 것이다. 서울에서 고향 평안북도로 가는 길에 있기에 통일이 되면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장준하 공원 주위에는 통일전망대 외에도 헤이리나 화석정, 출판도시 등 명소가 많다. 주위를 묶으면 하루 나들이 코스로도 적당하다. 선생의 묘소를 일부러 가라고 하지는 않겠다. 그저 이 근처로 나들이 할 생각이 있는 분들은 선생이 외롭지 않게 한 번 들러주시기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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