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에 가려진 성당과 교회-성공회 대성당과 향린교회
명동성당에 가려진 성당과 교회
-성공회 대성당과 향린교회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성공회 대성당
커다란 십자가를 눕혀놓은 형상의 성공회 대성당은 6‧10민주항쟁의 진원지였다. 하지만 이 성당이 어떻게 건설되었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민주화의 성지인 명동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고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지어졌다. 성공회 성당은 마치 덕수궁의 일부인 것처럼 눈에 뜨이지는 않지만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자세히 보면 이 성당은 기본적으로 비잔틴-로마네스크 양식임에도 한국적 요소가 많이 가미되어 있는데 다 이유가 있다. 성공회는 1890년 9월, 조선에 진출했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서울에 성당을 짓지 않고 강화나 음성 같은 농촌에 한옥 성당을 지으면서 선교를 시작했다. 이런 전통으로 인하여 1922년에야 착공되어 1926년에야 ‘완공’된 서울 성공회 대성당은 사진에서 보듯이 기와를 사용하는 등 한국적 요소가 들어가 있다. 하지만 완공이라는 단어에 따옴표를 붙인 이유는 건축자재 부족과 이런저런 사정으로 계획했던 300평 중 173평만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성공회 측은 반세기가 지난 1974년이 되어서야 증축에 착수했고, 영국 버밍엄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던 기본 도면을 입수하여 재계획하였는데, 증축의 완공도 1996년 5월에야 이루어 졌다. 70년 이상 걸린 건축 기간도 우리나라 근현대 건축에서 정말 드문 일이지만 성공회가 교회의 대형화, 물질화 풍조에서 벗어나 있다는 좋은 증거이기도 하다. 성공회 대학이 조용하게 이 나라의 진보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문화 덕분이지 않을까?
더 재미있는 것은 대성당 뒤의 주교관은 아예 한옥이라는 사실이다. 1987년 6월 10일, 이렇게 저렇게 힘들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 관계자 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대성당과 주교관 사이의 마당에서 ‘고문살인은폐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렸다. 그 중 박형규 목사, 오충일 목사, 김명윤 변호사, 양순직 전 의원 등 20명은 성당 측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미 사흘 전 성당 사제관에 도착해 머물면서 6월 10일 6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는 박종기 주임신부의 도움으로 성당 차량을 이용해 성당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 함세웅 등 ‘거물’ 인사들은 경찰의 철저한 ‘마크’로 성당에 들어올 수 없었다.
6.10 대회 장소인 성공회 서울대성당 주변에서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는 경찰병력
태풍의 힘은 무시무시하지만 정작 중심인 태풍의 눈은 조용한 것처럼 전국을 20여 일간 달구었던 6월항쟁의 시작을 알린 대회장은 아름다운 녹음 속에 너무나 조용했다. 6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유시춘과 지선 스님이 종루에 올라 분단 42년을 끝장내자는 의미로 42번 종을 울렸다. 주위에 비둘기와 새들이 종소리에 놀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치 거사를 전국에 알리듯이… 많은 성당과 교회에서도 거의 동시에 종을 울리며 호응했고 주위의 거의 모든 차량이 경적을 울렸다. 여담이지만 스님과 여성이 대성당의 종루에 올라가 종을 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한옥 주교관 앞에는 그 날의 그 일을 기념하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렇게 성공회 대성당은 자신이 맡은 역사적 역할을 해냈지만 명동성당과는 달리 그 후 시위대나 억울한 이들이 몰려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교세’의 차이, 김 추기경의 이름과 권위, 내려다 볼 수 있는 ‘지리적 강점’ 등이 작용했으리라… 하기야 이제는 명동성당 농성 소식을 들은 지도 오래되었다.
향린교회
그러면 6월항쟁 당시 사실상 대한민국의 ‘정부’였던 ‘국본’은 어디서 탄생했을까? 민주화의 성지이자 한국의 바티칸인 명동성당을 모르는 한국인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곳에서 100m도 떨어져 있지 않은 향린교회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바로 이 교회에서 국본 창립 대회가 열렸다. 전두환의 4‧13호헌조치로 호헌 철폐를 위한 범국민연합전선이 절실히 요구되었고, 야당‧종교계‧재야 세력을 총망라한 국본은 5월 27일 창립 대회를 열기로 하고 장소를 물색했다. 일반 시설은 엄두도 낼 수 없었고 종교 시설만 가능했지만 명동성당은 물론 종로5가 기독교 회관, 성공회 성당도 경찰들에게 봉쇄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명동성당 바로 밑인 향린교회에는 경찰이 없었고, 당일 오전 전국의 2,191명의 발기인을 대표하는 계훈제, 박형규, 최형우, 양순직, 김승훈 등 150여 명의 각 계 인사들이 30분 만에 모여들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공동대표와 임원선출, 결성선언문 낭독, 만세삼창 순으로 결성대회를 마쳤다. 경찰은 나중에야 급히 쫓아왔지만 행사는 끝난 뒤였다.
그러면 이런 역사적 장소를 제공해준 향린교회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민족적 비극인 6.25전쟁이 아직 끝나기 전인 1953년 5월 17일. 폐허로 변한 서울 한복판에서 안병무, 홍창의 등 12명의 젊은 신앙인들이 작은 교회를 창립하였다. 이들 창립자들은 모두 신학을 전공한 바 없는 평신도들로서 학창시절부터 신앙동지로 지내오던 중 민족과 교회의 위기를 뼈저리게 체험하면서 새로운 신앙공동체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믿고,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이렇듯 향린교회의 창립에는 6.25전쟁의 체험과 그 고난 가운데서 무능했던 교회에 대한 반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민족의 위기에 둔감하고, 교파분열과 교권싸움에 여념이 없었던 기성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열정을 갖고, ① 생활공동체 ② 입체적 선교공동체 ③ 평신도교회 ④ 독립교회라는 네 가지 창립정신을 내세웠다. 이렇게 "향기 나는 이웃"(향린, 香隣)이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을지로에 자리를 잡은 향린교회는 초대교회처럼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반(半)수도원적인 형태의 생활공동체로 시작되었다. 아무 교파에도 속하지 않은 초교파 교회였고 독립교회였다. 목회자도 없는 평신도교회였다. 목회자에게 대부분을 맡기는 기존 교회가 아니라 모든 교인이 주체적으로 선교에 직접 참여하는 평신도교회를 이상적인 모습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립 때의 높은 이상과 꿈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무너져갔다. 12명에 불과했던 교인이 같은 해 12월에는 약 50명이 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85명,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135명에 이르게 되었다. 교회의 성장은 역설적으로 공동체를 무너뜨렸다. 더구나 여러 창립자가 유학을 떠나 교회는 변화될 수밖에 없었고, 1959년 3월, 기독교장로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가 점차 다원화, 전문화되어 장로들만으로는 교회를 꾸려나가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담임목사 청빙 문제가 논의되었고, 결국 1974년 10월 김호식 목사가 초대 담임목사로 취임하면서 향린교회는 창립 후 21년 만에 목회자가 이끄는 일반 교회가 되었다.
김 목사가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기간 향린교회는 숫자와 재정 면에서 큰 발전을 이룩했지만 향린교회가 처음 지향했던 모습에서는 점점 멀어져갔다. 이에 1983년 창립 30주년을 맞아 청년들은 향린의 어제 오늘과 내일을 조명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향린이 창립 정신으로 돌아가기를 호소했다. 이때부터 교회의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이 와중에서 1986년에 김 목사가 사임하게 된다. 이에 향린이 지향해야 할 교회상과 적합한 목회자상에 대해 합의를 한 후 1987년 1월에 홍근수 목사를 모시게 되었다. 홍 목사는 13년 가량 미국에서 살았던 철학박사로 신학자요 목회자였다. 그럼에도 홍 목사는 취임 직후부터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악을 비판했으며, 시달리는 억울한 민중에 대한 관심을 강조했다. 특히 모든 구조악의 원천인 민족분단의 벽을 허물고 남북의 평화통일을 역설했다. 그 결과가 87년 5월 27일 그 사건으로 나타나 것이다. 그 날을 기념하는 동판이 교회 입구에 붙어있다. 홍 목사는 1991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다. 하지만 향린 교우들은 홍 목사가 1년 6개월의 형을 치르는 동안 일치단결하여 더 열심히 교회를 지켰고, 불의와 싸우며 고난의 시기를 극복하였다.
향린교회 신도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홍근수 목사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모습
비록 명동성당처럼 눈에 띄는 위치는 아니지만 향린교회에는 여전히 조국의 통일과 민중 생존권 보장을 호소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교회 바로 옆에는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뿐 만 아니라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명동성당은 자체적인 재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억울함을 호소하던 수많은 이들이 모였던 명동성당 진입로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뀔 것이다. 훨씬 작지만 향린은 이름대로 자본의 ‘마수’에 굴복하지 않고 우리 주위에 남아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사족 :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박영숙 선생이 전 재산을 향린 교회에 기부하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