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묵, 눌변, 그러나 청동 같은 진정 : 김승훈 마티아 신부
과묵, 눌변, 그러나 청동 같은 진정 : 김승훈 마티아 신부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2003년 9월 2일. 정의구현사제단의 얼굴이었던 김승훈 마티아 신부가 64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김 신부를 한국 현대사를 바꾸고 6월 항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25년 동안 유지되고 있는 현재의 헌법을 만든 결정적인 사건 즉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 은폐 조작 의혹을 폭로한 당사자로 기억한다.
물론 엄청난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분을 단순히 그 일로 한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10주기를 맞이하여 그 분의 흔적을 찾아나섰다. 김승훈 신부는 1939년 7월 6일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고, 해방 후에는 부모님을 따라 월남했다.
1953년, 소년 김승훈은 한국 전쟁이 막 끝난 8월, ‘마티아’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새 이름을 받는 다는 것 자체가 예사로운 일은 아니지만 ‘마티아’란 세례명은 의미심장하다. <사도행전>을 보면 11사도가 모여 유다의 배신과 죽음으로 생긴 결원을 채우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제비를 뽑아 그 자리를 채운 인물이 바로 마티아 였다. 사제단의 ‘간판’이었던 김승훈 신부는 사실 한 번도 본인이 나서 자리를 맡거나 공식석상의 얼굴로 나선 적이 없었다. 남들이 떠밀거나 빈 자리를 채우거나 심지어 자신의 동의도 받지 않고 조직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웃으며 그 자리를 맡았다. 심지어 신학교 입학조차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세례를 받은 지 다섯 달밖에 안된 1954년 초, 어머니 이신덕 여사는 신학교 교장이었던 정욱진 신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들이 있으면 신부를 만들라는 말을 들었는데 묘하게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너 신학교 안 갈래?”라고 물었다. 소년 김승훈은 “거기가 뭐하는 데지요?”라고 반문하자 어머니는 “좋은 데거든, 안 갈래?”라는 어머니의 답이 돌아왔다. 아들은 덤덤하게 “그러지요”라고 답하여 그의 인생을 ‘별 생각 없이’ 결정해 버렸다. 참고로 당시에는 소신학교라는 중고등학교 단계의 신학교가 있었다. 어쨌든 김 신부의 세례명은 이렇게 운명적이었던 것이다.
명동성당으로 향하는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 (1987.04.01)
1963년, 사제서품을 받고 신당동 성당 보좌신부로 부임했지만 연탄가스를 맡고 거의 죽을 뻔 했다. 사제 서품을 받았을 때만 해도 천하를 다 가진 듯 했던 김 신부는 이 때부터 겸손이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배웠다. 김승훈 신부가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되었다. 부산 태종대 공소에서 요양을 하던 1971년, 행락객들을 상대로 과자와 소주를 팔며 생계를 유지하던 할아버지가 깡패들에게 맞아 김 신부가 항의했지만 경찰은 수수방관 할 뿐이었다. 오히려 할아버지는 깡패들의 고소를 받아 구속되는 어이없는 결과가 빚어졌고 김 신부는 이 때 사회정의를 위해 일어난 원주의 지학순 주교를 떠올렸다.
1972년 1월 23일, 김 신부는 서울로 올라와 신림동(현재 서원동 본당) 본당의 주임신부를 맡았다. 교회의 개혁과 쇄신에 중점을 두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김 신부는 본당 운영에도 민주적 사목을 도입하고 지역사회에도 신경을 썼다. 성당을 짓느라 바쁜 와중에도 1974년,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공식창립에 많은 힘을 쏟았다.
하지만 김 신부는 단순한 ‘운동권’ 신부만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반공단체나 마찬가지인 ‘푸른군대’의 지도신부도 맡았다. 그의 사고는 좌우를 넘나들고 있었던 것이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김대중과 윤보선이 차명한 3.1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었고, 김승훈 신부는 미사의 강론을 맡았다. 김 신부는 불구속 기소되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김 신부의 형님은 중앙정보부에 근무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2년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 때, 김 신부는 한극교회사회선교협의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고, 성명서를 발표하여 문부식과 김현장을 숨겨준 최기식 신부를 옹호했다.
김승훈 신부가 주임을 맡은 본당들은 민주화 운동 단체들의 행사가 열렸다. 동대문 본당에서는 ‘김지하 문학의 밤’이, 왕십리 본당에서는 ‘문익환 목사 출감 환영식’이, 시흥동 성당에서는 범민족 대회가 열렸던 것이다. 여의도 본당 주임을 맡았을 때는 성당의 교리실을 여의도에 많이 모여 있는 금융기관의 노동자들에게 빌려주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결국 이로 인해 여의도 본당을 일찍 떠나야 했다고 한다.
명동성당에서 열린 민주열사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는 김승훈 신부(1987.11.16)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축소조작 폭롤르 맡아달라는 함세웅 신부의 부탁을 받았다. 잘 나서지 않고 뒤에서 돕던 김 신부였지만 덤덤하게 일을 맡았고, 그는 이렇게 “민족사의 최전방”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가 주교가 되기를 바랬지만 그가 원했던 자리는 민주화의 성지인 명동성당 주임 신부였지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10년 전 명동성당에서 열린 김 신부의 장례미사와 민주사회장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 성당은 물론 앞마당까지 가득 찼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 의원과 이창동 문화부 장관이 국민훈장 모란장을 들고 자리를 함께 했다. 추도시는 고은 시인이 썼다.
저 70년대 이래
바람부는 날날마다 모였고,
일주일마다 모였지요.
3공 5공 6공 내내
얼굴 맞대고 허물없이 살아왔지요.
과묵, 눌변, 그러나 청동 같은 진정
거리에서, 미사 제단에서
아버지 같은 사람인데
돌아서면 어머니였습니다.
가죽으로는 오만불손인데
속살은 온통 낮고
낮은 연민의 울림으로
내내 떨고 있었습니다.
김 신부의 장지는 용인 성직자묘역으로 6년 후, 김수환 추기경이 묻혔다. 세월이 어수선한 지금 더 그 분이 그리운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