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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음악] 더 나은 내일을 향한 노래의 꿈, 민중가요

더 나은 내일을 향한 노래의 꿈, 민중가요

글 서정민갑(대중음악의견가)


 


 

사실 민중가요는 대중음악의 장르가 아닙니다. 대중음악 장르라면 지금 연재하고 있는 포크(Folk), 록(Rock), 블루스(Blues), 팝(Pop)이 대중음악 장르이겠지요. 민중가요도 대중음악의 한 종류라고 구별할 수는 있겠지만 민중가요는 음악적 양식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메시지와 쓰임새로 구별되는 음악입니다. 가령 명상 음악이나 파티 음악 같은 구분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도 민중가요가 하나의 대중음악 장르처럼 여겨진 것은 한국에서 민중가요가 그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의 변혁운동을 이끌었던 세력은 전대협, 한총련, 전노협, 전교조 같은 전선운동을 하는 민족민주운동 단체들이었고 이 단체 구성원들은 늘 민중가요를 불렀습니다. 특히 당시 대학에서 가장 큰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음악은 민중가요였습니다. 운동을 하건 하지 않건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광야에서’, ‘솔아 푸르른 솔아’를 모르는 대학생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학마다 중앙동아리로 민중가요 노래패가 한 두 개씩 있었고 단과대학 동아리나 과 동아리로 민중가요 노래패가 있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제가 다녔던 대학에도 민중가요 노래패가 예닐곱 개는 되었으니까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두 번째 앨범이 50만장 넘게 팔린 것은 당시 사회 분위기도 있었지만 이렇게 조직적으로 운동을 하는 세력의 힘이 컸습니다. 대학교 앞에는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들이 있었고 대학에는 노래패들과 운동권들이 넘쳐났으니까요. 

 

 

그리고 1980년대만 해도 대중음악을 하면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아서 노래하는 뮤지션은 드물었습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는 그런 노래를 공개적으로 부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지금이야 창작자가 굳이 운동권이 아니더라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아 노래하기도 하고 이런 저런 집회에도 곧잘 오지만 당시에는 그런 메시지를 담아서 노래하려면 노래를 부름으로써 자신이 감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피해를 감당하겠다는 각오를 해야만 했습니다.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래를 통해 사회를 바꾸겠다거나, 자신에게 피해가 오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고 결심한 이들이 아니라면 민중가요 같은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민중가요를 만들고 듣고 부르는 행위는 저항의 일환으로만 존재했습니다. 운동권이나 운동권에 동의하는 이들이 아니라면 택하지 않는 노래는 반정부 세력, 반체제 세력이라고 불렸던 운동권들의 징표이자 무기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중음악 가운데 평범한 하나로 존재할 수도 있었을 음악이 특정 이념과 태도를 공유한 이들의 음악으로만 존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민중가요는 음악 장르가 아님에도 다른 음악과 구별되는 특별한 장르, 특별한 음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민중가요의 음악적 양식은 포크나 가요, 록이 대부분입니다. 민중가요 아니 민중가요처럼 향유되었던 노래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1970년대만 해도 민중가요라는 말 자체가 없었습니다. 당시 사회운동을 하는 이들이 집회 때 부르거나 애창했던 곡들은 민중가요라는 자기 정체성을 갖고 창작된 곡이 아니었습니다. 가곡, 군가, 대중가요, 민요, 복음성가, 외국 곡 중에서 의미 있는 노래들이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선택되거나 그들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전문적인 민중가요 창작자도 없었고 민중가요만을 부르는 뮤지션도 없었습니다. 미국에서 건너온 포크 음악 문화가 없었다면 아마도 한국에서 저항 가요, 민중가요 역사는 훨씬 늦게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운동이 대학생 같은 지식인 그룹이나 종교운동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체계적인 이념보다는 정의감과 양심을 중시했던 당시 운동의 정서에서는 기존의 곡들을 활용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자신들의 지향을 담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1980년 5․18민주화운동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전두환 일당들이 저지른 광주 학살과 죽음의 항쟁은 남한 내 저항 세력의 세계관과 멘탈리티를 완전히 달라지게 했습니다. 운동은 더 이상 정의감과 양심만으로는 할 수 없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죽임을 당한 이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필요했고, 단순히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목표 아래 조직적인 운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당연히 민중가요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변혁적인 목표를 분명히 하고 비극적인 현실을 담아낸 노래는 비장하고 엄숙한 정서와 비타협적인 자세가 두드러졌습니다. 민중가요는 단순히 듣고 흘려버리는 노래가 아니라 현실을 호도하는 대중가요에 맞서 현실을 제대로 알게 하는 참다운 노래였으며, 대중을 역사의 주체로 일으키는 매개였고, 운동하는 자신과 동지들을 흔들리지 않게 하는 신념의 징표였습니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일도 운동이 되었고 본격적으로 민중가요를 만들고 부르는 전문 집단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노래패가 모태가 되었고, 대학 노래패에서 활동했던 이들이 전문적인 노래운동집단을 만들어 노래를 만들고 공연을 펼치며 테이프를 만들어 민중가요를 널리 알렸습니다. 그들의 영향과 참여로 대학과 교회 등에 민중가요 노래모임이 늘어났고 비로소 본격적인 민중가요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1987년 6월민주항쟁과 789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중가요가 얼마나 대중화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었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꽃다지, 노래마을, 노래를 찾는 사람들, 소리타래, 우리나라, 조국과 청춘, 희망새 같은 노래패와 천지인 같은 밴드, 손병휘, 박종화, 안치환, 연영석, 정태춘을 비롯한 많은 민중가요 음악인들이 등장해서 수많은 곡들을 내놓았습니다. 포크와 가요, 민요, 행진곡 풍의 노래들만이 아니라 록과 팝을 비롯한 여러 장르의 어법들이 민중가요로 활용되었습니다. 노동, 반미, 민주주의, 여성, 통일, 평화, 환경 등의 주제도 다양해졌습니다. 지역도 수도권에 한정되지 않고, 대구, 부산, 광주, 인천, 목포, 청주, 마산 등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2013년 현재 민중가요는 1990년대 초반의 인기와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최근의 민중가요가 과거의 민중가요만큼 좋은 음악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제는 민중가요를 들어주고 불러주고 음반을 사주고 공연에 와주던 이들이 확연히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쇠퇴하고,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민족민주운동세력에서 시민운동으로 넘어가고, 촛불로 대변되는 시민과 네티즌으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재 민중가요를 만들고 있는 이들의 음악적 감수성이 현재의 음악적 감수성과 조응하지 못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일렉트로닉 음악이 대세가 된 현실에서 민중가요 전반이 구사하는 포크 음악은 완성도를 떠나 트랜디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현재의 운동권들은 과거의 노래를 되풀이하거나, 진보적인 메시지를 담은 대중음악 특히 인디 신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의 음악을 민중가요의 대체제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인디 신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의 음악은 민중가요보다 음악적으로 훨씬 다채롭고 트랜디하며 덜 직접적이어서 부담이 덜합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음악이 반드시 민중가요여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민중가요이건 민중가요가 아니건 현실을 직시하면서 다수의 사람들이 고민하고 경험하는 문제를 예술로 담아내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정치적 억압 때문에 옳은 것을 옳다 말하지 못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민중가요와 민중가요 아닌 음악들이 너무 확연하게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비로소 민중가요가 보편화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노래만이 아니라 삶이 되고 길이 되었던 민중가요의 꿈은 여전히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더 과감한 도발과 더 뜨거운 행동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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