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i interview] 28년 후의 삶
[Mini interview] 28년 후의 삶
글 김수희 (전 여성신문 기자) / basara1006@hanmail.net
“시위가 제일 치열했던 1987년 6월 26일에 남대문과 서울역 부근은 마치 전쟁터 같았어요. 페퍼포그에서 나오는 굉음, 최루탄의 포성과 검은 연기로 하늘이 안 보였을 정도니까요. 시민들은 최루탄 때문에 눈도 못 뜨면서도 시위대에 물도 갖다 주고 치약도 발라주고 했답니다.”
김국진(64) 씨는 6·10민주항쟁 때를 ‘전쟁터’ 같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대한보증보험노동조합 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그는 소위 ‘넥타이 부대’의 일원으로 6·10민주항쟁에 참여했다. 당시 시위가 주로 열리던 종로, 을지로, 명동 등 서울 도심에는 금융가가 밀집해 있었고, 1985년부터 금융계를 중심으로 결성됐던 사무직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넥타이 부대’의 주요 구성원이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에 반발하면서 자연스럽게 6월항쟁에 참여하게 됐죠. 또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썸머타임’제가 실시되고 있어서 1시간 일찍 퇴근을 했어요. 퇴근길에 학생들이 시위하고 있으면 함께 구호도 외치고, 경찰이 학생들에게 함부로 하면 말려주기도 했죠. 경찰이 직장인들에게는 함부로 못했거든요. 도로에 내려서면 시위대지만 인도에 올라서면 일반 시민이니까요.”
김씨는 6·10민주항쟁을 “절차적 민주주의의 분수령이었다”고 평가하면서도 최근 심해지고 있는 양극화 현상과 청년들에게 길을 열어주지 못하는 현실을 걱정했다.
“이웃과 더불어 인간답게 사는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실천해봤으면 좋겠습니다.”
“6·10민주항쟁 결과로 6·29선언이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고 한쪽에서는 승리했다고 환호하고 있었지만, ‘이게 전부는 아닌데’ 하는 답답함과 허전함이 있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노동자의 삶이 보장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1987년 7, 8, 9월에 걸쳐 전국적으로 벌어진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에 참여했던 최승회(57) 씨는 “6·10민주항쟁이 형식적이긴 했지만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것을,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조합의 주인은 조합원들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인천제철(현 현대제철)에 근무하고 있던 최씨는 1987년 8월 말 동료들과 함께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과 노동조합 위원장 직선제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1주일간 공장 바닥에서 기계를 붙들고 파업을 진행한 끝에 12시간 맞교대 근무는 8시간 근무로 줄이고, 노조 위원장 직선제도 쟁취해냈다.
“당시 노동자들은 억압적인 노무관리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 자기표현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억눌려왔기 때문에 6월항쟁이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계기를 마련해주자 ‘바꿔보자’는 노동자들의 열망이 강하게 표출된 것이죠.”
하지만 최씨는 28년 전에 가졌던 답답함과 아쉬움을 지금도 느낀다고 말했다.
“실질적인 민주화라는 것은 노동자들이 이 사회의 주인으로 대접받고 자기의 역할을 해나가는 것인데 비정규직 등 사회가 양극화되면서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고 있어 동력을 많이 상실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명동성당 농성을 해산하고 서울에서 항쟁이 동력을 잃어가던 즈음 부산 가톨릭센터 농성으로 인해 다시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6월 17일부터 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가톨릭센터에서 농성을 시작하고, 19일에는 중앙동 가톨릭센터부터 부산역을 거쳐 서면까지 전철역으로 10개 이상 되는 거리에 100만여 명의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했어요. 넥타이 부대, 김밥 아줌마 할 것 없이 다 거리로 나왔습니다. 가톨릭센터로 시민들이 김밥과 물, 깔고 잘 스티로폼, 최루탄 닦는 치약 같은 걸 많이 보내주셨어요.”
김종기(54) 씨는 1987년 당시 부산대 총학생회 부총학생회장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대규모 가두시위 중 경찰과 대치하던 대학생과 시민들 1,000여 명이 부산 가톨릭센터로 긴급 피난을 가게 됐고, 그곳에서 김 씨는 학생 대표부를 맡아 시민대표들과 함께 농성을 이끌어갔다. 백골단과 경찰들이 가톨릭센터를 에워싼 가운데 학생들은 옥상에 올라가 깃발을 흔들며 독재 타도를 외쳤고, 이들의 투쟁은 부산뿐만 아니라 광주 전남을 비롯해 전국으로 퍼져나가 사그라들던 6·10민주항쟁의 불꽃을 다시 일으켰다.
“6월항쟁 당시 분출했던 국민 의식 수준보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더욱 보수적으로 회귀한 게 아닌가 합니다. 본질적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가 어려워지니 사람들은 개별적인 문제에 골몰하게 된 것이죠. 그래도 내 주변을 돌아보고 다 함께 힘을 모아나간다면 개인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하고 지지하는 것을 얻기 위한 노력이 정당하다면 다른 것들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죠. 대학에 처음 들어가서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고,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옳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길게 운동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경희대학교 1학년 학생으로 6·10민주항쟁을 겪은 김주환(47) 씨는 당시 서울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하면서도 시위의 중심은 학생들이 아닌 시민들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호응해 줬다는 것. 1987년 이후 1990년 학교를 떠나 전북 고창으로 귀농할 때까지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늘 시민들의 지지 속에 활동했다.”고 회고했다.
1991년 1년 선배인 아내와 농민운동을 하기로 결심한 그는 고창으로 귀농한 후 대중적인 농민회 활동을 위해 20여 년간 힘썼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농민 집회가 많았던 시기에 늘 앞장서서 시위에 참여하다 연행과 구속도 여러 번 당했다. “옳은 일이라면 그냥 했다.”는 그는 “요즈음은 사람들의 의견이 갈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6·10민주항쟁을 겪은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체화된 것을 실천하면서 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반면 청년들은 그들만의 민주적 삶을 스스로 충분히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봐요. 구체적으로 어떤 삶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를 만들어가는 거죠. 그 판단 기준은 그들 안에, 그리고 우리 사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선제 실시가 끝은 아니잖아요. 민주화를 제대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감시할 국민 기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부정선거와 비리, 뇌물 사건이 끊이질 않고 그로 인해 보궐선거는 계속되고 있어요. 지금의 선거제도 자체에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요.”
6·10민주항쟁에 대해 꽤 자세히 알고 있는 이가람(28) 씨는 항쟁이 일어났던 1987년에 태어났다. ‘독재 타도’와 ‘직선제 쟁취’ 같은 구호는 역사책에서나 접해 본 세대지만 그는 자신과 같은 청년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이 이 사회의 민주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공정한 선거를 위한 철저한 감시 등 정치적 민주화의 완성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경제, 노동, 인권 등 다양한 영역에서 민주화 발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제 또래는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자립을 해 나가야 할 상황인데 쉽지 않아요. 고용이 불안정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취업을 한다해도 노동환경이 청년들에게 매우 폭력적이거든요.”
4개의 비정규직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 씨는 주거나 노동 등 청년 이슈를 해결하기 위한 단체에서도 활동 중이다.
“청년들이 지방정부랑 일을 할 때 비판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더라고요. 요구하고 따지기보다는 눈치를 보는 거예요. 저는 청년들이 권력과 권위에 대해 저항해 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만약 앞으로 6·10민주항쟁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저 또한 참여는 하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내 피부에 와 닿는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충분히 이야기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론화 지점이 더 많아져야 해요. 그것이 어떤 식으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 간의 간극들을 보완할 것이 필요해요. 투표만으로는 민주주의의 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런 방식으로는 차별과 독재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올해 갓 스무 살이 된 박유영 씨는 고등학교 1학년 국사 시간에 들은 박종철이나 이한열 열사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6·10민주항쟁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국사가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선택’ 과목이 되면서 박 씨 같은 젊은이는 더욱 많아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박유영 씨는 투표를 통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맹점을 꼬집으며 소통하지 못하는 현 세태를 걱정했다.
소통과 공론을 민주화의 전제조건이라고 강조한 그는 세월호 참사 같은 사안을 두고서도 사람들이 분열하는 현실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를 냈던 6·10민주항쟁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환상이나 동화처럼 느껴질 만큼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정치에 대한 혐오일 수도 있고, 자신의 삶을 꾸려가기가 너무 절박하기 때문에 그런 걸까요? 대학 내에서도 ‘학내 민주주의’ 이야기가 많이 들리지만 앞장서는 애들은 별로 없어요. 학비에다가 월세도 내야하고, 밥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알바를 해야 하잖아요. 공부하고 그런 활동까지 하는 애들은 쉴 시간이 없어서 엄청 피곤해하면서 골골거려요.”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에서 공부하고 있는 박 씨는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구분이 요즘 최대의 관심사”라며 그것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 열심히 물음을 던지는 중이다. 기존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그의 고민이 훗날 어디에 가 닿게 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