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으로 바로가기

d-letter

돌쟁이 손잡고 ‘문센’으로... ‘공포사회’의 그림자

[일기 쓰는 아내 훔쳐보는 남편]

돌쟁이 손잡고 ‘문센’으로... ‘공포사회’의 그림자


글 최규화/ realdemo@hanmail.net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아내는 지역아동센터 선생님으로 일하다 첫째 아이를 임신한 뒤로 전업주부로 살고 있습니다. 아이에 대한 관심만큼 아이의 삶에 영향을 주는 '세상'에 대한 관심도 많은데요, 아이 키우는 일에 매여, 그 많은 '할 말'들을 풀어놓을 기회가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거리로 나온 '앵그리맘'들의 마음 또한 그랬을 겁니다. 아내의 일기를 통해 그런 엄마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우리 사회에 대한 시선을 공유하려 합니다.  

#1. <아내의 일기>

  어제와 오늘 날씨가 좋지 않다. 여름도 아닌데 '노을'이라는 태풍이 온다고 한다. 비는 별로 안오지만 대신 강풍이 분다. 그래서 오늘 호진이 친구를 만나려던 약속을 취소했다. 이런 날 무리해서 만났다가는 나도 힘들게 뻔하고 호진이가 감기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멀리 나가기는 부담스러워 동네 친구한테 잠깐 볼 수 있냐고 연락했더니, 친구가 컨디션이 안좋다고 했다. 오늘 남편은 저녁에 회식이 있다. 호진이랑 길게 놀아야 했다. 내심 날씨가 원망스럽다. 호진이랑 단둘이 노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집에서만 놀기엔 이제 역부족이다. 에너지가 끓어 넘치는 호진이는 하루에 한 번쯤 밖에 데리고 나갔다 와야 한다. 그래야 덜 징징거리고 밤에 잠도 잘 잔다. 이럴 땐 '역시 문화센터에서 강좌를 하나 들었어야 했나' 싶기도 하다. 

  아니지, 아니야. 한 달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심심함을 못 참아서 내 소신을 꺾어버릴 순 없다. 문화센터에 가자는 유혹은 참 많았다. 호진이의 2014년생 말띠 친구들 중 절반은 문화센터에 다닌다. 그래서 새 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같이 가자고 한다. 육아가 힘들다고 토로하면 문화센터에 가라고 조언해준다. 이제 갓 돌 지난 아이지만 벌써부터 사교육이 당연해졌다. 

  문화센터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내 소신에 안 맞는다. 일단 강사는 여러 명의 아이들을 실내에 모아두고 마이크를 사용한다. 아직 신체기관이 단단해지지 않은 아이들에게 마이크의 큰 소리, 그리고 사람의 음성도 아닌 기계음을 수업시간 동안 듣게 하는 것이 걱정스럽다. 또 별것 아닌 것을 그 시기에 꼭 필요한 것이라며 부모들의 마음을 흔드는 상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강사생활을 했었기 때문인지 화려한 수식어구 속에 숨겨진 별것 아닌 수업내용이 빤히 보인다. 

  문화센터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기분 나쁜 게 있다. 대부분 문화센터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만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문화센터 강좌는 비싸지 않다. 그렇게 비싸지 않은 수업을 듣고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서 장을 봐온다. 그들이 계산했을 상술, 이건 좀 기분이 많이 나쁘다.

  집에서도 충분히 엄마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들, 친구들과 모여 장난감 몇 개 던져두면 알아서 아이들이 터득하며 놀 것들을 여러 가지 명칭을 운운하며 엄마들의 지갑을 열어젖힌다. 지금 해야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그 말이 엄마들을 불안하게 한다.

  우리 동네엔 놀이터도 가까이에 없고, 공원도 없다. 동네 놀이터에 가도 우리 아이가 함께 놀 친구는 많이 없다. 아마 어린이집에 갔거나 문화센터에 갔겠지. 그래서 엄마들은 아이들의 친구를 만들어주려, 본인들의 친구를 만들려 돈을 내고 그곳에 간다. 오늘 생각해보니 나도 친구가 별로 없다. 자연출산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 말고는 친구들이 없다. 그래도 괜찮다. 제일 친하고 제일 가까운 친구가 한 명 있으니까. 그건 바로 내 딸 호진이. 

  '호진아, 엄마가 좀 까칠해서 미안하다. 나중에 친구가 정 없어서 너무 심심하면 그땐 친구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아볼게. 지금은 그냥 이렇게 지내보자.'

  집에서 놀고 있는 박스 하나를 꺼냈다. 구멍 두 개를 뚫어 노끈을 묶었다. 호진이를 태우고 거실을 왔다 갔다 했다. 다섯 번 했는데도 숨이 차고 어지러웠다. 그래서 이번엔 잡기놀이. 난 앉아서 몇 발짝만 따라가고 호진이는 저만큼 도망갔다가 온다. 흠뻑 땀을 흘리고 목욕을 했다. 이렇게 하루가 마무리됐다. 

  '당신은 당신 아이의 첫 번째 선생님입니다'라는 책 제목이 떠오른다. 난 호진이에게 첫 번째 선생님이다. 이제 태어난 지 15개월 되는 아이에게 당분간 선생님은 한 명이어도 되지 않을까. 
 

#2. <남편의 반성문>

  ‘문센’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알고 보니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 ‘문화센터’를 그렇게 줄여 부르더군요. 호진이가 태어나기 전, 시내에 있는 백화점에 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실내에 웬 고급(!) 유모차들이 줄지어 주차돼 있는 걸 보고 ‘여기가 뭐하는 덴가’ 놀라서 들여다봤죠. 사실 그동안은 백화점에 문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호진이를 임신한 뒤에야 유모차 같은 것에도 관심이 생겼고, 그래서 유모차 주차장과 문센도 눈에 들어온 거죠.

  “유모차 되게 많네! 엄청 비싸 보이는 것도 많아” 하고 놀라는 내게, 아내는 “이 정도는 많은 것도 아냐. 요즘은 아기 태어나자마자 문센부터 다니는 게 대세야” 라고 핀잔을 줬습니다. 오늘 아내의 일기를 보니 그 말이 정말 맞나 봅니다. 이제 15개월이 되어가는 호진이 친구들도 많이들 문센에 다니나 보네요. 아이 데리고 어디 쉽게 나가지 못하는 엄마들에게 유모차 끌고 다니기에 편하고 안전한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문센은 꽤 매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 역시 조금 걱정되는 것은 아이들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부모들의 교육에 대한 애착은 대단합니다. 그 애착이 잘못 표현되는 것이 바로 사교육인데요, 영유아 대상 사교육도 다양합니다. 영어학원, 놀이학원, 예체능학원, 학습지, 방문과외, 교구교육, 체험학습, 그리고 문센도 포함되죠. 2013년 육아정책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제외한 사교육을 시작하는 나이로 ‘만 1세’가 가장 많았습니다. 딱 지금 호진이 나이인 만 1세부터 사교육을 받는 아이가 무려 36%. 그 다음으로 많은 ‘만 2세’에 사교육을 시작하는 아이들은 27.1%였습니다.

  만 2세 이하 영아 부모의 41.9%, 만 5세 이하 유아 부모의 86.8%가 유치원과 어린이집 교육비 말고 사교육비를 쓰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들이 쓰는 영유아 사교육비는 한 해에 2조 7000억 원. 너무 큰돈이라 감이 잘 안 옵니다. 조사대상 전체의 1인당 한 달 평균 사교육비는 8만100원, 그중 사교육을 하지 않는 아이들을 빼고 계산하면 한 달에 1인당 12만5,700원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호진이 또래에서는 아직 반반 정도 비율이지만, 유치원을 갈 나이가 되면 열 명 중 아홉 명 정도는 사교육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정말 ‘대세’라 할 만하죠. 지금도 대세를 따라 문센에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몇 년 뒤 사교육을 시키지 않는 ‘열 명 중 한 명’의 부모가 되면 어떡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됩니다. 

  이런 사교육에 대한 집착을 부모들만 탓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보다 부모들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적지 않은 돈을 들여서라도 사교육을 시키는 거니까요. 그 마음은 그냥 ‘남들이 다 하니까’ 하는 정도의 모방심이 아니라, ‘남들은 다 하는데 우리 아이만 안 하면 뒤처지니까’ 하는 수준의 공포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경험해본 우리 사회가 딱 그렇기 때문이죠. 안정망 없는 사회, 경쟁에서 한번 뒤처지면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단단한 계급사회. 그런데도 공정한 경쟁조차 보장하지 않는 부정한 사회.

  우리 사회를 먼저 경험하고 ‘낙오되면 끝장’이라는 공포를 갖고 있는 부모가 ‘대세와 다른 선택’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부모는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는 아이의 미래를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뼈 빠지게’ 돈을 벌어서, 아이를 경쟁에서 살아남게 하는 데 그 돈을 쓰는 겁니다. 이렇게 무한한 경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공포, 그래서 경쟁사회의 다른 이름은 공포사회입니다.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즐거운 돌쟁이 호진이와 그의 친구들에게도 이미 공포사회의 그림자는 드리워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 아이는 사교육 없이 행복하게 키울 거야’ 하고 혼자 아무리 다짐한다 해도, 그 다짐은 오래가기 어려울 겁니다. 경쟁과 공포로 굴러가는 이 사회의 큰 흐름을 바꾸지 않는 한, 혼자만의 다짐은 늘 대세 앞에 무릎 꿇게 될 겁니다. 공포에 쫓겨 살지 않아도 저마다 나름의 행복을 짓고 살아갈 수 있도록, 불공정 경쟁을 없애고 사회안전망을 튼튼히 만들어가는 것이 공포사회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오늘 아내의 일기에서는 또 다른 걱정거리가 보입니다. 아빠의 회식이 호진이에게 미치는 영향 말이죠. 집에 일찍 들어오지 않는 아빠 때문에 엄마가 ‘긴 하루’를 걱정하느라 문센에까지 마음이 흔들린 거니까요. 문센의 유혹에서 벗어나려면 제가 회식을 안 가야 하는 걸까요? 이미 수첩에 적혀 있는 이런저런 술 약속과 저녁 모임 일정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아, 머리가 아픕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