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 싱가포르 모델, 아시아식 민주주의
[세계의 민주주의]
리콴유, 싱가포르 모델,
아시아식 민주주의
글 박은홍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ehpark@skhu.ac.kr
싱가포르는 서울보다 약간 큰 영토를 가진 도시국가이다. 인구는 550만 명으로 74%가 중국계, 13%가 말레이계, 9%가 인도계 등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다인종사회이다.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아시아에서 단연 1위로 추격 성장에 성공한 대표적인 동아시아 신흥 공업국가이다. 또 주민의 90% 가량이 공공주택의 혜택을 누리는 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복지국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서구 지식인들로부터 세습 독재, 낡은 유럽형 전체주의라는 비난도 함께 받았다.
싱가포르는 1959년 이래 카리스마가 넘치는 리콴유 일인 통치 체제, 그가 이끄는 인민행동당 일당 지배 국가였다. 생존, 번영, 질서는 싱가포르의 정치생활과 경제생활을 특징짓는 용어가 되었다. 1990년에는 리콴유의 뒤를 이어 부수상이던 고촉통이, 2004년에는 리콴유의 장남 리셴룽이 각각 수상직에 올랐다. 수상직에서 물러난 리콴유는 막후에서 원로장관이라는 직함을 갖고 ‘아시아적 가치’라는 개념으로 민주 정부보다는 좋은 정부의 미덕을 강조했다. 싱가포르 정부가 미국이나 대다수 유럽 국가들보다 높은 투명성을 보이는 것도 ‘좋은 정부’의 근거였다.
리콴유는 1954년 11월에 인민행동당(PAP)을 창당하고, 5개월 후인 1955년 4월 총선에서 4명의 후보자를 출마시켜 3명을 당선시키고, 1959년 5월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수상에 취임하였다.
싱가포르 전경 ⓒ싱가포르 관광
리콴유가 이끈 인민행동당 정부는 사회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공산주의와 인종주의를 사회 무질서를 부추겨 싱가포르의 생존을 위협하고 발전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였다.
싱가포르는 반 세기 전만 해도 높은 실업률, 낮은 주택보급률, 만연한 부패와 높은 범죄율로 인해 미래가 불투명한 작은 도시국가였다. 특히 싱가포르는 1963년 9월 16일 말레이시아연방에 합류했다가 1964년 7월과 9월에 많은 사상자를 낸 무슬림 말레이인들의 인종 폭동을 경험한 후 연방에서 탈퇴, 1965년 8월 9일 자주 독립국가로 출발하게 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당시 리콴유 수상이 말레이시아연방으로 싱가포르의 편입을 추진한 이유는 농산물 자원은 물론이고 식수조차 부족한 싱가포르로서 홀로서기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말레이시아 수상 툰쿠 압둘 라만은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던 싱가포르가 ‘아시아의 쿠바’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던 터에 그 해결 방안으로 싱가포르가 연방의 일원이 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대다수가 중국계인 싱가포르의 차별을 우려한 ‘말레이인의 말레이시아’가 아닌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라는 리콴유의 구호가 토착 말레이인의 특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인식한 말레이시아는 결국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제외시키기로 결정했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를 조문하기 위해 빈소를 찾는 시민들 ⓒ연합뉴스
말레이시아연방에서 분리되자 싱가포르를 두고 경제 침체와 정치 소요로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될 것이라는 비관론이 제기되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리콴유는 ‘생존 이데올로기’(ideology of survival)를 내걸고 불안정을 극복하는 차원에서 압축적인 고성장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그 수단은 계급 간, 인종 간 갈등을 억누를 수 있는 강력하면서도 능률적인 중앙집권적 행정이었다. 대표적으로 정부, 고용주, 노동자 3자 협의체인 국가임금위원회는 노동자들의 단체협상력을 약화시키고 정부 주도의 ‘산업 평화’를 이끌어냈다. 1993년 11월 아프리카 정상들과 가진 모임에서 리콴유는 “강력한 정치 리더십은 중립적이고 효율적이며 정직한 공직자를 필요로 한다. 이들은 전적으로 능력에 따라 선발, 승진되어야 한다.”라면서 능력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리콴유의 이러한 능력주의 옹호는 마초능력주의(macho-meritocracy)라고까지 표현되었다.
싱가포르의 도심 ⓒ싱가포르 관광청
리콴유의 통치 철학은 대중을 훈육 대상으로 보는 규율정치에 대한 옹호,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옹호로 이어졌다. 리콴유를 변호하는 싱가포르 학파는 개인보다는 집단, 변화보다는 안정, 경쟁보다는 합의를 중시하는 공동체 문화가 바로 아시아적 가치이고, 아시아 국가들은 아시아적 가치에 기반한 ‘아시아식 민주주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질서, 가족, 집단 우선주의와 중노동은 아시아적 가치의 미덕이다.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범람은 범죄, 무질서, 부패를 조장하며, 실제 서구 사회는 여러 사회적 병리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리콴유, 고촉통과 같은 싱가포르 인민행동당 지도자들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로도 불리우는 싱가포르에서 정부가 허용한 행동반경을 넘어설 경우 이를 골프 용어 OB(Out of Bounds)에 비유한다. 특히 국가보안법(ISA)은 인민행동당 정부가 정치적 반대자들을 규율하고 통제하는 데 활용되었다. 대표적으로 1987년 5월 싱가포르 당국은 국가보안법을 걸어 정부 전복 혐의로 26명을 체포하고 이들로부터 허위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을 가했고, 석방 직후 일부가 고문을 가하지 않았다는 정부의 주장을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갖자 재차 구속하였다. 심지어 싱가포르에서는 공중질서를 위반했을 때조차 비인간적인 처벌이 내려진다. 태형 제도가 대표적인 예이다.
아시아에서 비공산주의 국가로서 싱가포르만큼 국가가 일상생활을 통제하는 나라는 없다. 반면 아시아에서 싱가포르만큼 국가가 복지와 안전을 책임지는 나라도 보기 힘들다. 리콴유가 옹호한 아시아식 민주주의는 서구의 식민지배 이후 국가재건과 개발이라는 탈식민화의 격랑 속에서 만들어진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이다.
리셴룽 수상 체제 하에서도 아버지 리콴유 체제 시기와 마찬가지로 일당지배, 기술관료 우위체제, 질서와 물질적 번영을 강조하는 정치이념 등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싱가포르 모델은 재건과 개발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시아 국가들, 특히 신공산주의라고도 표현되는 중국, 베트남에게도 흥미로운 모델이다. 리콴유가 집권 초기 공산주의와 선을 긋는 사회주의자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아시아식 민주주의로서의 싱가포르 모델은 정치독점과 개방경제의 융합형인 신공산주의의 선행모델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싱가포르 모델’과 ‘아시아식 민주주의’의 다면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