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지 못한 이들의 무덤 `파주 적군묘지`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 그래도 양지바른 드메를 골라 /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삽십(三十) 리면 / 가루 막히고 / 무주 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 미움으로 맺혔건만 /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 구름은 무심히도 / 북(北)으로 흘러 가고 /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 목놓아 버린다.
한국전쟁의 총성이 멎고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 1956년 시인 구상이 <<자유문학>>을 통해 발표한 <초토(焦土)의 시8 - 적군묘지 앞에서>이다. 적군, 즉 북한군 병사가 묻힌 묘지를 소재로 동족상잔의 비극과 통일을 향한 염원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구상의 마음을 움직였던 적군묘지... 그러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전쟁의 참상이 사라져가듯 그 묘지가 어디에 있었는지 지금은 알기 어렵다. “삼십 리면 가루 막히고”라는 시어로 보아 그저 휴전선에서 1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따름이다.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적군묘지가 한 곳으로 통합된 것은 구상의 시가 나온 지 40년이 더 흐른 지난 1996년들어서였다. 휴전선에서 남동쪽으로 불과 7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남방한계선으로부터는 고작 5킬로미터 거리다. 구상 시의 그곳보다 북녘에 더 가까워진 셈인데, 1990년대 초 북미 사이에 유해 송환과 관련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을 때 우리나라도 향후 북한과 유해 송환 협정을 맺을 경우 하루라도 빨리 인도할 수 있게끔 준비하는 차원에서 단일한 통합 묘지를 마련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적군묘지의 공식 명칭이 ‘북한군/중국군 묘지’라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 당시 국군과 연합군이 맞서 싸은 상대는 북한군만이 아니었다. 6,099㎡의 면적에 1,100여 구의 유해가 묻혔는데 그 중 5백여 구는 중국군 병사들의 유해였다. 여기서 ‘유해다’라 하지 않고 ‘유해였다’고 쓴 이유는 중국군 유해가 지난해와 올해 두 차례에 걸쳐 중국으로 송환되었기 때문이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한중정상회담에서 한 약속의 결과였다.
그러면 북한군 유해는 왜 아직 남한 땅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적군묘지를 관리하고 있는 25사단 비룡부대의 공보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적군일지라도 그 유해는 '전시 영현(英顯) 처리규정'에 따라 본국으로 송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북으로부터 아무런 송환 요청이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저희가 임의로 보낼 수도 없고요. 그래서 일단은 북에 가까운 이곳에 모아 관리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실 정부에서는 ‘교전 중 사망한 적군의 유해도 존중해야 한다’는 제네바협정 추가의정서 제34조에 따라 북에 여러 차례 송환을 제안한 적이 있다. 그러나 북은 응하지 않았다. 적군묘지에 묻힌 이들 대부분이 ‘무명인’이기는 하지만 비단 한국전쟁 중의 전몰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적군묘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면 한국전쟁 당시의 전몰자 외에 ‘그 이후’에 사망한 이들도 묻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68년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김신조와 함께 내려왔다 사살된 1.21사태 때의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6기지 특수부대원 30명을 비롯해 1987년 11월 29일 김현희와 함께 대한항공 858편을 폭파하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김승일, 1998년 12월 17일 여수 반잠수정 침투사건 때 사망한 공작원 6명 등이다. 한국전쟁 중이 아닌 그 이후에도, 적잖은 북한 군인들이 남한 땅에 뼈를 묻었다.
상황이 그러하니 북한 입장에서는 유해 송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받아들이게 되면 결국 정전협정 뒤에도 남한 땅에 자기네 군인을 침투시켰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북에서는 1953년 정전협정 이래 지금까지도 휴전선 이남의 북한군 유해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해왔다. 인정하게 되면 정치적으로 문제가 커질 수밖에 없을테니까. 북한군 유해가 여태 남한 땅에 머무르고 있는 까닭이다.
과연 이 유해들은 언제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더욱이 북녘에서 죽어간 남한의 청년들은 언제쯤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중국군 유해는 고향으로 송환되었지만 북한군 유해 송환은 기약이 없고 반대로 북한땅 곳곳에 산재해 있을 한국군의 유해는 대략적인 숫자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나마 지난 2012년에 북한 함경남도 장진호 근처에서 발굴해 송환되어 온 18살의 김용수 일병 등 12구의 남한 청년 유해가 유일한 남북 간 유해 송환 실적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남북 간의 유해 송환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국군 소속이 아닌 미7사단 15전차대대에 배속된 카투사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 1990년 5구의 미군 유해를 미국에 전달하는 것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북녘에 묻혀 있던 미군 유해를 송환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데, 이 카투사 병사들도 그 과정에서 남한이 아닌 미국으로 송환된 것이다. 만약 이들이 미군이 아닌 국군에 배속되어 참전했다 사망했다면 어떠했을까? 아마도 여태 북녘에 묻혀 있었을 것이다. 다른 대부분의 국군 전몰자들의 사정이 그러한 것처럼.
이 달은 한국전쟁이 본격화 된지 65번째 맞는 6월이기도 하지만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맺어진 지 62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또 2차례의 정상회담과 여러 차례의 대화 노력이 있었음에도 남북 간에는 대결적인 언사에 더해 실제의 포탄이 오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이 타당할까.
물론 종전협정이 아닌 정전협정이 말해주듯 한국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적군묘지에 남아 있는 북한 군인들의 묘가 하나 같이 특정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은 평화를 향한 비록 작지만 의미 있는 시금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묘는 남향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적군묘지의 경우엔 안장자들의 고향이 북한임을 감안해 북쪽을 바라보도록 조성했는데, 세계 유일의 적군묘지라는 비극적 현실을 넘어서려는 망자를 위한 인도주의적인 배려심이 엿보인다. 그런 면에서 남북이 한 발씩 양보한다면 한국전쟁 이후에 묻힌 이들은 추후의 논의 대상으로 미루더라도 일단 전쟁 중 사망한 이들의 유해만이라도 북녘의 고향으로 보내주는 일과 동시에 국군 유해를 송환해오는 작업이 비록 쉽지는 않더라도 아예 불가능한 꿈은 아닐 것이다.
한국전쟁은 남과 북이라는 두 국가뿐만 아니라 국제사회까지 나서서 벌인 극단적인 충돌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되어버린 비극이자 개인이 국가라는 존재에 귀속되어 버린 계기이기도 하다. 그 어제와 오늘의 현실을 확인하고 나아가 미래에의 희망을 그려보고 싶다면 자동차 네비게이션에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55번지나 산56번지를 찍고 가면 된다. ‘적군묘지’나 ‘북한군/중국군 묘지’라고는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