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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적들 – 적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힘

행복의 적들 – 적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힘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 한국의 여성과 남성

인터넷에서 전쟁이 한창이다. ‘여초 사이트’와 ‘남초 사이트’는 커뮤니티 구성원의 성비로 사이트의 성격을 구분한 말이다. 대표적인 여초사이트와 남초사이트‘들’ 간의 첨예한 대립이 한창이다. 발단은 모 여초 사이트의 여성회원들이 또 다른 사이트의 운영진으로부터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특혜를 받았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와서는 발단은 뒤로한 채 서로에 대한 날선 (하지만 저급한) 비방만 남았다. 이 전쟁의 여파가 어찌나 대단한지 이 전쟁의 중심에 놓인 한 남초 사이트 하나는 사이버 망명을 떠나는 회원들을 붙잡지 못해 문을 닫을 위기에 봉착했다는 소문까지 돈다. 

김치녀, 된장질, 김여사 같은 말들은 한국사회의 남성 일반이 여성을 공격할 때 쓰는 흔한 무기다. 앞서 언급한 ‘인터넷 전쟁’에서도 여성들을 공격하는데 이런 말들이 쓰인다. 이 공격은 결국 운전도 잘하고 돈도 잘 버는 남성 신화를 보위하기 위해 여성을 희생양으로 호출하는 것이다. 권력을 수호하기 위해 희생양과 적이 필요했던 6, 70년대 한국정치의 모습과 똑같은 이치. (하여 필연적으로 이 남성 신화 맹신의 끝엔 한국의 산업화에 힘쓰시며 북괴의 도발에서 우리를 지켜주신 그 분이 계신다.)

많은 남성들이 개그맨 장동민에게 열광했던 이유는 그가 여성에 대한 혐오발언을 마구 쏟아내는 폭력적 개그를 구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사회도 형식적 민주화의 과정을 밟아 오면서 여성에 대한 공개적인 혐오발언을 용납하지 않게 됐다. (이를 여남에 대한 역차별, 여성으로의 권력이동이라고 이해하는 마초들도 있지만) 이런 시절에 여전히 여성에게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는 남성 우월 신화의 원형을 유지해주는 그의 개그를 남성들은 솔직함으로 인식하고 해방감마저 느꼈을지 모르겠다. 장동민이 최근 그의 혐오발언으로 세간의 뭇매를 맞자 남성 일각이 ‘마녀사냥’이란 말까지 동원하며 그를 옹호해 주는 이유는 이제는 쉽지 않은 여성에 대한 혐오를 대신 공개해주는 이에 대한 동지적 의리일까. 

# 아프가니스탄의 여성과 남성

우리에게 기억되는 아프가니스탄의 이미지는 전형적이다. 9.11 테러와 오사마 빈 라덴, 대테러 전쟁과 사막, 포연. 그리고 부르카를 쓴 여인.

부르카의 의미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다. 여성을 ‘윤기 흐르는 머리로 뱀처럼 남자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사악한 존재’로 취급하는 데서 부르카는 유래했다. 이슬람 근본주의에서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거나 남성에게 ‘사용’되는 존재로만 기능했다. 

영화 <행복의 적들>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비극의 현장에서 단지 부르카를 쓴 여인으로만 기억될 수 없었던 말라라이 조야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삶과 투쟁의 과정을 조망한다. 

아프가니스탄 제헌의회의 의원이었던 말라라이 조야는 의정연설 중에 의회에서 쫓겨난다. 군벌 출신의 동료의원들에게  “이 곳 이 장소에 모인 많은 분들은 손에 피를 묻히고 있고, “나라를 망치고 여성들을 억압하는 당신들은 세계 재판에 회부되어야 한다”고 일갈한 직후다.   그녀의 선언은 사실상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고 있던 군벌들을 분노하게 했고 그녀는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에 노출됐다. <행복의 적들>은 그녀의 적들, 즉 군벌들의 테러 위협 속에서 진행된 마지막 선거 활동 열흘을 기록한다.

영화 속에서 말라라이 조야의 서사는 영웅적이기도 하고 또 동시에 소시민적이기도 하다. 다큐는 정치인, 여성운동가의 사명을 수행하는 조야와 동시에 인간적 아픔, 정치적 외로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겪어내는 아프간 여성으로서의 조야를 모두 지켜본다.  

 그건 ‘여성의 해방’이라는 거창하지만 절실한 구호가 어느 위대한 정치가의 선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과 같다. 만약 조야와 같은 훌륭한 정치인의 활약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보편 인권’이 신장되고 여성에 대한 물리적 억압이 사라지더라도 그것이 곧 여성에 대한 모든 억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영화는 밝힌다.  


영화에 등장하는 라헬라라는 10대 초반의 어린 소녀는, 지방의 나이든 유지이고 마약상이면서 군벌인 ‘쉬린 칸’이라는 남자와 ‘결혼당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영화는 라헬라와 라헬라 가족의 목소리는 물론, 쉬린 칸의 이야기도 담아낸다. 흔한 영화적 상상에서라면 군벌 쉬린 칸은 어린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악당의 풍모를 보여야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그는 라헬라를 어떤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독점하기 위해 아내로 맞아들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제의를 올렸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해야 하는 것이 아프가니스탄의 문화이다”라는 것. 그가 라헬라와의 결혼을 굳이 고집하는 이유는 그가 탐욕스런 악당이어서가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의 문화적 맥락이 그의 결혼을 명예와 신앙을 위한 ‘정당한’ 행위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권이라는 개념이 ‘천부인권’이라는 당위의 말처럼 인간의 발생과 더불어 하늘에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에서 ‘발명’되고 ‘발견’되어 ‘발생’했고 그것이 전파되는 과정에서야 보편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해왔음을 상기하게 한다. 

조야라는 (아프간 내부에선) 급진적인 정치인의 불온한 일탈만으론 모종의 계기를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관습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 오류를 설득하고 전파해내지는 못하는 것. 

# 다시 한국

한국에도 말라라이 조야들이 있었다. 그들은 여성의 권리를 이야기했고 양성을 쓰거나 호주제 폐지를 이끌어냈고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일단 자빠트리고 보라’던 조언이 일상적인 한국사회 남성들의 폭력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제 한국엔 말라라이 조야가 없다. 그건 더이상 한국에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일정수준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진 사회는 여성에 대한 억압을 은폐했다.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주는 인상은 ‘극단’ 혹은 ‘급진’에 그친다. 골드미스, 알파걸 같은 미디어의 유행어는 이 은폐를 부추긴다. ‘양성평등은 옳다’라고 말하는 쉽고 습관적인 언어 이면에는 여전히 남성중심이라는 지배의 이데올로기가 도사리고 있다. 여성주의자 혹은 여성주의 운동의 주장은 전사회적 아젠다 대신 ‘찻잔 속의 태풍’이 되고 말았다. “이쯤하면 됐잖아”라는 태도.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관습의 오류를 지적하지 못하고 불온한 일탈에 그쳐버린 한국의 여성주의 운동, 한국의 말라라이 조야들은 결국 한국의 쉬린 칸을 넘어서지 못했다.

# 휴머니즘으로서의 여성주의

한국과 아프간의 여성운동이 난항을 겪는 건 오히려 형식적이나마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조야는 아직 아프간에 민주주의는 없다고 말하지만) 내용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성숙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성립된 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오히려 이슬람 근본주의나 유교적 가부장제라는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합작한다. 그리고 도전을 허락하지 않는 기존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희생양을 소구한다. 여성이나 성소수자, 노동자, 빈민은 그 희생양으로 등장하는 단골 캐릭터다. 

때문에 여성주의 운동은 남성 우월주의에 맞선 여성 우월주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작금의 현실에서 여성주의는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위로이고 배제된 이들에 대한 연대, 혐오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이다. 기존의 모든 관습에 대한 새로운 도전, 그 도전은 이제 어느 개인의 일탈적 불온함을 넘어 모든 관습에 저항해 사회 전반이 새로운 기준과 규범을 만들어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해 있다. 

이제 말라라이 조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쉬린 칸을 찾아내야 할 순간.  

말라라이 조야는 국회의원에 당선돼 의정활동을 시작했지만 얼마 후 “아프간 의회는 마굿간보다 못하다”는 발언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하지만 여전히 목숨의 위협을 견뎌내며 아프간의 여성과 민주주의를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의 여성주의 운동도 위기를 맞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불편하고 급직적이고 현실같은 건 모르는 이들로 낙인찍혔고, 그나마 낙인찍혀 줄 여성주의 활동가들도 예전만큼 없다. 여성주의 발언은 불편한대신 남성우월의 혐오발언은 솔직함으로 이해되는 시대다.   

하지만 첨예한 대립과 논쟁, 갈등은 곧 전환의 국면이 가까이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장동민을 둘러싼 논쟁은 장동민 개인에 대한 단죄가 아니라 사회의 여성혐오에 대한 근원적 문제의식으로 이어지고 있고, 조야의 목숨을 위협하는 행동 역시 마찬가지로 아프간의 군벌들이 자신들이 세워놓은 권력의 구조가 위협받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굽이칠지언정 역사는 반드시 정방향으로 흐른다. 아프간과 한국의 ‘휴머니즘’은 굽이를 맞이했고 이제 이 굽이를 벗어나 다시 옳은 방향으로 역사를 쌓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말라라이 조야가 아니라 당신과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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