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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 보통 사람의 생활양식 변화로 보는 사회 변천



K-POP의 세계적 위상을 보여준 싸이의 공연 모습. 2013년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연합뉴스.

  

갑작스럽게 맞은 해방에 사회 질서는 엉망이었다. 게다가 1946년 5월에 시작된 콜레라는 1만 3천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 해 6월에 덮친 홍수, 1948년 1월의 폭설은 수십 년 만에 최대 규모였다. 1946년 9월에는 노동자 총파업, 추수 봉기 등 민심이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이 모든 배경에 분단의 비극이 있다고 느꼈다. 남인수의 <가거라 38선아>가 울려 퍼진 건 그 이유에서였다. 한반도가 전쟁의 본토가 된 1950년, 서울 수복 후 국민병 모집이 본격화됐다. 전쟁은 국가가 강제로 동원한 시민을 죽음의 경계에 세워두는 일이었다. 백설희는 <아내의 노래>를 불렀다. “임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 나는 돌아서 눈물을 감추었다.”

1950년대는 서구 양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였다. 미군이 들어서면서 서구에 대한 동경이 한국 대중음악에 드러났다. 미8군 쇼는 스타를 배출하는 등용문이었다. 영어를 한글로 전사하여 외워 부르고, 미국에서 유행하던 음악을 연주했다. 1960년대에는 트로트가 중년에서 청년세대까지 사랑받았다. 이미자는 <동백아가씨>, 최희준은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로 전성시대를 구가했고 이어 남일해, 배호 등 뛰어난 가수가 등장했다. 1970년대에는 남진과 나훈아의 무대가 대중을 열광시켰다. 심지어 두 사람이 리사이틀 쇼를 할 때는 근처 공단의 여공들이 결근하는 바람에 공장이 자동으로 휴무할 정도였다고 한다. 

1970년대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어온 통기타가 청바지와 생맥주로 표상되는 청년 문화의 아이콘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당시 독재정권은 사회 변화와 정서를 대변한 노래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김민기와 양희은의 <아침이슬>, 송창식의 <왜 불러>, 이장희의 <그건 너>가 대학가의 담장을 넘어 음반으로 발표되었지만 금지곡으로 지정되고 말았다. 유신정권은 1975년 가요 규제 조치를 내렸고 암흑기는 지속되었다. 이 와중에도 이정선, 정태춘, 조동진 등은 묵묵히 포크음악을 계승했다. 

조용필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1980년대, 10대 청소년 세대가 대중음악 소비자로 등장한 1990년대에는 이전과 다른 음악이 나타났다. 사실상 새로운 시대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는 신세대 문화의 표상이었는데, 랩과 댄스에 열광한 10대 팬 문화가 나타나고 댄스를 기반으로 한  아이돌 그룹이 탄생했다. 2000년대에 대형기획사가 생겨나면서 대중음악 시장은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전 세계에서 ‘K-pop’에 열광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대중음악은 더 이상 사회의 변화나 정서를 노래하지 않게 됐다.  

 

  

 ‘월세가 늘고 전세가 위축되고 매매가 늘어나니 집을 사라.’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부동산 매매 정책을 펼치지만, 70년 전만 해도 주택은 물량이 모자라 어려움을 겪을 정도였다. 해방 이후 북이나 일본에서 귀국한 동포들이 1년 만에 400만여 명 늘어났다. 가진 것 없이 몰린 사람들은 서울 후암동과 이태원 일대에 판자촌을 만들었고, 이를 해방촌이라 불렀다. 간이주택은 주택난을 덜어주었지만 물량의 절대부족은 여전했다. 

아파트 시대가 시작된 건 1958년이다.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세워진 종암아파트(17평 규모 152가구) 준공식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테이프를 잘랐다. 대한주택공사가 1962년에 지은 마포아파트를 시작으로 대단지 아파트가 늘어났고, 1964년에 지은 마포2차아파트는 계단식 설계로 거실과 베란다를 도입했다. ‘아파트 공화국’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70년대에도 아파트는 지속적으로 지어졌다. 서울시영아파트도 2만 가구가 건설돼 주택난 해소를 거들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와우아파트가 붕괴되는 사고는 건설 의욕이 부른 참사로 오명을 남겼다. 세운상가아파트, 낙원상가아파트, 대왕상가아파트 같은 복합 건물도 생겼다. 비슷한 시기 시골에서는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지붕 개량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초가집, 굴피집, 너와집 같은 전통 지붕이 헐리고 시멘트가 올라섰다. 

물량이 늘어나자 아파트가 주거 공간이 아닌 투기의 수단으로 떠올랐다. 1970년 당시 서울 압구정동, 대치동, 반포동, 도곡동, 서초동 등 대단지 아파트가 건립되었고, 1층 정원, 복층 아파트가 도입됐다. 이때 지어진 동부이촌동 한강맨션, 여의도 시범아파트, 구반포 주공아파트, 압구정 현대아파트, 잠실지구 등은 지금까지도 부동산 시장을 이끄는 굵직한 아파트 단지로 알려져 있다. 한 평당 얼마나 올랐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분당을 비롯한 5개 신도시에 건설된 아파트 200만 가구는 1987년 69%에 불과하던 주택보급률을 1995년 86%까지 끌어올렸다. 점차 고층 아파트는 보편적인 주거 형태로 등장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아파트 문화에 ‘웰빙’ 바람이 불었다. 지상을 공원화하거나 피트니스를 갖추는 등 주상복합아파트 건립이 허용되면서 아파트가 고급화와 고층화 길로 치달았다. 래미안, e-편한세상, 아이파크, 자이, 푸르지오 등 아파트 브랜드가 이때 등장했다. 2002년 서울 도곡동의 ‘타워팰리스’는 아파트의 고층화와 고급화를 상징하며 주상복합아파트 시대를 열었다. 

주거 공간의 변화는 서민의 삶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사실상 주택의 아파트화, 아파트의 고층화는 되돌리기 어려운 추세다. 1971년 이화여대 이효재 교수가 발표한 논문 「한국인들이 아파트를 망설이는 이유」에서 “한국인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에 맞지 않다.”, “한 건물에 많은 가구가 거주하기 때문에 각 세대는 그들의 생활수준이 곧바로 이웃에 노출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는 분석은 모두 옛말이 됐다. 

 



현대 주거문화를 바꾸고 있는 주상복합아파트 ©한국학중앙연구원

  

 손 안에서 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한때 텔레비전은 ‘요술상자’였다. 1956년 5월 12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민영 방송이 전파를 탔지만 운영난에 이어 불의의 화재로 사옥이 전소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부는 1961년 KBS TV방송국을 설립했다. 이어서 1969년 TBC와 MBC TV가 개국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 TV는 부와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TV를 극장으로 여기면서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1973년 TV수상기 보급이 100만 대를 넘어서면서 TV는 국민 생활의 중심 미디어로 자리 잡았다. 그로부터 8년 후, 컬러 TV방송은 패션, 요리 방송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의식 변화를 촉발했다. 트랜지스터 TV를 거쳐 디지털 TV, 벽걸이 TV까지 성능은 무한히 진화해 왔다. 

그만한 변화는 전화기에서도 드러난다. 광복은 곧 통신주권의 회복을 의미했다. 자주적 통신기반 확립은 정부의 꿈이었다. 하지만 1955년 유선전화 가입자는 3만 9천명에 불과할 정도로 통신기술 확립이 쉽지 않았다. 당시 유선전화는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정도 돼야 가질 수 있는 물품이었다.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한 1962년, 전화 수요가 늘어났지만 공급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전화 회선을 사고팔거나 전·월세 놓듯이 임대해 주는 ‘전화상’이 성업하면서 사회문제의 주범이 되기도 했다. 1978년 전자식 교환기가 개발되면서 비로소 잠잠해졌다. 

1981년 한국전기통신공사는 전화 산업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다. 전국 시외 전자교환망 완성, 전국 전화 광역자동화는 전화 가입자를 증폭시켰다. 시·내외 겸용 공중전화기는 1977년에 선보였는데, 1982년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무선호출 서비스 ‘삐삐’를 등장시키면서 통신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첫해 235명이던 삐삐 가입자는 10년 만에 145만 2천명으로 늘어났다. 삐삐의 대중화가 공중전화 보급을 가속화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삐삐의 시대는 20년을 못갔다. 무선호출서비스가 시작된 지 2년 만에 국내 처음으로 카폰이 등장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에 맞추어 수도권과 부산에서 휴대전화 서비스를 개시했고, 1993년에는 전국 서비스에 이르렀다. 전화기가 너무 커서 보통 사람은 실생활에 쓰기 곤란했지만 말이다.

이동통신 기술이 발달하고 개인 휴대전화 사업자가 나타나면서 휴대전화 가입자는 매년 두세 배씩 증가했다. 1996년 318만 989명이던 가입자는 5년 만에 3천만 명에 이르렀고, 2014년 기준 5,720만 명을 기록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무선전화기가 대세가 됐다. ‘냉장고’처럼 큰 전화기의 안테나를 뽑고 통화하는 장면을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현재 휴대전화 이용자의 70%는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 ‘내 손 안에서’ 강의를 듣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쇼핑을 하는 일은 자연스러워진 반면 삐삐와 공중전화는 밀려났다. 이동통신 수단의 변화만큼은 광복 이래 상전벽해 수준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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