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불평등 (Inequality For All)> - 당신 눈 앞의 칼을 봐요
<모두를 위한 불평등 (Inequality For All) > - 당신 눈 앞의 칼을 봐요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기업들의 스폰인 ‘수퍼 팩’을 받지 않는 샌더스는 일반 시민 지지자들의 후원금으로만 캠프를 운영한다. 지난 1월에만 2천만 달러를 모았다. 1인당 평균 기부액이 30달러가 채 안된다고 하니 수백만 명의 기부자가 샌더스를 대통령으로 지지한 셈이다. 특히 청년층을 중심으로 샌더스에 대한 지지가 도드라진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란 말이 사멸하다시피 한 미국사회에서 수십년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이 나이든 정치인에게 미국의 젊은이들은 왜 열광하는가.
# 불평등 – 신자유주의의 종말 선고
<모두를 위한 불평등>은 클린턴 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라이시가 버클리에서 한 강의를 영화화 한 다큐멘터리다. 당시 강의의 제목은 ‘부와 빈곤’. 라이시는 미국사회의 불평등 구조에 대해 강조한다. 전후 생산 증대와 경기부양이 동시에 이뤄지던 시대를 지나 1970년대 이후 미국사회는 소득 불균형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1978년 미국 남성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4만 8천달러였고 소득 상위 1% 계층의 평균 임금은 39만 달러였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2010년, 미국 남성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3만 3천달러로 줄어든데 비해 소득 상위 1%의 소득은 두 배이상 증가해 110만 달러에 이른다. 오늘 미국 최상위 부자 400명의 부는 미국 전체 인구 절반의 재산 총량보다 많다. 사회 전체 부의 99%를 상위 1%의 수퍼 부자들이 독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시대상이다.
미국 전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관심을 모았던 파워 볼 복권의 당첨자는 당첨금을 받으면 일단 딸의 학자금 대출부터 상환하겠다고 말한다. 의료보험이 없이는 치솟는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는 미국 국민들은 아플 ‘자격’도 없다. 집이 없어 모텔이나 자동차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매카시즘의 시대를 겪으며 사회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던 미국 사회가 샌더스에 열광하는 건 이런 불평등 사회에 기인한다. 2008년 월가의 복잡한 금융공식을 무기로 이뤄진 대 국민 사기극이 탄로나며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월가 점령으로 이어졌고 월가 점령의 실패는 결국 ‘사회주의’의 기호를 호출했다.
사실 미국 뿐이 아니다. 영국에선 좌파인 코빈이 노동당의 당수로 당선됐다. 스페인의 포데모스, 그리스의 시리자 모두 좌파다. 마치 우리 모두를 부유하게 할 것처럼 떠받들여지던 신자유주의의 파산선고. 미국 공화당의 지지율 1위 후보 트럼프의 약진도 사실 별반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의 파탄을 원인으로 왼쪽에선 사회주의를 소환한 것처럼, 오른쪽에선 국가주의를 소환했을 따름. 일자리와 소득을 내놓으라는 요구는 똑같다.
‘생산수단의 공유’를 주장하지 않는 샌더스는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단지 미국 민주당에서 가장 왼쪽에 있는 정도의 스펙트럼이지만, 그 스스로 사회주의자로 포지셔닝하고 있는 것뿐이다.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더 이상 체제의 불만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증상이 바로 버니 샌더스와 파시스트 트럼프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
지난 해 인기를 끌었던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나 크루그먼이나 스티글리츠 같은 경제학자들. (피케티와 크루그먼이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미국을 비롯한 1세계 정치권의 변화가 지적하고 있는 모든 결론은 ‘신자유주의의 종말’이다.
# 한국
소득 불균형, 1%의 나라, 부익부 빈익빈의 사슬. 한국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재벌들이 곳같에 수백조의 사내 유보금을 쌓아놓을 동안 수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은 해고당했고, 서울 도심에선 일가족이 가난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한다. 고공농성이 일상처럼 이어지고 도심 곳곳에 다 세지도 못할만큼 농성천막이 세워져 있지만 정부는 더 쉽게 해고하고 더 적게 돈을 주는 법안을 만들었다.
샌더스 열풍을 호출한 월가 점령 시위.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촛불 시위가 이뤄졌지만 그 결과는 상이했다. 촛불은 결국 부가 편중된 세상을 뒤집어엎자가 아니라 먹거리와 반 이명박이라는 소박한 한국 중산층의 순응적인 욕망으로 수렴됐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해고된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냉정하게 발길을 돌리던 시위대, 컨테이너 산성 앞에서 예비군복을 입은 젊은 사람들이 산성을 점령하고 넘어가려던 사람들을 점잖게 제지하던 모습, 그 중산층들의 순응주의는 촛불을 월가 점령과는 상이한 모습으로 조물했다. 그 결과 촛불은 실패했고, 현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점점 더 반동의 세월.
미국에서 부는 샌더스 열풍의 여파로 한국에서도 ‘한국의 샌더스’를 자처하는 정치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첫주자가 ‘착한 부자’를 흉내내고 있는 철새 정치인 건 아이러니가 아니다. 촛불에서 드러난 한국 민중들의 그 순응주의와 어긋난 겨냥의 발로.
사실 샌더스와 시리자, 코빈 어떤 맥거핀에 불과하다. 극단에 달한 사회적 불평들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를 담지하는. 샌더스가 당선이 된다고 미국 사회가 사회주의 국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모든 불평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건 그저 민중들이 분노했음을 표현하는 단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건 불평등 지수로는 어디 내놔도 뒤질 것 같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맥거핀의 출현조차 요원하다는 점이다.
영화 속에서 라이시는 “이 문제를 한 방에 풀 수 있는 마법의 총알은 없다”고 말한다. 정치인 한 명 잘 뽑아서, 대통령 한 명 잘 뽑아서 사회 문제가 한 방에 해결되진 않는 다는 것이다. 그말인즉슨 대통령 한 명 때문에, 정치인들 몇 명, 정당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고작 그까짓 것 때문에 사회가 이렇게 어긋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분노의 방향’이다. 라이시는 다시 말한다. “정치는 저기 어디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고. 경제를 만들고 그 경제에서 살아가고 지탱하는 것은 정치인이나 1%의 부자들이 아니라 99%의 당신, 그리고 나다.
# 그래도 역사는 변혁의 편입니다
“시민권, 투표권, 환경보호법, 특히 환경보호법은 그 닉슨 정부 때 만들어졌어요 그 닉슨이 서명한 법이에요. 역사는 언제나 사회를 변혁하려는 이들의 편입니다.” – 영화 중
70년대 이후로 장장 30여년을 군림한 신자유주의에 균열이 발견되기 시작한 건 어쩌면 2011년의 월가 점령 시위였다. 더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던 미국의 청년들이 몰려들었던 그 날. 그 때쯤 한국에서도 촛불시위와 한미FTA 반대 시위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월가 점령운동도 촛불시위도 모두 실패했다. 한국에는 친기업 보수 정권이 들어섰고 노동자들은 계속 해고되고 죽어갔다. 미국은 도시빈민이 급증했고 의료보험과 교육비의 부담은 계층간의 격차를 실감하게 했다.
그러나 그 실패를 토대로 한 변화들. 대공황 시기 이후로 미국 민중들이 처음 경제를 입에 올렸던 그 날 이후 5년이 지나 거대 자본의 후원을 받지 않는 사회주의자 대선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의 주된 공약은 일반 의료보험과 교육비 문제 해결이다. 불평들의 씨앗을 자르겠다는 이야기. 그가 당선이 되더라도 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이제 자기의 바람이 무엇인지 직시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촛불은 실패했지만 노동운동이 거의 지리멸렬하게 끝난 지점에서 희망버스가 나왔다는 것, 비록 실패했지만 한미FTA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더 컸다는 것, 그건 한국 사회 주체 변화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여기에 바로 '희망'이 있겠다. 매우 작고 미미하지만, 거기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 과거엔 한진중공업의 85호 크레인에서 2명의 노동자가 죽었지만 해고 문제를 해결 못했다. 그러나 김진숙은 살아서 크레인을 내려왔다. 대추리에 군인들을 보내 원주민들을 포박했지만 지금 제주 강정에서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한다. 앞서서 정권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으로 모든 것을 수렴하려는 태도를 비판했지만 여기엔 이렇게 차이롸 주름이 존재한다. 들뢰즈는 영원회귀란 똑같은 사건이 영구적으로 재현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다. 무수히 반복되는 전복과 봉합, 그렇게 봉합을 뜯어내며 새롭고 작은 균열을 켜켜이 쌓아가는 것.
역사는 라이시의 말처럼 변혁의 편이다. 희망을 믿고 변주를 이해하는 것. 다만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직시해야 할 것은 우리의 욕망, 그리고 오늘 우리가 서있는 곳의 맨 얼굴이다.
다시 들뢰즈가 말하길 "욕망은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 욕망은 그 자체로, 저도 모르게,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바람으로써 혁명적이다. "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다. 정치인에게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바라는 욕망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 샌더스든 안철수든 상징따위야 그다음에 골라잡으면 될 일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삶에 가장 깊숙히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은 저 불평등의 경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