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의 키워드로 살펴본 ‘헬조선’ 청년들의 의식
5개의 키워드로 살펴본 ‘헬조선’ 청년들의 의식
청년들은 평등·연대·협력의 미래사회를 꿈꾼다
올 한 해 한국 사회를 달군 키워드는 단연 ‘헬조선’이다. 한국이 ‘지옥’같이 살기 힘든 사회라는 자조가 담긴 이 단어는 이 땅에 사는 청년의 상실감, 박탈감, 희망 없는 미래를 포착한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지난 2015년 8월 실시한 청년의식조사를 통해 이 시대 청년의 심층 의식을 들여다보았다. 청년 마음의 소리를 헬조선, 신 신분제, 공정성, 능력주의, 탈물질주의 등 5개의 키워드로 살펴보았다.
헬조선
헬조선을 키워드로 빅데이터 분석을 한 결과 ‘헬조선’과 함께 가장 많이 검색되는 단어는 ‘탈출’이었고, ‘헬조선’보다 많이 쓰이는 말은 ‘노오력’이었다. 경향신문(2015년 9월 4일자)에서 보도된 이같은 결과는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 불가능한 사회가 됐다는 씁쓸한 진실을 담고 있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가 전국 1000명을 대상으로 2015년 11월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대는 다른 연령층에 견줘 자신의 삶에 대한 주관적 행복감도 낮았다. “현재 얼마나 행복하다고 느끼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20대의 평균 점수는 10점 만점에 6.24점으로 50대(6.22점)와 비슷하게 가장 낮았다.
같은 기관이 2015년 8월 실시한 청년의식조사에서는 더 신랄한 현실이 드러난다. 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주거 등 5개 항목에서 청년들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질문해 ‘청년활력지수’를 산출한 결과 100점 만점에 46점으로 나타났다. 동일한 항목에 대해 10년 후 기대감으로 바꿔 질문한 결과 51.3점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를 통해 나타난 인간 의식의 체계적 편향 중 하나는 과거보다는 현재를, 현재보다는 미래를 낙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래 청년활력지수가 현재와 거의 차이가 없이 매우 낮다는 사실은 청년세대가 나아갈 방향이나 동력을 상실해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청년이 이끌어갈 미래에 대한 매우 위험한 징후다.
신 신분제
몇 달 전 여야의 국회의원 두 명의 자녀가 취업에 특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현대판 음서제라는 비판이 들끓었다. 분노는 당사자인 청년세대를 넘어 돈 없고 백 없어 자식의 취업에 아무 보탬도 될 수 없는 부모세대까지 광범위하게 일었다. 부모의 자산에 따라 출발선도 달라지고 삶의 기회도 차이가 나는 ‘세습자본주의’, ‘신(新) 신분제’의 징후들은 이곳저곳에서 선연하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의 청년의식조사에 의하면 물려받을 자산이 있는 중상층 이상 청년층은 무려 78.5%가 그들의 미래가 ‘희망이 있다’고 낙관에 차 있는 반면, 중간층(67.9%), 중하층(55.3%)으로 가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빈곤층에서는 ‘희망이 없다’(52.2%)는 절망 쪽으로 기운다. 20대에게 한국 사회가 똑같이 잿빛은 아닌 것이다. 빈곤 청년들은 가난하기에 저임금의 열악한 일자리라도 찾아 나설 수밖에 없고, 좋은 일자리를 위해 필요한 ‘스펙’을 쌓을 시간도 여력도 없다. 이렇게 빈곤은 지속되고 악화된다.
청년들의 자신감을 의미하는 ‘청년활력지수’도 부모의 경제적 지위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중상층 이상의 부모를 둔 청년은 54점(100점 만점)이었으나 중간층(48.8점), 중하층(43.1점)으로 하락하고 빈곤층에 이르면 38.9점에 불과했다. 최근 세대갈등론은 청년착취론까지 강도를 높여왔다. 이는 부자 기성세대가 가난한 청년세대를 착취한다는 이미지를 유포하면서 신신분제사회라는 끔찍한 현실을 은폐한다.
공정성
부모의 자산이나 지위에 의해 자식의 계급이 결정되는 신 신분제 사회에서 공정한 룰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청년들이 바라본 한국 사회 공정성은 100점 만점에 20.6점으로 거의 바닥 수준이었다. 청년들의 86.1%는 우리 사회가 노력에 따른 공정한 대가가 제공되지 않는 사회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72.7%는 사회적 성취에서 나의 노력보다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더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공정성 지수는 이 두 항목을 합산해 산출했다.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중상층 이상인 경우엔 공정성 지수가 26.4점이었는데, 중간층(23.6점), 중하층(16.5점), 빈곤층(18.6점)으로 가면서 뚝뚝 떨어졌다.
지금 청년세대의 대학진학률은 80% 수준으로 어느 때보다 학력격차가 적다. 다들 배울 만큼 배우고 준비할 만큼 준비했다는 의미다. 이에 따른 결과도 공정할 것을 요구한다. 공정성에 대한 민감도가 크다는 의미다. 청년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공정성과 정의의 상실은 우리 사회 미래의 뇌관으로 작용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 청년전략스페이스 대학생 기획단이 ‘청년, 살려야 한다’ 주제로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시민에게 최고의 금수저를 뽑아달라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능력주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의 청년의식 조사에서 청년들 중 ‘우리 사회는 한번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있다’에 동의하는 비율은 34.9%에 불과했다. ‘열심히 일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에는 불과 22.7%만이 동의했을 뿐이다. 이 두 가지 항목을 합쳐 패자부활지수를 산출한 결과 28.8점(100점 만점)이었다.
희망의 사다리가 무너진 사회의 미래는 암울하다. ‘다이내믹 코리아’로 상징되는 정치사회적 역동성은 우리 사회를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그 역동성은 자신의 노력에 따라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다’는 능력주의 신화에 의해 가능했다. 하지만 부모의 자산에 따라 청년들의 삶이 결정되면 이 능력주의 원리는 붕괴한다.
천년제국 로마에서는 자영농이 국가를 시민이자 병사로서 떠받쳤다. 피정복민에게도 로마 시민권이 부여됐다. 로마의 지배층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인재들이 들어찼다. 로마가 천 년을 간 원동력이었던 이 시스템이 무너지자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몽고 제국은 연고가 아닌 실력에 따라 다수 농민과 서민 등 하층 대중에게도 기회가 열린 사회였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조선 건국의 주도자들 또한 귀족의 과두제를 혁파하고 농지를 분배하고, 평민에게 과거급제의 길을 열었다. 조선이 오백 년을 간 힘이었다. 그러나 세도정치가 횡행하자 망국을 피할 수 없었다. 노력해 봐야 올라갈 희망의 사다리가 끊긴 사회에서는 굳이 노력할 이유가 없다. 이런 사회는 망조가 가득하다.
탈물질주의
청년세대의 현실을 보여주는 지표들은 대체로 암울하지만 사회참여역량지표로 가면 작은 희망이 비친다. 청년의식조사에서 ‘평소 정치 및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지’ 여부와 ‘투표 등의 참여가 정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정치가 바뀌면 나의 삶도 달라질 것이다’에 동의하는지를 묶어 청년들의 ‘사회참여역량지수’를 산출했는데, 결과는 64.3점으로 나타났다. 청년들이 참여를 통해 현재의 절망적 상황을 바꿔낼 준비를 어느 정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청년들이 이루고 싶은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청년들은 경쟁과 자율보다는 연대와 협력, 경제적 성취보다는 삶의 질, 그리고 위험에 대해서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을 지는 사회를 원했다. 이는 대체로 진보적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가치들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부모의 경제적 지위에 따라 청년이 지향하는 사회의 모습도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대체로 부모가 부자일수록 보수적 사회를, 부모가 가난할수록 진보적 사회를 원했다는 것이다. 기성 세대의 경우 오히려 가난할수록 보수적이라는 기존의 통념에 벗어나는 결과다.
조사는 청년들이 분배가 더 잘 되고 평등하며 연대와 협력에 기반을 둔 미래사회를 꿈꾼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성장과 경쟁력 강화 방향으로 달려온 우리 사회가 전면적으로 방향을 전환할 필요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은 물질주의 성향이 가장 강한 국가지만 젊은 세대로 갈수록 가치관이 ‘탈물질주의’, ‘분배지향’ 등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우리 사회 미래의 작은 희망의 불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