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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민주주의에 무감한 청년세대

민주주의는 ‘의도적으로’ 교육되어야 한다

글 오찬호 사회학 박사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진격의 대학교』 저자 
 och7896@hanmail.net

 


✽ 오찬호 박사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표지.

 

그 날, 민주주의가 참혹하게 패배하였음을 경험하다

나는 ‘청년들의 삶이 앞으로 더 암울해질 것’이라고 단언한 대중적 사회과학서 두 권을 집필했다. 자본주의를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순응적 정서가 개인의 일상을 얼마나 괴기스럽게 만드는지에–주로 민주주의적 가치가 파괴되는 형태로 드러남–관한 일종의 시리즈 성격의 책이다. 그냥 학술적 논문으로 남겨 나 혼자만 알고 있어도 충분한 것을 굳이 시간을 들여–그만큼의 보상도 없음에도–책의 형태로 세상에 드러낸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그 날’의 충격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날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기에 앞서 내가 평소에 ‘민주주의’를 어떤 가치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밝혀야 하겠다. 내게 민주주의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당연한 소리 같지만 한국에서 민주주의적 가치는 경제성장의 패러다임과 ‘함께’ 논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쪽의 시각만 반영하지 마라’는 반론에 움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굳은 각오가 필요하다.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온 궤적은 이 민주주의적 가치에 보다 많은 사람이 포함되어 가는 투쟁의 역사였다. 이 숭고한 역사가 경우에 따라 ‘달리 생각해볼 만한’ 그런 성질이겠는가? 그래서 나는 민주주의 가치가 훼손되는 일들이 발생하면 굉장히 흥분한다. 어떤 경우에 분노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은 지극히 교육적이라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걱정스럽게도 최근 몇 년간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그런 일들이 여러 있었다. 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강의 주제로 끌고 와 ‘왜 우리가 아파해야 하는지’를 강조하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들은 차갑게 반응했다. 그리고 매년 이 차가움의 강도는 더해졌다. ‘그 날’, 이유를 물어보았다. 답은 명쾌했다. “말씀해 주시는 사례들이 민주주의적 가치가 퇴행되었다는 것은 분명하고 이견도 없습니다. 그런데요, 알겠는데요, 별 느낌이 없어요.” 


✽ 취업시즌을 앞두고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 한 토익학원에서 수강생들이 휴일도 반납한 채 취업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느낌이 없다’를 학생들은 이렇게 표현한다.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어떤 현상이 머릿속에 인지되어도 ‘심장을 송곳으로 찌르는 그런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지난주에 치른 토익시험의 성적이 목표치를 넘기지 못했을 때 느꼈던 그런 울분이 없다. 수능시험 점수가 모의고사 점수보다 떨어졌을 때가 훨씬 더 억울했다. ‘3kg 살이 찐 것’을 알았을 때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오는 공포감을 느끼지만 ‘민주주의가 훼손되었다’는 것은 그냥 건조한 사건일 뿐이다. 청년들은 그 이유에 대해서도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단 한번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들어본 적이 없는데 당연한 것 아닌가. 지금껏 민주주의적 관심 표출에 대해서는 “쓸데없는 관심 끄고 공부나 해”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자신이 겪는 비민주적 대우도 늘 ‘참아야 하는 것’에 불과했다. 개선하겠다고 하면 부모님이 제일 먼저 말렸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수결’ 반장선거 외에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이는 청년들에게 민주주의가 이론으로 학습되는 가치일 뿐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있으면 좋은 거’지만 그것이 없다고 무슨 청천벽력이 아니다. ‘그 날’ 내가 경험한 청년들의 현실은 이토록 무서웠다. 민주주의의 완전한 패배라고 해야 할까? 나는 뒤돌아볼 것도 없이 이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자본주의를 강조할수록 민주주의의 입지는 좁아진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언제 이 사회가 민주주의를 ‘잘’ 가르쳐 준 적이 있는가. 오히려 일상적인 지점에서 과거에 비해 ‘민주화’된 것은 수도 없이 많다. 체벌도 사라지고 있고 두발 제한이라는 비민주적 교칙들도 철퇴를 맞고 있다. 부모들도 더 이상 예전 같은 가부장적인 사고에 근거해서 자녀들을 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민주주의는 청년들에게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을까? 아무도 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폄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쪽에서 지나치게 ‘어떤 것’을 강조하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난다. 이 지점이 과거와 달라진 청년세대만의 특징이다. 이들은 ‘경쟁완전체’다. 일생이 끝없는 경쟁이다. 자본주의가 원래 그런 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들은 원래보다 ‘더블 플러스’로 고통스럽다. 유아 때부터 사교육을 받고 취업을 위해 ‘9종 세트’(학벌, 학점, 영어점수, 어학연수, 공모전, 자격증, 봉사활동, 인턴, 그리고 마지막은 충격적이게도 성형수술)를 준비해야 하는 황당한 사회를 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사회를 탈출하지 못하는 이상 정신적 무장이라도 해야 한다. ‘왜 이렇게 경쟁해야 하는가?’라는 대안 없는 비판보다는 ‘어차피 경쟁은 피할 수 없다’는 수긍이 차라리 속 편하다.

이 ‘주술’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자본주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된다. 이와 비례하여 민주주의는 그 의미가 퇴색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일종의 공생 관계다. 특히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적시하기 위한 근거로서 굉장히 유용하다. 그런데 ‘태초에 자본주의가 있었다’는 식의 이해가 증가하면 민주주의를 적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의’, ‘연대’의 개념 등이 ‘비용 절감, 이윤 증가’라는 마법의 프레임에서 ‘별다른 효용이 없는 것’으로 해석되어 버린다. 민주주의는 “그래서 그게 돈이라도 돼?”라는 질문 앞에서 극도로 무기력해진다.

‘자본주의는 어쩔 수 없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자본주의는 더 포악스러워졌다. 경쟁을 통해 순위를 매겨 보상을 차등적으로 하는 원칙은 변함이 없지만, 해고가 자유로워지고 비정규직이 많아지면서 낮은 등수가 경험하는 고충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능력주의를 적용하기에 앞서 전제되어야 할 결과의 평등이 무너진 것이다. 결과의 평등은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 자라도 ‘인간다움이 보장되는 삶’을 유지하기 위한 보상을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사각의 링에서 시합을 해서 상대에게 KO로 졌다고 하더라도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개런티를 지급받는 것이 바로 결과의 평등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가치를 별다른 의심 없이 맹목적으로 수용하다보면 이 결과의 평등이 어색해진다. 내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주목한 청년 세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들은 결과의 평등을 보장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것을 보고 “노력도 하지 않고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라고 반응한다. 이른바 ‘차별에 찬성하는 세대’의 등장이다.


✽ 청주 청년회 회원들이 청년실업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차별에 찬성하는 세대는 왜 사회적 문제여야 하는가?

모든 청년들이 이렇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차별에 찬성하는 ‘세대’라고 호명하려는 이유는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그래서 민주주의를 부차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한 집단이 앞으로 증가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구조가 그렇게 세팅되어 있다. 특히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만을 양성하겠다면서 ‘취업사관학교’로 변모했고 이 과정에서 사회를 비판하는 학문들은 ‘취업률이 낮다’는 이유로 철퇴를 맞았다. 당연히 청년들은 대학 생활을 하면서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전문적 교육을 받을 수 없다. 반대로 자본주의의 실용적 가치에는 필요 이상으로 노출된다. 그래서 현재는 ‘일부’라 할지라도 앞으로 그 일부는 증가하여 ‘차별에 찬성하는 세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더 걱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과거와 달라진 청년세대의 지형을 사회 전체 차원에서 논의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자. 사회학에서는 세대를 논할 때, ‘경험의 성층화’ 개념을 중요시 여긴다. 이는 특정 세대가 경험하는 것들이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형성된 틀 위에 성층적으로 축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전쟁 이후 모든 세상만사를 언제나 반공이라는 틀 위에서 판단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이는 지금의 청년세대가 앞으로 어떤 경험을 한다고 한들, 자본주의를 과잉신뢰하고 민주주의를 과소평가하는 생각의 틀 위에서 해석을 할 가능성이 큼을 의미한다. ‘차별에 찬성하는 세대’가 앞으로도 자신의 정체성을 견고히 해 나간다는 것은 당연히 사회 구성원 모두의 문제다. 민주주의 개념을 적용해야 하는 곳마다 효율성이라는 저울을 사용할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 된다고 상상해보라. 회사의 동료들, 관공서에서 만나는 공무원들, 교사들, 경비원이 되신 누군가의 아버지가 상대할 아파트 입주민들, 누군가의 자녀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나게 될 편의점 점장들이 “차별은 어쩔 수 없지. 자본주의가 다 그런 거지.”라는 말만 한다고 생각해보자. 끔찍하지 않은가.

청년세대를 걱정한다면 해결책을 고민해야 함이 마땅하다. 특정 연령대가 보여주는 걱정스러운 특징이 일부의 수준을 넘어 세대의 개념을 적용시켜야 하는 상황까지 왔을 때는 걱정의 폭을 넓혀야 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과잉교육이 현재 현상의 원인이라면 해결책인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 역시 지나칠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분위기에 노출된 개인은 그래도 자본주의의 폭력성에 맞설 수 있고, 맞서야지만 폭력의 강도는 줄어든다. 민주주의가 권력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등장하는 ‘청년들을 위한 고민들’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청년들이 겪는 현실이 어쩔 수 없잖아’의 논리를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현실의 무게감을 경감시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그저 ‘좋은 것’ 정도로 교육시켜서는 안 된다. ‘시험에 안 나오잖아’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정도로 제도적 권력을 보장해 주어야 하고 민주주의를 외면하다가는 ‘오줌을 찔끔 쌀 수 있다’라는 걸 사회 구성원 전체가 각인해야 한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교육되어야만 민주주의는 다른 것과 타협하지 않는 가치가 된다. 이와 비례하여 청년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그래도 살 만한 정글이 되지 않겠는가.


 * 위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관지 '『민주누리』 제4호' 에 실린 글입니다.   --> 민주누리 전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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