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민주주의] 청년을 만나다
글 성지훈 참세상 기자 acesjh@gmail.com
나라고 못할 게 뭐야
“고등학교 다니던 내내 꿈이 ‘대학생’이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고 전교 1등을 놓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정작 대학생이 됐는데 너무 허무했어요. 마치 스무 살에 사춘기가 온 것 같았어요.”
‘꿈’은 희망직업과는 다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꿈은 ‘뭘 해서 먹고살 거냐’를 묻는 말이 됐다. 명문 대학을 나와서 연봉 높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청소년들의 꿈이 된지 벌써 한참이나 지났다. 구효정(22) 소셜벤처 ‘담넘어’ 대표는 대학생이 되는 것을 꿈이라고 여겼지만 정작 대학생이 되자 허무함에 빠졌다. 그녀는 도대체 자신의 꿈이 무언지 스스로 되묻기 시작했다.
★ 개꿈 콘서트, 나라고 왜 못해
“대학에서 ‘시민교육’ 강좌를 들었어요. 사회적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작은 실천이라도 해보는 게 과제인 수업이었는데, 저처럼 허무하게 방황하는 친구들이 많을 것 같았죠.”
다행히 그녀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준 친구들이 의견에 동조해줬다. ‘개꿈 콘서트’의 시작이었다.
“개꿈 콘서트는 사실 별 거 없어요. 그냥 또래 친구들이 나와서 자기 꿈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꿈을 이룬 것도 아니고 거창한 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자기 얘기를 하고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다음번엔 자기가 직접 연사가 돼서 또 자기 얘기를 하고. 그렇게 꿈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기의 꿈을 자기가 알아가는 거죠.”
수업의 과제로 시작했던 개꿈 콘서트가 사업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첫 번째 콘서트에 찾아왔던 한 청소년의 문자 덕분이었다.
“자살을 기도했던 친구였는데 우연히 첫 번째 개꿈 콘서트에 왔어요. 나중에 장문의 문자가 왔는데, 감동했다거나 고맙다는 내용이 아니었어요. 무대에 올라서 말하는 연사들이나 그걸 듣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라 너무 우스웠다는 거였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라고 왜 못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힘이 났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자기 동네에서도 이런 콘서트를 열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했거든요. 그 때 창업을 결심했어요.”
★ 가장 많이 위로받고 배우는 건 나
창업을 시작하고 중소기업진흥청의 지원금도 받아냈지만 사업은 실수투성이었다. 2013년에 창업해 만 2년을 넘겼지만 수익이 생긴 건 올 여름이 처음이었다. 수익모델을 만들고 손익을 계산하는 경영의 문제에서는 심각하게 무지했다. 행사를 준비하는 데에도 미숙함이 많았다. 일과 개인생활의 경계가 무너져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다.
“작년에 대형 콘서트를 준비하는데 매일 밤을 샜거든요. 어느 순간 ‘담넘어’는 있는데 구효정은 없어진 느낌이 들었어요. 균형이 깨진 상태가 됐죠. 나라는 사람과 나를 둘러싼 관계와 일이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서 진행될 때 행복할 수 있구나 하는 점을 배웠어요.”
★ 넘지 않아도 좋으니 담을 봐요
사실 꿈 타령을 하기엔 한국의 현실은 너무 각박하다. 학벌의 벽은 높고 그 밑에 뚫린 입시의 터널은 너무 어둡고 험하다. 이런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꿈을 꾸라고 할 수 있을까.
“입시든, 학벌이든, 경제 상황이든 자기 꿈을 가로막고 있는, 혹은 꿈이 무언지 알 수도 없게 만드는 것을 저희는 담이라고 불러요. 그 담을 넘자는 것이 저희 회사 이름의 의미지만 당장 담을 넘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앞을 가로막고 있는 담의 정체는 알았으면 좋겠어요.”
불확실한 미래가 불안하지 않냐고 묻자 구 대표는 “미래가 불확실해서 더 좋다.”고 대답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설레는 일”이라고.
지금 필요한 건 ‘삶의 정치’입니다
“동네에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들고 그 친구들이 공동체를 이뤄 함께 고민하는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 그게 사실 가장 정치적인 행위죠, 이를테면 ‘삶의 정치’입니다.”
청소년 정치참여 운동, 청와대 경호부대 장교, 잘나가는 석유회사 직원, 야당의 청년 비례대표 경선 후보까지. 이색적인 이력을 쌓아온 신정현 씨(35)는 돌고 돌아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그가 어릴 적부터 품었던 ‘조금 더 좋은 세상’에 대한 꿈은 삭막했던 회사 생활과 치열했던 현실정치의 세계를 지나는 동안 소박해진 만큼 정교해졌고 삶에 가까워진 만큼 단단해졌다.
★ ‘정치’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청소년
신정현 씨는 청소년 시절부터 ‘더 좋은 세상’을 꿈꿨다. 청소년 신정현이 생각한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정치’였다. 청소년들의 의견을 현실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청소년 정치참여 네트워크’같은 단체를 만들어 청소년 정치참여 운동에 앞장섰다.
청소년 정치참여 운동으로 많은 성과를 냈지만 군 입대와 어려워진 가정환경은 꿈을 잊게 만들었다. 이어진 회사 생활은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으로만 세상을 이해하는 삶을 강요했다.
“전에는 어떻게 세상을 바꿀까를 고민하는 삶이었는데, 직장을 다니면서부터는 ‘어떻게 돈을 벌까’로 질문이 바뀌었어요. 돈을 버는 일에 집중했더니 진급도 동기들보다 빨랐죠.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어요.”
신정현 씨가 ‘공허함’을 느껴가고 있을 즈음 대학시절 은사가 연락을 해왔다. 은사는 민주통합당의 청년비례대표 국회의원 도전을 권유했고 신정현 씨는 ‘더 좋은 세상’이라는 꿈을 상기했다. 결국 청년비례대표에는 떨어졌지만 식었던 가슴이 다시 뜨거워지기엔 충분했다.
신정현 씨가 사표를 내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제주도 강정마을이었다. 전국 각지의 투쟁 현장을 여행하며 앞으로의 삶을 계획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여행지인 강정에서 발목이 잡혔다.
“제주에 도착한 날 구럼비에서 발파를 시작했어요. 그렇게 도착하자마자 싸움의 한가운데에 들어갔죠. 여행을 하며 보는 것이 아니라, 아픔의 현장에 머물면서 같이 아파해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 내 삶을 바꾸는 것이 ‘정치’
이후 1년이 넘게 강정과 서울을 오가며 신정현 씨는 강정의 싸움을 자기의 삶으로 받아들여갔고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삶을 바꿔나가는 것이 곧 정치의 본질임을 배웠다.
“자신이 사는 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게 정치더라고요. 마을에서 우리가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그걸 바꾸기 위한 고민과 작은 실천을 이어가야지만 조금씩 바뀔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제가 살던 동네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시작했죠.”
여의도와 강정을 거쳐 ‘우리 동네’ 고양시로 돌아온 신정현 씨는 또래의 동네 친구들을 모았고 그 친구들과 사람의 이야기를 빌려주는 사람도서관, ‘리드미’ 활동을 시작했다. 어느 ‘금배지’들도 신경써주지 않았던 자기들의 삶을 스스로 일궈가는 일. 동네에서 삶의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이 친구들은 ‘정치’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껴요.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 사실은 정치라고 생각해요.”
신정현 씨는 자신을 소개할 때 ‘백수’라고 말한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고정수입도, 매일매일 출근해야 하는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 백수나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란 ‘백수’도 할 수 있는 것, 동네 친구들과 함께 던지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하는 사소한 질문이 우리의 삶을 바꾸는 정치라는 것이다.
인류 보편의 가치 ‘인권’, 북한에서도 꽃피워야
북한과 인권, 통일 같은 말들은 어느새 청년층에게 고루한 말로 인식되고 있다. 반공을 국시로 삼던 시절부터 최근의 정당해산 심판까지 북한의 인권 문제는 세계적 관심사였으나, 정작 대한민국에선 북한의 인권 문제를 말하기 어려웠다. 북한과 관련된 일들은 너무 정치적이었거나 너무 위험했다.
★ 청년들이 인권 활동에 관심이 없다는 건 편견
“작년에 오준 유엔 대사가 안보리에서 했던 연설이 젊은 층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남북 이산가족 문제를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 빗대 감동을 줬습니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 젊은 청년들이 무관심하거나 지지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사례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인식이 과거에 비해서 현재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더 알려 나간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지지와 관심을 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북한인권학생연대의 문동희(32) 대표는 오늘날의 청년들이 다양한 분야에 고른 관심을 두고 있을 뿐 인권 문제 등 사회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라고 진단했다.
“과거의 대학생들은 민주화라는 거대한 담론 밑에 하나로 모여 있어 상당히 관심이 있는 것을 서로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생들은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그 숫자가 적어 보이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청년들의 사회참여와 관심이 줄어들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도 문 대표는 북한 인권에 관해서는 “청년들의 주된 관심사에 속하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그 지점이 문 대표가 생각하는 북한인권학생연대의 주된 활동 목표다. 북한인권학생연대는 2003년에 생긴 단체로, 문 대표는 대학에서 북한 인권 관련 동아리를 하다가 2011년부터 지금까지 대표직을 맡고 있다.
“북한인권학생연대는 대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을 만한 프로그램 개발을 지속해 추진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실험적으로 기부, 나눔, 봉사와 북한 인권을 결합한 통일 유니워크를 진행하여 수백 명의 대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Insight of North Korea : 북한을 바라보는 네 가지 시선’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대학생들이 북한 인권에 대해서 흥미를 가질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 인권은 정치적으로 판단할 수 없어
전쟁과 분단, 여전히 이어지는 반목과 오해는 북한 인권 문제를 인권이 아닌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현실정치는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하거나 과장한다. 하지만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판단할 수 없기에 인권이다.
“북한 인권 개선 활동은 역시 인류 보편적 가치를 해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북한 인권 문제를 상당히 정치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남북관계를 많이 신경 쓰고 있습니다. 특히 정치인들이 남북관계를 핑계로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꺼려했었습니다.”
문동희 대표는 북한 인권 개선 활동을 하며 가장 힘든 것도 ‘정치적 시선’이라고 말했다. 사회 전반이 ‘북한’이나 ‘인권’ 같은 말이 나오면 정치적 활동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문 대표는 이 같은 편견에서 탈피하는 것이 북한 인권 개선 활동의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북한 인권 개선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순수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정치에도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정치적 프레임으로 바라보지 말고 순수한 북한 인권 개선 활동으로 바라봐주기를 바랍니다.”
‘헬조선’을 ‘헬로우 한국’으로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중심가에는 포장마차가 있다. 그 포장마차에선 익숙한 냄새가 난다. 한국인 유학생 김희욱(30) 씨가 파는 ‘호떡’이다.
“처음에는 북한과 남한도 구분하지 못하는 덴마크에 한국의 식문화를 알려보겠다는 의도로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소외계층과 불우한 이웃들에게 먹거리를 전달하는 봉사와 함께 한국문화를 알리는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 코펜하겐의 호떡 장수
김희욱 씨의 호떡 가게는 ‘행복 배달 포차’로 불린다. 자신도 행복 배달원을 자처한다. 호떡을 팔아 남긴 수익금은 덴마크의 노숙인이나 마약중독자 같은 사회적 소외계층들을 돕는데 쓰인다. 물가가 비싼 덴마크의 다른 군것질거리에 비해 저렴한 호떡을 찾는 손님도 늘어나고 있고 ‘행복 배달’이라는 김 씨의 프로젝트를 아는 사람들은 더 많은 호떡 값을 내놓기도 해 행복 배달원의 역할이 점점 더 늘어나는 중이다.
“지금은 작은 호떡에 불과하지만 다양한 경로를 통해 좁게는 한국과 덴마크, 넓게는 북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민간 외교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그는, 덴마크의 행복을 한국에 전하고 덴마크에는 한국의 ‘정’을 전하는 ‘Fire K’라는 프로젝트도 하고 있다고 전했다.
★ 행복의 실체
“행복함은 ‘신뢰’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서로에 대한 신뢰, 사회에 대한 신뢰,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가 행복의 조건이겠죠.”
행복지수 최상위권의 나라에서 호떡을 파는 ‘헬조선’ 출신의 청년은 복지 혜택이나 문화 수준이 아니라 ‘신뢰’를 말했다. “헬조선에서 탈출하기 위한 방법은 이민이 아니라 서로 신뢰를 회복하고 유대를 쌓는 것”이라고.
“이곳에서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큰 두 가지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신뢰입니다. 경쟁을 통해 우열을 가리기보다는 협동을 통해 대화하는 공동체로 발전하면서 사람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그 결과 타인을 존중하고 또 타인에게 존중받을 것을 신뢰하는 가치관이 형성됩니다.”
김 씨는 ‘한국을 떠나 북유럽으로 오고 싶다’는 문의도 많이 받는다고 한다. 헬조선이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사람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민이야 개인의 자유지만 이곳으로 도피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물가도 비싸고 이민자가 살아가기도 쉽지 않거든요. 오히려 ‘헬조선’을 행복한 한국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지요.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서로 존중하고 사회의 불합리한 현실을 이야기하며 바꿔 가면 ‘헬조선’을 넘어 ‘헬로우 한국’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선택도 연습이 필요하다
“저기 봐요, 지금 이 시간에도 불이 다 켜져 있잖아요. 징그럽지 않아요?”
인터뷰를 위해 이도훈 씨(30)를 만난 건 늦은 밤이었다. 을지로 부근을 지나던 이도훈 씨가 한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2012년까지 다니던 직장 건물이라고 했다. 거대한 고층빌딩에는 드문드문 불 꺼진 창이 보였다. 드문드문 불이 켜진 게 아니라.
★ 부품으로 살고 싶지 않았어요
“눈앞의 내 미래가 너무 명백하게 보였어요. 같은 복장을 하고 같은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 안에 빽빽했는데, 그들 중 어느 한 사람도 행복해 보이지 않고 모두가 무기력했어요. 계속 여기에 있다가 내가 당할 일들이, 내가 할 일들이 두려워졌어요.”
이도훈 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번듯한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그는 ‘부품’이 된 것 같았다고 했다. 늦은 시간까지 일하며 자기 생활을 포기해도 시간이 되면 회사 밖으로 잘려나가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부품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고 떨어져 나간 부품의 자리는 또 다른 부품이 채웠다.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로 여행을 떠났어요. 거기에 나 같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어요. 뭔가 갑갑했고 그래서 일단 밖으로 뛰쳐나온 젊은 청년들이 잔뜩이었죠. 여행을 하면서 온전한 나 자신으로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이 많다는 걸 알았어요.”
이도훈 씨는 ‘상상끼리’라는 사회적기업에서 청소년 교육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가장 핵심 내용은 청소년들의 여행을 기획하는 일이다. 이도훈 씨는 개인이 변화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계기를 여행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개인의 축적이 곧 세상의 변화를 이끈다고 믿는다.
“여행은 반드시 제한된 자원과 정보를 기반으로 발생합니다. 그 안에서 매순간 선택을 하게 되고 그 선택에 대한 결과가 즉시 나오죠.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책임져야 그 다음이 진행돼요. 쉽게 말하면 선택하는 연습을 단시간에 가장 많이 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 여행을 통해 가르치고, 또 배웁니다
이도훈 씨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여행을 통해서 청소년들이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청소년들뿐 아니라 함께 여행하는 어른들도 바뀔 수 있다고.
“여행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된 건 대안학교 아이들과 함께 처음으로 자전거 여행을 한 것이 가장 큰 계기였어요. 더 매력적인 건 아이들의 성장은 함께하는 어른들의 성장에도 강한 영향을 끼친다는 거예요. 아이들과 첫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오히려 내가 더 많이 성장한 것 같아 뿌듯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할 정도였거든요.”
청소년들은 여행을 떠나며 교통편을 비롯해 숙박, 일정, 프로그램을 모두 선택한다. 집과 학교만을 오가며 지하철도 한 방향으로만 타 본 청소년들은 수시로 난관에 부딪힌다. 그러나 그 난관에서 자기가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에 책임을 지면서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한 것들을 배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삶에서 선택을 해야 할 순간에 정작 본인이 결정을 해본 경험이 별로 없다는 거예요. 여행이라는 수단을 활용해서 선택하는 연습을 하게 해주고 싶어요.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게 하는 연습에는 여행만 한 것이 없죠.”
여행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청소년들이 이도훈 씨에게 꾸준히 연락을 하고 상담을 요청해 오는 것도 그래서일것이다. 학교 선생님, 부모님에게는 털어놓지 못할 고민거리를 들고 전화를 걸어 온 청소년에게 이도훈 씨는 매우 친절하게 답을 해준다. “네가 잘 고민해서 결정해. 네 인생이고 네 선택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