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뤼다오 정치범수용소, 비슷하면서도 다른….
타이완 뤼다오 정치범수용소, 비슷하면서도 다른….
글. 사진 권기봉(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우리나라와 싱가포르, 그리고 홍콩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 불리는 타이완의 근현대사는 사실 우리와 비슷한 면이 적지 않다. 타이완은 우리보다 약 15년 먼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대륙 중국과는 분단된 상태에 있다. 해방 뒤엔 '반공'과 '백색테러'로 대표되는 독재정권의 폭력적인 통치를 감내해야 했으며, 또 끝내 그것을 극복하고 민주화를 이뤄내기도 했다. 그리고 엎치락뒤치락 정권교체가 이뤄지기도 했으며 좀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 나가고 있다.
타이완 남동부의 대도시 타이동에서 태평양 쪽으로 3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뤼다오까지 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한국에서 타이페이로 이동한 뒤 국내선으로 갈아타 타이동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작은 경비행기로 환승해 가는 방법이다. 비용이 많이 들긴 하지만 가장 빠른 길이다. 교통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타이페이에서 타이동까지 기차로 이동한 뒤 북쪽 외곽에 위치한 작은 어항 후캉까지 차량으로 이동해 페리로 갈아타면 된다. 다만 시간이 많이 걸려 단기 방문객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여하튼 현지에서도 온천 휴양이나 스쿠버다이빙 그리고 역사탐방 등의 목적으로 뤼다오를 방문하는 이가 많기에 정보 구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편이다.
다만 내가 직접 경험한 뤼다오의 모습은 그 이름이 뜻하는 푸르름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초록의 수풀로 우거지기는 했으나 태생이 화산 폭발로 생겨난 섬이다 보니 대지는 검거나 붉었다. 실제로 이 섬의 원래 이름은 불타는 섬이라는 뜻의 훠샤오다오(火燒島)였다. 저녁 노을이 질 즈음 타이동에서 보면 마치 불에 타는 듯 붉은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설과, 해안 식물들이 소금바람을 맞아 잘 말라죽기에 마치 불에 타버린 섬 같아 그렇게 불렸다는 설 등이 있다. 해방 뒤 국민당 정권에 의해 뤼다오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전까지는 줄곧 훠샤오다오였다.
여기서 아이로니컬한 것은 이 섬의 역사야말로 훠샤오다오에서 뤼다오로 이름이 바뀐 것과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는 점이다. 일단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타이완에서 가장 큰 형무소 중 하나가 들어선 곳이 뤼다오였다. 물론 그때는 다른 대부분의 교도소처럼 이런저런 잡범들을 가둬두는 곳에 불과했다. 성격이 본질적으로 바뀐 것은 해방 뒤였다. 국민당 정권의 신생훈도처 제3대대가 운영하는 정치범수용소로 성격이 바뀐 것이다. 그것도 타이완 본섬을 기준으로 중국 대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지금은 문을 닫은 뤼다오 정치범수용소 곳곳을 돌아보다 보면 뤼다오, 나아가 타이완의 그리 멀지 않은 과거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구호들을 만날 수 있다. 이를 테면 ‘滅共復國’(공산당을 박멸하고 대륙 중국을 되찾자)라거나 ‘我愛國旗 我愛國家’(나는 국기를 사랑하며 국가를 사랑한다) 등 다분히 정치적인 구호들이 이곳저곳에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만하다.
결국에는 민심을 얻지 못해 대륙에서 쫓겨 남동쪽의 작은 섬으로 피난해온 국민당이었으니만큼, 거기서 다시 남동쪽으로 떨어져있는 뤼다오는 그 위치만큼이나 권력의 최후 보루였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정치범을 사회에서 격리시키기 위해 단순히 가둬두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공포스러운 분위기 속에 폭압적인 강제노역, 폭행과 함께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장제스 정권을 따르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의 개조를 위한, 이곳을 관리하는 주체의 이름처럼 수용자들을 ‘신생(新生)’시키기 위한 정신개조 작업이 함께 이뤄졌다. 예컨대 주 3일의 정치 학습 시간을 통해 국부 쑨원의 유훈과 총통 장제스의 언행을 배우고,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과정을 거쳤다. 중국혁명사와 소련의 중국 침략사와 같은 역사 공부도 해야 했다.
특이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이곳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중대장과 정치간사가 수용자들과 함께 기거하며 공동생활을 하는 방식을 고집했다. 육류와 채소류, 그 외의 다양한 부식류를 함께 경작하고, 그것으로 만든 식사도 함께 둘러 앉아 먹었다. 부정부패를 비롯한 여러 실책들로 끝내 민심을 얻지 못해 작은 섬으로 패퇴한 자신들의 역사에서 배운 것이다. 일단 사람을 굶기지 말아야 하며, 나아가 함께 하는 생활을 통해 마음으로부터 감복시켜야 비로소 사상감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국의 멀지 않은 옛 사정과는 비슷하면서도 근원적으로 다른 지점이다.그러나 타이완에도 영원한 권력은 없었다. 국민들의 저항으로 국민당 독재는 결국 막을 내렸고, 뤼다오의 사정도 달라졌다. 악명 높던 정치범수용소는 사라졌고 지금 그 자리는 ‘뤼다오 인권문화원'으로 바뀌어 운영되고 있다. 지난 국민당 독재 시절의 참혹함을 증언하는 전시와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또 대륙 중국과의 갈등 속에서 타이완 근현대사를 극복해온 민주시민들의 성취를 자랑하는 공간으로서도 자리매김해가고 있다.
근현대사를 통틀어 우리와 비슷한 점이 적지 않은 타이완…. 그러나 과연 한국에 이 같은 공간이 있는지 자문해본다. 인권기념관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던 안기부 남산 청사는 난데없이 청소년들이 묵는 유스호스텔로 탈바꿈했고, 서대문형무소는 1945년 8월 15일을 기준으로 후반기 절반의 역사, 즉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지워진 채 ‘항일’이라는 전반기 절반의 역사만을 기리는 공간으로서만 기념되고 있다. 비슷한 길을 걸어온 듯한 한국과 타이완이지만 분단 상황을 극복해가는 과정과 속도가 다른것처럼 힘들었던 근현대사의 기억을 대하는 자세에서도 사뭇 다른 차이를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