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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민주화 투쟁과 공산당의 집권

네팔의 민주화 투쟁과 공산당의 집권  

글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교수)
 


네팔 도시 전경. 

네팔은 히말라야 산맥과 인도, 방글라데시 등에 둘러싸여 폐쇄되어 있는 전형적인 산악 국가로 세계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낮은 나라 중의 하나다. 그러면서 대규모 지진으로 인한 참사가 끊이지 않는 나라다. 100여 개의 카스트와 종족 집단이 있고, 100여 개의 서로 다른 언어가 있어 국민 통합이 매우 어려운 나라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힌두 왕국이었지만 1950년대부터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세력과 국왕 사이의 각축이 벌어졌는데, 1990년 네팔 인민들은 봉기를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렸다. 왕은 인민 봉기에 굴복하여 의회 군주제를 도입하는 등 정치개혁을 단행하였고, 여러 분파로 나뉜 공산주의자들은 ‘통합 마르크스레닌주의 네팔공산당’(이하 통합ML)으로 힘을 합쳐 싸웠다. 네팔공산당(통합ML)은 숙의 끝에 무장 혁명 노선을 폐기하고 의회 민주주의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1991년에 치러진 총선에서 네팔공산당(통합ML)은 기득권자들의 지지 정당인 네팔회의당과 함께 양강 체계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의회 민주주의가 도입된 이후 계속해서 기득권자들의 방해로 헌법 제정이 유보되었고, 그러는 가운데 중국의 마오쩌둥 노선을 따르는 네팔공산당(이하 M)이 1994년에 창당되었다. 네팔공산당(M)은 1996년 왕에게 인민 전쟁을 선포하였다. 내전이 벌어지던 중 2005년 11월 22일에 모든 주요 정당들이 12개 조항에 합의를 이루는 데 성공하였으며, 왕정 폐지와 다당제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연방공화국을 표방하였다. 하지만 그 후로도 내전은 지속되었고, 네팔공산당(M)은 무장 투쟁을 벌여 전체 국토의 80% 정도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혈 혁명 완수를 눈앞에 두고 투표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하여 2008년 제헌 의회를 위한 총선에 참여하였다. 선거 결과 네팔공산당(M)이 주도하는 연립 정당이 과반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장악하였다.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한 공산주의 국가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2010년 10여 년 산고 끝에 탄생한 네팔 헌법을 람 바란 야다브 전 대통령이 공개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아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2006년 평화 협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전 국토의 80% 정도를 점령했던 네팔공산당(M)이 왜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았을까 하는 점이다. 네팔공산당(M)은 그 이름과는 달리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정치 집단이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보다는 그 위에서 연방제를 구성하고, 지역이나 카스트 등의 차원에서 소수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의 평등한 처우를 위한 싸움에 더 몰두하였다. 그것은 네팔의 마오주의 공산주의가 처음에는 동부 네팔을 통해 인도의 마오주의 공산주의자의 영향을 받아 강력한 토지 개혁 등 농민 운동 위주로 활동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서부 네팔을 중심으로 종족 중심의 평등성을 더 중시하는 집단이 세력을 확장시켜 옴으로써 자신들의 공산 혁명에 한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네팔공산당(M)이 선거를 통해 집권을 하는 전략을 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네팔의 다민족 사회의 성격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사회경제적 이념을 통해 만든 계급으로는 지역, 종족, 카스트 등 다른 소외된 정체성 집단을 포용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네팔이 이렇게 오랫동안 내분을 겪는 것은 오랫동안 만연한 빈곤과 불평등이라는 사회경제적 요인에서 비롯된다. 그 가운데 우선은 극심한 빈곤이고 그와 동시에 힌두교 카스트 체계에 의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갈등이다. 대부분의 권력과 부(富)는 종족과 카스트에 따라 소수에게 집중된다. 그런데 그 집중은 결정적으로 마헨드라 왕이 도입한 판차야트 체계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판차야트는 ‘한 국왕, 한 나라, 한 언어, 한 의복’을 표방하는 전형적인 독재를 뒷받침하는 정치 기구였다. 마헨드라 국왕은 카스트, 지역, 여성, 언어, 종교 등에서 소수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집단에서 엘리트를 뽑아 관료로 임명하거나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 전형적인 분리 통치술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뽑힌 특정 집단의 엘리트들은 시간이 가면서 자각을 하게 되고, 그 위에서 더 큰 세력을 만들고자 했다. 


네팔 아이들. ©연합뉴스

 마헨드라 국왕은 그것을 간과했고, 그 엘리트들은 중앙 권력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1990년의 일이고, 그 세력들을 모으는 일을 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였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의 과정에서 카스트, 종족, 성(性), 언어 등의 차원에서 억압받던 사람들의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런데 선거를 통해 양대 정당으로 성장한 네팔회의당과 네팔공산당(통합 ML)은 그런 소수자 문제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네팔 사회가 갖는 근본 문제는 토지를 둘러싼 수탈과 빈곤의 문제와 소수 집단(종족) 배제의 문제인데, 네팔공산당(통합 ML)은 전자에 관심을 주로 두면서 점진적 개량을 주장한 반면 네팔공산당(M)은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일대 변혁을 기도하였고, 그 방식으로 무장 혁명을 주장하였다. 

이후 종족, 언어, 카스트, 종교 등에 기반을 둔 다양한 정체성 집단 간의 갈등이 폭발하였고 민주화는 이 과정에서 사회적 포용을 이루는 데 중요한 구심점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일부 남부 지역은 민주화와 사회적 포용의 개념을 자신들의 자치권 확대 차원으로 해석하였을 뿐 계급 의식을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공산당 반군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대부분의 아시아 나라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과거 식민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만든 민족/국민 차원의 민족주의나 농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계급주의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곳 네팔이 그렇고 아프가니스탄이 그렇고 버마가 그렇고 이라크가 그렇다. 그들 나라에서는 그 어떤 이념의 정체성보다 종족의 정체성이 강하다. 그 정체성은 인종, 언어, 종교, 카스트 등이 이질적으로 결합되면서 나타난다. 공산주의와 같은 사회 경제적 이념은 포스트 식민시기에 아시아 곳곳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정체성의 정치를 하나로 통합하거나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불가촉천민이나 소수 부족, 혹은 여성이나 차별 지역의 입장에서 볼 때 공산주의가 자신의 차별을 해결해줄 수 있는 이념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2015년 5월, 대지진 한 달이 지난 네팔의 거리 모습. ©연합뉴스

 네팔의 민주화 과정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사실은 공산당이 유혈 무장 내전을 거쳤으나 협상 끝에 의회 선거에 참여하여 집권을 하였다는 것이다. 공산당 정권이 투표를 통해 탄생한 것은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일대 사건이다. 하지만 처음 정권을 잡은 2008년 네팔공산당(M)을 중심으로 구성된 연립 정부는 반군을 정규군으로 전환시키는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벌이다 분열되었고 결국 내각 총사퇴가 일어나 정권을 내주게 되었다. 이후 헌법 제정을 위한 노력은 지속되었고, 2013년에 드디어 헌법 반포를 위한 제2대 총선이 열렸다. 거기에서 네팔회의당이 1당, 네팔공산당(통합 ML)이 2당, 네팔공산당(M)이 3당을 차지했고, 이들은 1년 이내에 헌법을 제정하기로 합의를 봤다. 네팔회의당의 코이랄라(Sushil Koirala)가 초대 수상이 되었고 여당에 네팔공산당(통합 ML)이 참여하였다. 그 후 코이랄라 내각이 해산되고 수상 합의를 보지 못해 의회 내 선거에서 제2당인 네팔공산당(통합 ML)의 총재인 K.P.샤르마 올리(K.P.Sharma Oli)가 수상으로 당선되었고, 이어 명목상 정부를 대표하는 대통령 선출을 위한 의회 선거에서 네팔공산당(통합 ML)의 부총재인 비디아 데비 반다리(Vidya Devi Bhandari)가 선출되었다. 2008년에 이어 두 번째로 공산당 정부가 투표를 통해 탄생한 것이다. 네팔은 지금 민주화를 위한 힘든 여정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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