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위 윤보선의 흔적을 찾다.
최근 충청대망론이란 이름으로 충청권 출신의 대통령 후보들이 유력하게 거명되고 있다. 1948년 이후, 충청권에서 대통령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다. 하지만 충청도 출신 대통령은 분명히 존재했다. 또 이명박을 첫 서울시장 출신 대통령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 역시 맞지 않는 ‘상식’이다. 또 노무현 대통령이 국립묘지가 아닌 고향에 묻힌 첫 대통령이라고 알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역시 사실이 아니다. 바로 충남 아산 출신이자 2대 서울시장 이었으며 고향 땅에 묻힌 해위 윤보선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윤보선하면 젊은 층에서는 이름도 모르는 경우가 많고, 이름을 안다고 해도 최규하와 비슷한 과도기 대통령으로 알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결코 그는 그런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박정희의 정적 내지 라이벌이라고 한다면 대부분 김대중과 김영삼을 들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들이 두각을 나타낸 시기는 1970년대 부터였고, 1971년 대선 당시, 40대 김대중 후보의 돌풍이 대단했지만 표차는 94만표 였다. 이에 비해 1963년, 해위는 박정희에게 지긴 했지만 불과 15만표 차밖에 나지 않았다. 물론 둘 다 관권, 금권이 난무한 불공정한 선거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이 후 해위는 사실상 제도권을 나와 부인 공덕귀 여사와 함께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다. 즉 박정희 집권 18년을 통틀어 가장 강력하게 박정희 정권과 정면으로 맞서 싸웠던 인물은 해위였던 것이다.
윤보선은 1897년 8월 26일, 충남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에서 태어났다. 일반적으로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일컬어 내포라고 하는데, 아산을 비롯해 예산, 당진, 서산, 홍성 등이 그 고을들이다. 초베스트셀러인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적답사기》의 첫 권 내용이 남도와 내포 답사인데, 이 책에서 저자는 한용운, 유관순, 이순신, 박헌영, 김좌진, 김정희, 최익현 등 이 곳에서 난 인물들을 열거했다. 그러면서 저자는 내포는 풍요롭고 부드러운 지형이지만 나온 인물들을 대부분 강골이라고 평했다. 윤보선 역시 내포가 낳은 강골들 중 하나이다.
지금도 건재한 윤보선 생가는 아산의 명문인 해평 윤씨 집안 가옥들 중 하나이다. 생가에 표지판이 서있고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의 흔적을 보여주는 시설은 없다. 생가 옆 공터에 연못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봐서 기념관을 만들 예정인 듯한데, 빨리 세워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해위 윤보선은 한국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일본유학을 한 이가 꽤 많으니 게이오 의숙 유학 경력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1919년 상해로 넘어가 여운형과 신규식 선생의 감화를 받아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1920년에는 불과 23세로 의정원 의원 즉 지금의 국회의원이 되었던 것이다. 1924년에는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떠나 석사학위까지 취득했다. 그가 영국에서 귀국한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반세기를 보낸 집은, 지금은 관광객들로 가득한 북촌에 있는 안국동 8번지의 윤보선 가옥이다. 99칸이라 알려진 이 집은 백인제 가옥과 함께 북촌의 한옥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원형이 잘 보존된 귀중한 문화재다. 아쉽게도 들어가 볼 수 없지만 말이다. 이 집은 원래 민씨 척족의 일원이었던 민영우의 집이었지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1918년 윤보선의 아버지 윤치소가 사들였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의 고문과 이승만 국회의장 비서실장, 서울시장, 상공부장관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이승만을 적극 지원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독재로 흐르자 그를 떠나,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국회의원이 되었고 4.19 혁명 이후 1960년 8월, 4대 대통령에 취임하기에 이른다. 청와대의 원래 이름이 경무대(景武臺)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제법 되지만 경무대의 유래에 대해서는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경무대를 만든 이는 흥선대원군이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한 다음 북문인 신덕문 밖 부지에 경무대를 세웠다. 경무대에는 문무의 융성을 기원하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지어졌고, 무과 시험도 이곳에서 치렀다고 한다. 이 경무대의 이름을 청와대로 바꾼 이가 바로 윤보선 이었다. 그는 5.16군사쿠데타 후 건재한 ‘유일한 헌법기관’으로서 역할을 하려했지만 결국 쿠데타 세력과의 갈등으로 62년 3월 22일 퇴임하고 안국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그 때부터 이 집은 바로 앞에 있는 안동교회와 함께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된다.
앞서 말했듯이 1963년과 1967년 두 차례에 걸쳐 대선에 나가 박정희와 대결했던 해위는 1969년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민주화 투쟁에 나선다. 특히 1970년대 유신 하에서 보여준 용기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당시 그는 배후 주동자로 몰려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 때 해위의 최후 진술은 이러했다.
“내 나이 77세 일생에 국가내란죄명으로 재판을 받게 되니 감회가 깊다. 나의 죄를 감해달라는 것보다는 학생들에게 공산당이란 죄목은 부당하니 벗겨주기를 부탁한다. 나를 사형장으로 끌고 가거나 풀어주는 것은 당신들 마음대로지만, 민주주의를 해야 된다는 내 소신을 빼앗지는 못할 것이다.”
여든을 바라보는 노 전직대통령은 ‘역적’으로 몰려 구속영장을 받았지만 그 서슬 퍼랬던 유신정권조차도 이를 집행하지는 못했다. 그는 ‘전 대통령 윤보선’이란 우산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기꺼이 그 역할을 해주었다. 하지만 바깥출입은 통제되었기에 부인 공덕귀 여사가 연결통로 역할을 맡았다. 안국동으로 찾아온 인사들과 대화를 나눌 때 해위는 항상 라디오를 켜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도청 때문이었다.
1976년 3.1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문 사건 당시 문익환 목사가 들고 온 원문을 본 해위는 ‘유신헌법 철폐, 긴급조치 무효’라는 구절이 선언문에 없으면 서명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명동성당을 나선 시위대 맨 앞줄에 섰다. 여든의 전직 대통령은 다시 5년 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이렇게 그는 언제나 타협보다는 선명성을 강조하였다. 박정희 스스로가 타협할 생각이 전혀 없는 독재자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인 공덕귀 여사는 이후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장을 맡아 온갖 궂은일을 도맡았다. 공 여사가 한 공헌도 엄청나기에 그 이야기는 별도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가 세상을 떠났지만 민주화는 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YWCA위장 결혼 사건이 터졌고, 해위는 이 사건의 배후로 몰려 2년 형을 선고받고 만다. 그 후 해위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국동 자택에서 ‘정원사’를 자처하며 만년을 보낸다.
그리고 1990년 7월 18일, 독립운동가이자 건국의 참여자이자 서울시장과 장관을 지낸 유능한 관료이자, 대통령이자 민주화 투사였던 해위 윤보선은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한국사의 현장이기도 한 안국동 자택을 떠나 충남 아산의 선산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