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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즌 포> - 다시, 국가란 무엇인가

<시티즌 포> - 다시, 국가란 무엇인가

글 성지훈

<007 시리즈>나 <본 시리즈> 같은 스파이 영화의 미덕은 픽션을 그럴듯하게 꾸며내는 데 있다. 매력적인 첩보요원, 놀라운 신무기, 악당의 음모, 그걸 막으려는 국가의 노력 같은 것들이 그럴싸하게 빚어내는 이야기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스파이 영화는 위기에 처했다. 허구를 아무리 그럴싸하게 꾸며봤자 요즘과 같은 시대는 그럴싸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이 허구보다 더 허구적인 작금.

2013년 감독 로라 포이트러스는 자신을 ‘시티즌 포’라는 인물에게 이메일을 받는다. 시티즌 포는 자신을 미국 정보기관의 수석 정보요원이라고 밝혔다. 고도화로 암호화된 메일에서 그는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광범위한 미국 시민을 대상으로 무차별 감청을 한다고 주장했다. 감독은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한 몇 달 간의 비밀 교신 끝에 시티즌포와 홍콩의 한 호텔에서 접선을 한다. 영화 <시티즌 포>가 시작하는 순간, 007보다 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 스노든의 폭로가 세상을 뒤집어놓기 시작한 순간, 그리고 우리 모두가 ‘국가’에 대한 새로운 물음에 봉착하는 순간이다.

#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당위

미 정보기관에서 일급비밀 정보를 다뤄온 스노든은 홍콩의 한 호텔방에서 영화감독 로라 포이트러스와 프리랜서 기자 글렌 그린월드를 만난다. 스노든은 이들에게 경악스런 사실을 털어놓는다. 미 국가안보국(NSA)에서 광범위한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는 데이터 센터를 유타주에 짓고 통신회사들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의 정보를 무차별 수집하고 있다는 것. 미국 정부는 테러리스트로 확실히 의심되는 사람뿐만 아니라 단순히 미 정부 입장에 반대 의견을 내놓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었다. 민간인 사찰이다. 그 감청의 범위도 광범위 했다. 신용카드 구매 내역이나 e메일 등 사적인 정보들이 그들의 자국 정부에 의해 감청됐다.

스노든은 로라와 글렌에게 이같은 사실을 고발하면서도 자신의 신변에 들이닥칠 위협을 두려워했다. 로라의 카메라는 스노든의 두려움과 감정의 변화를 직시하면서도 스노든을 끊임없이 설득한다. 그리고 질문. 스노든은 왜? 그리고 감독 자신은 왜. 스노든은 고발을 들어줄 대상으로 로라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녀가 오래동안 정부의 감시리스트에 올라 있으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기록해왔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로라는 이라크 전을 다룬 <나의 조국, 나의 조국>을 찍었다는 이유로 미 정부로부터 감시를 당했다. 공항을 이용할 때마다 억류를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관타나모와 테러에 대한 영화 <오우스>를 완성했다.

글렌이 스노든의 발언을 기사화하기 시작하자 NSA에서는 폭로자를 찾기 위해 수색망을 가동했다. 스노든의 주변 사람들을 심문해 스노든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려 했다. 정부의 봉쇄망은 좁혀들어오고 방해공작은 더욱 치밀해진다. 화면 속 글렌과 로라 스노든이 있는 홍콩의 호텔방에는 언제 NSA 요원이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긴장감이 흐른다. 그들은 미 정부가 내부고발자 스노든의 정보를 공개하기 전 먼저 스노든의 정체를 공개한다. 스노든은 그 상황이 두려웠고 앞으로 닥쳐올 일은 더욱 난감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게 했다. 왜.

“투옥된다거나 다른 안 좋은 결과가 나올지라도, 저나 다른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자유, 지적인 자유가 위협받고 축소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 희생이 아니에요. 선한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건 분명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건 어쩌면 ‘당위’다. 두렵고 난망해도 그럼에도 해야 하는 일. 국가, 사회, 공동체, 개인, 행복, 자유, 삶. 어떤 이름을 붙여도 좋을 그 무엇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고 약속이다. 그것이 우습게 깨지는 상황이 결국은 나의 삶을 더욱 불행하게 만들 것이라는 걸 아는 이의 노력. 그는 희생을 한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 당위를 행한 것이라고 말한다.

# “국가란 무엇인가”란 물음

미국 정부가 국민들을 감시하고 반정부의 목소리를 탄압할 수 있게 해준 ‘전가의 보도(寶刀)’는 ‘9.11’이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미국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 전쟁을 빌미삼아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국가들, 정부 정책에 반대해온 지식인과 시민들,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 이주노동자와 유색인종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인권과 자유, 권리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테러의 위협’이 존재했고 뉴욕 한복판 그라운드 제로에 넘치는 슬픔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하면 됐다.

이같은 모양새는 한국도 다를 것이 없다. 한국 정부가 가진 칼은 더욱 강하고 뭐든 자를 수 있다. ‘안보’와 ‘종북’. 한국 정부는 국무총리실 직원을 불법 사찰했다. 국민들의 SNS를 감청하다 발각되자 경찰 수사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밝혔다. 거기서 한 발 더 나가더니 아예 사찰과 감청을 합법적으로 하겠다는 ‘테러방지법’을 통과시켰다. 테러방지법의 골자는 국내에 유통되는 모든 정보를 정부와 수사기관이 마음대로 열어볼 수 있는 것은 물론 그 시스템의 콘트롤마저 정부가 자유자재로 조율할 수 있게하는 법이다. 몰래 훔쳐보는 것도 귀찮으니 이젠 그냥 대놓고 보겠다는 것. 어찌보면 몰래 국민들을 감시하다 걸리자 당황이라도 했던 미국정부는 순진해 보일 지경이다. 그 모든 이유에 안보와 종북이 있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 종북주의자로 몰고 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이같은 태도는 단 한가지 질문이 결여돼있기에 가능하다. “국가란 무엇인가”.

프로야구 선수가 올림픽에서 혹사당해도 “국가가 있어 내가 있다”는 말의 포장 속에 계속해 마운드에 오르는 일, 침몰하는 배에 갇힌 300명의 목숨보다 VIP께 보고할 영상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인 일, 전국적 규모의 전염병을 방지하는 것보다 재벌 대기업 소유 병원의 재산권을 지켜주는 일, 선출되지 않은 ‘위정자의 친구’가 국정을 결정하고 좌지우지 하는 일. 모두 국가와 국민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질문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그건 비단 위정자들, 윗놈들, 잘먹고 잘사는 놈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혹사당하고 착취당하고 위험에 내몰려도 국가가 언젠가는 우리를 구원해주고 지켜줄 것이라고 어김없이 믿고 있는 우리들도 그 질문에서 피해갈 수 없다. 국가란 무엇인가. 정말 국가가 있어 우리가 있나.

대한민국 정부가 공화정이라면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공동선을 지켜내려는 개인들의 보편의지가 결합한 공적 인격에 불과하다. 때문에 국민의 의지에 선행하는 국가의 의지란 있을 수 없고 오직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추구하는 모든 행위의 선을 총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란 바로 나와 당신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의 답을 합의하는 과정이다.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라는 질문. 사실 국가란 고작 그런 것이다.

“이전에 자유와 자유권이라 부르던 것들을 이제는 사생활이라고들 한다. 동일한 관점에서, 이제 그 사생활은 사라졌다. 작금의 세대에서 진짜 우려되는 건, 이제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티즌 포>에 등장한 한 암호 보안 프로그래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사실 가장 무서운 것은 정부가 국민을 감시하는 것이나 이들이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하는 것보다 이제 우리가 그런 그들의 범죄, 그들이 우리의 자유와 인권을 박탈하는 것에 대해 놀라지도 저항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착취에 순종하고 그것을 더욱 바라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걸, 통치, 혹은 정치라고 부르게 된 일이다.

그러니 이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고작 그 국가란 나에게 무엇인가. 국가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국가의 이름이 나에게 강요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그 국가의 어리석은 요구에 얼마나 순응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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