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본권 보장과 민주정치
시민기본권 보장과 민주정치
글 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leekw@inha.ac.kr
국민투표권과 국민발안권 보장으로 대의기관이 국민 의사 존중토록 해야
시민기본권으로서의 국민자치권
헌법은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 기본권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민주국가와 국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시민의 정치적 권리는 선거권을 제외하고는 보장되어 있지 않다.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이 민주국가임을 선언하고 있다. 민주국가란 국민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 국가의 의사가 국민 다수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정치가 국민 다수의 의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헌법에 민주국가를 선언한다고 실제로 민주국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국민은 선거를 통하여 누가 권력을 행사할 것인지를 결정할 뿐이다. 국민에 의하여 선출된 국민대표기관인 국회의 결정이 국민 다수의 의사에 합치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생한다. 선거제도의 결함으로 국민이 행사하는 투표의 절반가량이 죽은 표가 되어 국회의 구성에 참여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국회는 절반의 대표기관에 불과하다. 또한 국회의원이 소수 정당수뇌부의 결정을 실행하는 거수기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정치현실은 다수의 지배가 아니라 소수의 지배가 된다. 현실정치는 과두정치가 되고 만다. 과두정치를 민주정치로 환원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결정이 국민 다수의 의사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 국민이 스스로 바로잡을 수 있는 자결권으로서 국민자치권을 시민의 기본권으로 보장할 필요가 있다.
또한 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함으로써 국민주권주의를 선언하고 있다. 국민이 주권자라고 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국가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국가권력 행사의 최종적인 정당성이 국민으로부터 주어져야 한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국민의 뜻에 반하는 결정을 하여도 국민이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다면, 국민은 주권자라고 할 수 없다. 또한 국민이 원하는 것을 국회가 결정을 하지 않고 방치하는 경우에, 국민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쳐다보고만 있어야 한다면 국민을 주권자라고 할 수 없다. 헌법이 국민을 주권자라고 규정한다고 하여 국민이 현실적으로 주권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국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회의 결정이 국민의 의사에 반할 경우에 국민의 의사로 국회의 결정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국민주권을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기본권이 필요하다. 국민주권의 실현을 위한 기본권은 주권자에게 부여된다는 점에서 주권자의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 행사는 능동적인 주권자 즉 시민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시민의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민의 기본권은 주권자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여 자신에 의한 지배를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자치권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는 국민으로 구성되므로 국가적 차원에서 자치권은 국민자치권이라고 할 수 있고, 지방은 주민으로 구성되므로 지방적인 차원에서 자치권은 주민자치권이라고 할 수 있다. 헌법은 국민 전체에 적용되므로 여기서는 국민자치권을 중심으로 논의한다.
국민자치권의 내용
민주국가에서 국민주권의 행사는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국민이 대표자를 선출하여 주권을 행사하는 방법과 국민이 직접 주권을 행사하는 방법이다. 전자는 권력자를 선택하는 인적인 결정이다(대의제도). 후자는 권력의 내용을 국민이 직접 결정하는 사안에 대한 국민의 결정이다(직접민주주의). 헌법은 대의기관을 구성하기 위한 선거권을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개별적인 정책 사안에 대한 국민결정권에 관해서는 헌법에 아무런 규정이 없다. 국민이 선출한 대의기관의 결정이 국민의 실제 의사에 항상 합치한다면 후자는 필요 없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정치에서 대의기관의 의사가 국민의 실제 의사와 합치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경우에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국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직접 사안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대표기관인 국회의 결정이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경우에 국민은 이를 거부할 수 있어야 주권자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국회의 결정이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경우에도 국민이 아무런 결정을 할 수 없다면, 국민은 더 이상 주권자라고 할 수 없다. 국민이 대의기관의 결정을 거부(veto)할 수 있는 권리, 즉 국민투표권이 국민자치권의 한 부분을 이룬다.
다음으로 국회가 국민이 원하는 결정을 하지 않고 방치하는 경우에 국민이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고 쳐다보고만 있어야 한다면, 이러한 국민을 더 이상 주권자라고 할 수 없다. 국회가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에 반하여 의사결정을 회피한다면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안건을 발안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국민발안권이 국민자치권의 또 다른 내용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민주국가의 원리나 국민주권의 실현은 주로 선거권을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다. 19세기 이후 민주주의 역사는 한마디로 선거권 확대의 역사였다. 차등선거의 폐지, 여성투표권의 보장, 선거연령의 인하, 비례대표제의 도입 등을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하지만 선거권의 확대만으로는 국민주권을 실현할 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역사이기도 했다. 정치인의 공통된 이익에 관련된 문제에서는 정치인 카르텔이 형성되어,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이 수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정치인 카르텔을 극복하여 진정한 민주국가를 실현하고 국민주권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기본권으로서 선거권뿐만이 아니라 국민투표권과 국민발안권을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회의 의사결정에 대한 거부권으로서 국민투표권은 국회가 국민의 의사에 반하여 기존 질서를 개악하려는 것에 대한 비상제동장치가 된다. 국민투표권은 국민의 법적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국민발안권은 기존 질서를 변경하여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비상가동장치가 된다. 변화와 혁신을 위한 국민의 적극적인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후자는 주로 입법에 관한 것이므로 국민입법권이라고도 한다.
국민자치권 보장의 방법과 의미
민주국가를 실현하고 국민주권을 보장하기 위한 시민의 기본권으로서, 국민자치권을 헌법에 보장하기 위한 방안을 생각해 본다. 국민자치권은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대의기관을 구성하기 위한 선거권과 대의기관에 대한 비상제동장치로서 국민투표권, 비상가동장치로서 국민발안권으로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자치권은 국민의 정치적 기본권에 속한다. 선거권은 현행 헌법 제24조에서 보장하고 있으나 국민자치권의 한 내용으로서 선거권을 보장하는 경우에 그 내용은 상당히 보완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예컨대 유권자의 투표 중에서 절반가량이 사표가 되는 선거제도가 국민자치권에 합치되는지의 문제도 새로운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 지난 2015년 정부의 노동정책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국민투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전국에 설치했던 1만 개의 투표함을 개표하는 행사를 진행하는 있는 모습 ©연합뉴스
국민투표에 대해서는 현행 헌법 제72조와 제128조에 규정을 하고 있으나 문제가 많다. 헌법 제72조의 국민투표는 외교나 국방·통일 등 국가안위에 관해 대통령이 국민투표를 발의할 수 있도록 유신헌법에 의해서 도입된 것으로, 전형적인 플레비사이트(plebiscite, 헌법 규정에 관계없이 특정 정치적 사안을 국민의 표결에 부치는 것)에 해당하며 여기서 말하는 국민투표(레퍼렌덤 referendum은 헌법 규정에 따라 국민이 국가 정책결정에 직접투표로 참여하는 것)와는 전혀 성격을 달리한다. 대통령에게 대중영합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정당화하는 통로를 제공함으로써, 국민주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으므로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헌법 제128조의 헌법 개정에 대한 국민투표는 국민의 거부권으로 작동할 수도 있지만, 대통령이 발의하는 경우에 역시 남용될 우려가 있다. 국민투표는 헌법에 대해서만 인정할 것을 넘어 일반 법률 등 모든 정책 사안에 대해서 확대할 필요가 있으므로, 국민자치권으로서 국민투표권을 헌법에 새롭게 보장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
국민발안에 대해서는 현행 헌법에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아, 국민자치권의 한 내용으로써 이를 새로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민발안은 국민들이 부딪히는 생활상의 장애를 정치인이 외면하는 경우에 국민들이 스스로 의제를 선정하고 국민들이 직접 결정하는 것이다. 국민을 단순히 통치의 대상으로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시민으로서, 적극적으로 새로운 정치질서를 창조하는 정치주체로서 인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헌법의 기본권에 시민의 정치적 기본권으로서 국민자치권을 규정하고 그 내용으로 선거권과 국민발안권, 국민투표권을 규정하되, 국민투표와 국민발안의 행사요건과 구체적인 절차에 대해서는 입법절차(법률제정절차와 헌법개정절차)에서 따로 규정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런 경우 입법절차로서 규정된 국민투표 제도와 국민발안 제도는, 국민자치권으로 규정된 국민투표권과 국민발안권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절차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국민투표와 국민발안과 같은 직접민주주의가 작은 나라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은 오해이다. 오히려 큰 나라일수록 대의기관과 국민간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사안에 대한 국민의 직접결정이 더욱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국가의 크기나 공간적 거리는 오늘날 투표소 투표나 우편투표, 전자투표 등으로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국민투표권과 국민발안권이 국민자치권으로 보장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이 헌법에 규정되는 경우에, 대의기관인 국회는 그 입법과정에서 국민의 의사에 근접한 결정을 하려는 노력을 하게 될 것이다. 국회가 국민의 의사와 동떨어져서 결정을 하거나 결정을 방치하는 경우에, 국민투표나 국민발안에 의해서 번복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투표와 국민발안권은 대의제도를 손상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기관이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도록 만듦으로서 대의제도를 보완하고 완성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