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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들의 안식처이자 소도 ‘명동성당’을 찾아

약자들의 안식처이자 소도 ‘명동성당’을 찾아

글. 사진 권기봉 (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명동성당이 지금의 자리에 들어선 것은 지금으로부터 119년 전의 일이다.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 장수 양호가 진을 치고 숭례문에 있던 종을 가져다가 단 이후 ‘종현(鍾峴)’이라 불렸던 이곳에는, 애초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벼슬을 지낸 침계 윤정현의 저택이 있었다. 프랑스 국적의 초대 주임신부인 블랑 주교가 바깥채만 60여 칸에 이르렀다는 그 집을 사들인 것은 1883년이었는데, 약 4년 동안은 한옥 그대로 교회당으로 이용했다. 지금의 고딕 성당을 짓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인도 서울이나 개항지에 대한 토지구입권과 건물신축권을 인정한 조불수호조약이 비준된 1887년 이후였다.

적잖은 조선인들이 오랜 기간 공사가 진행된 탓에 “들보를 얹을 수 없어 벽만 높이 쌓는가”며 힐난했던 명동성당이 우여곡절 끝에 완공된 것은 대한제국 선포 이듬해인 1898년 5월 29일이었다. 1892년 8월 5일 정초식을 치른지 약 6년만이며, 천주교를 박해한 흥선대원군이 사망한 지 꼭 3달뒤였다. 명동성당보다 2년 늦은 1900년 완공된 성공회 강화성당이 한옥의 기본구조에 기독교식 건축양식이 절묘하게 섞어 지어진 것과는 달리, 명동성당은 거의 서양식으로 지어졌다. 건물의 총길이는 68.25미터, 폭은 29.02미터, 높이가 23.43미터, 그리고 종탑 높이는 46.70미터에 달했다. ‘천좍쟁이’나 ‘천좍을 할 놈’, 즉 ‘천주학(천좍)을 하다 참형 당해 죽으라’는 말이 가장 심한 욕으로 통용되던 시절이 엊그제 같았는데, 극심한 천주교 탄압을 뚫고 드디어 도심을 내려다 보는 위치에 그 상징과도 같은 건물을 우뚝 세운 것이다.

<‘살인자가 천주교 신자일 수는 없다’>
요즈음엔 ‘명동성당’이라는 이름이 익숙하지만 공식명칭은 ‘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이며, 완공 당시부터 일제강점기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의 이름은 ‘종현성당’이었다. 그리고 종현성당이라는 이름을 쓰던 시절은 한국 천주교에 있어 질곡의 시기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여느 종교가 그러하듯 천주교 역시 어두운 과거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1910~20년대에도 한국 천주교와 일제 사이에 밀월 조짐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심각한 수준으로까지 나아간 것은 1931년 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하면서부터였다. 전쟁 승리를 위해 조선인들의 정신까지도 일본화 하려는 일제가 천주교인들에게도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이다. 애당초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듯하던 천주교의 태도는 곧 바뀌기 시작했고, 1936년 4월 들어 한국 천주교의 모든 교구장들이 신사참배 허용으로 의견을 모았다.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애국적인 충성 행위’라는 교황 비오 11세의 훈령이 공포된 것은 바로 그 다음달이었다. 한국 천주교는 물론 교황청마저도 일제와 타협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예컨대 1936년 4월 종현성당에서 열린 부활미사가 경성중앙방송국 라디오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방송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8월 15일 성모승천축일에는 오전과 오후 두 번에 걸쳐 ‘국위선양 평화미사’도 열렸다. ‘제2차 국위선양 평화미사’를 실시한 것은 석 달 뒤인 11월 1일이었다. 일제의 주요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종현성당과 약현성당, 영등포성당, 혜화동성당 등 4개 성당이 연합미사를 연 것인데, 그 미사 역시 경성중앙방송국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어 명동성당의 ‘명성’이 말 그대로 전국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외에도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전위대라고 할 수 있는 ‘황군(皇軍)’ 위문 모금행사가 열렸고, 전쟁에서 죽은 군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미사, 일제가 주장하던 ‘대동아 평화’를 위한 미사 등이 연달아 열렸고, 성당 안에서는 일본어 강습회도 개최됐다. 심지어 징병제가 실시되자 ‘조선 청년들도 황국 신민의 자격을 얻었다’며 환영을 표한 것이 한국 천주교다.

말 그대로 일제강점기의 한국 천주교는 이른바 정교분리론과 성속분리론을 내세우며 일제의 폭력과 수탈로 고통 받는 조선민중을 등한시하며 전시총동원에 협력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史實)이다. 종현성당 신학교에 다니던 학생을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시키는가 하면, 독립운동가 안명근은 종현성당 두 신부의 고발로 투옥되기도 했다. 심지어 18세에 세례를 받은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 천주교가 금하는 ‘살인 행위’라며, 해방이 되고도 한참이 지난 1993년까지 신자로 인정하지 않아온 천주교였다.

<약자들의 안식처이자 소도>
서울 명동이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도 아니고, 명동성당이 이 땅 최초의 성당도 아니다. 독립운동에도 별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명동성당이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는 이유는 하나다. 유독 잔인했던 군사독재정권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한 민주화운동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정권의 억압과 폭력이 극에 달하던 시절, 명동성당은 격동하는 현대사의 한복판에 있었다. 물꼬를 튼 것은 1969년 47살의 젊은 나이로 추기경에 서임된 김수환이었다. 유신 직전인 1971년 12월 24일 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성탄절 미사에서 “만일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독재 아니면 폭력 혁명이란 양자택일의 기막힌 운명에 직면’할지 모른다며 박정희정권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정권은 이듬해에 되레 장기집권을 위한 초헌법적인 ‘10월 유신’을 발표한 데 이어, 74년에는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가 반정권 투쟁을 하던 민청학련 학생들에게 시위 자금을 댔다며 구속해 버렸다. 군사독재정권과 천주교 사이에 눈에 띠는 대립각이 세워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지학순 주교의 구속은 젊은 사제들을 중심으로 하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1975년 사제단이 ‘인권회복 및 국민투표 거부운동’을 벌인 데 이어 76년 3월 1일에는 함세웅 김승훈 신부와 문익환 목사, 김대중 함석헌 선생 등 12명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명동성당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메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는 남베트남 함락과 인혁당 관련자 사형 등으로 조성된 암울한 당시 시대상황에 비추어 볼 때 가히 충격적인 반독재 반정권 투쟁이었다.

1978년 ‘알몸’과 ‘인분’으로 처절하게 저항한 ‘동일방직 노동자투쟁’ 등과 같은 노동운동에도 ‘명동성당’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농민운동과 인권운동에도 늘 동행했다. 군청과 농협에서 추천한 씨감자를 심었지만 싹이 나지 않아 농사를 마친 농민 오원춘 씨가 당국에 피해보상을 요구했다가 이듬해 백주대낮에 정보기관에 납치돼 감금·테러를 당한 일이 있었다. 이른바 ‘오원춘 납치사건’이었는데, 오 씨가 희생을 각오하고서 이 일을 폭로할 때에도 사제단과 가톨릭농민회의 뒷받침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명동성당은 강압적인 정권에 맞서 싸우던 이들의 피신처, 곧 소도였다.

특히 전두환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는 숱한 반독재 집회가 열리는 등, 명동성당은 명실공히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호헌철폐,독재타도,직선제쟁취”를 외치며 들고 일어선 1987년 6월 항쟁의 진원지 역할을 한 것이다. 바로 그해 경찰 통계만 보더라도 총 127차례 연인원 6백만여 명이 집회에 참여하는 대기록이 세워졌으며, 얼마나 최루탄을 쏴댔는지 최루탄을 독점생산하던 한영자 삼양화학공업 사장이 28억원의 세금으로 그해의 개인납세자 1위에 등극할 정도였다.

<명동성당의 오늘>
가톨릭의 본산이라 할 유럽에서는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성당이 지리적으로 열린 공간에 위치한다. 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평지에 세워지기 때문에 그 주변에는 으레 광장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 광장에서는 장이 서거나 각종 집회 등이 열려왔다. 지금이야 ‘피난처’나 ‘은신처’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열린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명동성당은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데다 입구에서 진입로를 따라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닿을 수 있다. 주위에 비해 확연히 드러나는 장점은 있지만 그만큼 공간적 제약이 따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명동성당은 지난 1970~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에 약자들의 소도로서 충실한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후 한해 두해 시간이 흐르면서 명동성당에 대해 아쉬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한 마디로 1990년대 중반 이후 명동성당이 ‘변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성당 측이 지난 2000년 겨울에 있었던 한국통신 노동자들의 천막농성에 대해 “각종 단체의 집회와 농성으로 성지 훼손이 심각해 앞으로 성당 동의서가 첨부되지 않은 집회와 농성은 원천적으로 봉쇄해 달라”며 관할 중부경찰서에 시설보호 요청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2002년 성모병원 노동자들이 농성할 때에는 주요 성직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지를 사유물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항하기 위해 공권력에 호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토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수 년 동안 이익단체들의 농성장으로 몸살을 앓아 왔다”는 하소연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명동성당이 오로지 종교행사와 신도들만을 위한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세종로광장이나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피켓 시위가 열리고, 덕수궁 앞에서 천막 농성이 이어지며, 서울광장이나 청계천 등지에서 촛불집회가 열리곤 하는 오늘날, 특히 신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외국인 이주 노동자나 갈 곳이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장애인, 빈민, 그리고 농민들에게 있어 명동성당은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다. 그나마 성당 마당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들머리에나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할 수 있는 정도다. 비록 경사가 가파른 들머리에서의 천막농성이고, 명동성당 측으로부터 철거 요청을 수없이 받긴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에게 있어 명동성당은 불안한 몸을 잠시나마 의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역사적인 장소’라는 것은 그냥 눈에 보이는 장소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의 창고’이며 ‘문화적인 전통과 가치의 저장소’이다. 어떠한 기념할만한 건축물이나 공간에는 단순히 흘러간 옛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해왔고 함께 해갈 사람들의 지혜와 희망이 숨어있다. 그런데 명동성당은에 붙여진 ‘사적 제258호’라는 국가지정문화재 번호는 그저 과거에 대한 찬사일 뿐이다. 한때는 이 땅 역사의 진보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갈 때도 있었고, 한때는 이 사회의 발전을 위한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던 명동성당... 권력 없고 돈 없고 힘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휑한 명동성당을 둘러 보며 “과부와 고아,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상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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