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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 30년을 마주하다

Talk | 6월항쟁 30년의 한국 민주주의 Ⅳ

통일운동 30년을 마주하다

김창수 6월항쟁의 에너지로 싹 틔운 통일운동의 일상화·대중화 필요
이태호 북핵·북한인권 아니라 한반도핵·한반도인권…자성적으로 성찰해야
홍진표 통일과 평화 쟁점 여전히 유효…분단상황 내 평화공존 가능하다

일시 및 장소 2017년 8월 25일 10:30~12:3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회의실
진행·정리 이종률·김남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관리실 / 사진 이진욱 사진작가

민주누리는 올 한 해 ‘6월항쟁 30년과 한국 민주주의’라는 대주제로 4번의 특집을 꾸려왔다. 이번 호에서는 이 기획의 마무리로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본격적인 싹을 틔운 통일운동의 역사적 흐름을 평가하고 재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과제와 방향도 모색해본다. 민주주의를 통해 통일이 가능하고, 통일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 발전이 가능하다.

6월항쟁과 통일운동

김창수
6월민주항쟁으로 형성된 에너지는 지난 30년간 우리 사회가 역사의 비행을 해오는데 엔진과 같은 역할을 했다. 오늘은 통일운동을 중심으로, 6월항쟁 이후 우리 사회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다. 다행히 오늘 좌담에 참석하신 분들은 민주누리 독자 여러분들이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는 데 가장 훌륭한 길잡이가 되실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1980년대 말 통일운동이 시작될 때 ‘걸어 다니는 통일운동’이라고 불렸고, 그 이후에도 1990년대 중후반 북한민주화운동을 하며 많은 쟁점을 만드셨던 홍진표 시대정신 상임이사님 모셨다. 홍 상임이사님과는 약간 결이 다르게 평화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하셨고, 1990년대 이후 시민사회에서 왕성한 활동을 해온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위원장도 모셨다. 저는 1980년대 말부터 통일운동과 평화운동을 해온 사람으로서, 오늘 영광스럽게도 사회를 겸한 좌담자로 참석하게 되었다. 오늘 모인 세 사람이 같거나, 비슷하거나, 다른 역사를 살아왔기 때문에 다양한 내용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먼저 ‘6월항쟁 30년’, ‘평화와 통일’이라는 주제를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나 소회가 무엇인지, 여는 말을 대신하여 한 마디씩 해주시면 좋겠다.

홍진표
개인적으로 근래에는 통일운동과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이런 주제에서 어떻게 맥락을 잡아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이 좌담을 준비하면서 과거에 대해 회고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6월항쟁 이후 사회적으로 자유가 신장되면서 통일운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1990년 범민족대회 때 기억이 많이 났다. 그러한 행사가 가능하고 통일 혹은 통일운동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큰 의미였다. 당시 그 과정에서 저는 북한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시각으로 통일운동에 대해 접근했었다.

이태호
저는 86학번인데 1987년 6월항쟁이 막 시작될 때부터 학생운동을 했다. 단과대 선배였던 박종철 열사가 돌아가시고 나서, 본격적인 운동을 안 하더라도 데모는 안 나갈 수 없는 분위기가 학내에 조성됐다. 얼결에 데모를 나가다 학생운동권이 되었고, 이후 처음 맞이한 상황이 1988년 남북학생판문점회담이었다.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유세 과정에서 지금은 배우가 된 김중기 씨가 회담을 공개 제의했다. 제가 처음 속했던 운동권 팀의 세미나를 주도한 선배였다. 그 선배와 함께 얼떨결에 선거운동과 통일운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제 학생운동이 꼬였다.(웃음) 그 뒤로는 학생통일운동과 전체 통일운동을 두고 굉장히 큰 논쟁들이 있었다.

김창수
저는 6월항쟁 때 서대문 서울구치소에 있었는데, 밤만 되면 밖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 소리가 들리더라. 시위대가 구치소 바로 근처까지 와서 발자국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6월항쟁에 직접 참여는 못했지만 그 에너지를 감옥 안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88올림픽 개최에 맞춰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 행사가 열렸고, 폐막식 때 문익환 목사님이 범민족 대회를 제안했다. 여기 모인 우리 세 사람은 6월항쟁이 가져다준 자유 속에서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통일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가 막 쏟아져 나오던 시대를 함께했다. 이제 30년의 흐름 속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것을 말씀해주신다면?

홍진표
말씀하신 6월항쟁 이후의 에너지가 통일운동으로 분출되었던 흐름에 내가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 이후의 내 인생을 결정해 버렸다. 우리 모두 출발은 민주화운동에서 했지만 그러다 통일평화 쪽으로 빠진 사람들이다.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통일운동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북한을 더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러다 북한 인권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통일운동에 안 빠졌으면 사뭇 다른 길을 갔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게 결국은 역동적으로 살게 된 보람이라고 해야겠다.

김창수
뉘앙스는 보람이자 아쉬움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냥 보람만 남겨두자.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참 공감이 된다.

이태호
‘보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만감이 교차한다. 1988년에 김중기 선배를 따라서 판문점에 가다가 홍제동에서 진압 세력에 딱 막혀서 땅에 드러누웠는데, 그때 하늘을 보며 북녘 땅을 상상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가슴이 아주 뭉클했다. 지랄탄이 날아오던 난리통에서, ‘아! 내가 어떤 상황에 있구나’하는 것을 직시할 수 있었고, 처연한 느낌과 함께 다짐이 생겨났다. 그래서 제가 지금도 홍제동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는 사실 남북 교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임수경 씨를 북에 보낼 때도 비판적이었고, 학내 운동할 때도 반전반핵운동을 주장했고, 통일운동 할 때도 비핵군축이 자주교류보다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홍진표 선배가 쓴 <민족대단결론> 비판 세미나를 할 정도였다. (일동 웃음) 당시 홍진표의 <민족대단결론>을 안 읽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통일시대맞이(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시대맞이 전국학생운동본부)라는 조직을 만들다 실패했던 기억도 있다. 조선일보가 준비 과정을 취재하더니 “반 한총련 조직”이라고 보도를 했고, 외신 포함 100여 명의 기자들이 와서 “너희 정체가 뭐냐” 묻더라. 운동권의 한 선배가 “범청학련(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 말고 다른 학생 조직을 만들어달라”고 해서 시작한 일인데, 나중에는 그 선배가 세간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던지 새통체(새로운 통일운동체) 논쟁할 때 결국 우리와 뜻을 같이하지 않더라.


✽ 남북학생판문점회담: 1988년 6.10남북학생회담을 위해 판문점으로 향하려던 대학생 5천여 명이 홍제동 지하철역 앞 6차선 도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중 가스차 4대가 다가오자 팔짱을 끼고 드러누워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고 있다. 경찰은 이 시위대 위에 다연발 최루탄을 쏘아 해산시켰다.

김창수
저도 6월항쟁 이후 시대적 흐름에 맞게 통일운동이라는 뜨거운 열기에 참여했다는 것이 첫 번째 보람이다. 두 번째 보람은 1990년대 중반 새로운 통일운동 이야기가 나왔을 때 통일운동의 일상화, 생활화, 대중화를 위해 뛰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는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이후에 남북의 직접교류가 시작되었을 때 북한을 방문해 북한 사람들과 협상했던 순간들이다. 우리와 북한의 접점을 확인하고 그런 인식을 북한 사람들에게 심어준 것을 개인적으로 보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통일운동 과정에서 보람만큼이나 아쉬움도 있으실 텐데?

통일운동의 어려움

홍진표
그때 비핵군축이다, 민족대단결이다 하는 논쟁은 결국 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차이였다. 비핵군축 쪽은 북한 정권이나 체제에 아무래도 조금 거리를 두었고, 나로 상징되는 민족대단결 쪽은 북과 친하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민족대단결이 급진적인 편이었다면 비핵군축은 국민들의 정서도 고려한 접근이었다.

아쉬운 점은 통일문제라는 게 필연적으로 북한을 끌고 들어가는 주제라 항상 민감하다는 것이다. 통일운동 할 때 운동권 안에서도 큰 논란을 겪었고, 심지어는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내에서도 통일운동 열심히 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은 항상 비주류였다. 민중을 강조하는 쪽이 세력이 더 컸다. 저도 북한인권, 북한 민주화 문제를 다루다가 심한 논란 한가운데에 처했다. 말로는 의견 차이를 존중하면서 논쟁한다지만, 서로 의가 상하게 되는 아픔도 겪었다.

이태호
아쉬움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선택한 평화 이슈 때문에 겪은 일 중 하나는 ‘천안함’이다. 지금도 폭침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이 있다. 저는 폭침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보다는 폭침이라고 제시한 증거가 증거 능력이 없다는 문제 제기를 하고 그런 미흡한 증거를 가지고 군사행동에 달하는 제재를 하면 안 된다는 입장이다. 여전히 진상규명이 안 된 채로 남았다고 보지만, 일부에서는 저희를 두고 “다 끝난 문제를 가지고 계속 음모론을 제기하는 종북론자”라고 말한다. 남북관계에서는 분단이라는 상황 때문에 합리적 접근이 안 되거나 정보공개가 막혀있어서 야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다. 분단 상황 때문에 문제가 미궁에 빠지고, 이것이 이후 분단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겪고 있다. 이로 인한 남북의 불신은 지금 미사일과 핵으로 인해 갈등이 커지는 상황에도 꽤 영향을 미친다. 남북문제에는 온 힘을 다해도 안 되는 벽 같은 것들이 있다.


✽ 2000년 6월 14일 남북공동선언에 합의한 후 서로의 맞잡은 손을 들어보이는 양국 정상

김창수
1989년도에 탈냉전의 흐름 속에서 노태우 정권이 범민족대회를 승인했다. 북한과 해외동포가 서울에 와서 실무회담을 하는 것을 승인해준 것이다. 정부는 안전 등 여러 문제 때문에 큰 호텔에서 하라고 했고, 민간에서는 정부의 통제와 감시 속에 들어갈 수 없다고 대립하다가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 무산됐다. 지금 생각하면 장소는 큰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행사만 잘 성사됐다면 우리가 30년 넘게 노력해도 안 됐던 큰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위험한 발언일지도 모르겠지만 독재정권이라고 비판받았던 정부가 전향적인 움직임을 보였던 것에 반해서, 진보적이라는 민간에서는 그만큼 생각이 열려있지 않았던 것 같다.

통일과 민주화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더 자세히 해보자. 방금 전 대화에서도 슬쩍슬쩍 나왔지만, 당시 통일이 먼저냐 민주가 먼저냐, 자주교류냐 평화군축이냐, 이런 식의 쟁점들이 형성됐었다.

통일운동의 주요 흐름

이태호
학생통일운동이 시작됐던 1989년은 국제적으로 보면 탈냉전이 진행될 때였다. 사회주의 몰락을 보면서, 남한과 북한이 둘 다 개혁하지 않으면 통일도 쉽지 않거나 해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결론적으로는 선 민주론 입장이었다. 백낙청 선생의 ‘분단체제’라는 말이 입에 딱 맞았다. 또한 남북한 모두의 체제를 바꾸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를 새통체(새로운 통일운동체) 논의라고 했다. 당시는 새통체가 되기 힘든 조건이었고, 결론적으로는 우리뿐 아니라 모두 새통체 논의에서 실패했다.

자발적인 남북 관계 개선의 열망이 터져 나와 통일운동을 했던 것처럼, 북한돕기운동도 어떤 이론 때문에 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북한체제가 무너지려는 신호가 아닐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북한 인권도 물론 중요하지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휴전선을 없애야 한다고 느꼈다. 또한 평화운동을 해야 남한 체제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남북관계에 대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북한돕기운동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남북관계를 왜곡하는 담론을 전파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 1889년 12월 대한성공회에서 열린 민주통일운동과 민중인권에 관한 토론회 모습

김창수
중요한 흐름을 쭉 짚어주셨다. 최초에는 전통적 통일운동이라고 하는 자주교류가 있었다. 두 번째는 남북한 양 체제 변혁이 필요하다는 선민주 문제의식, 세 번째는 새로운통일운동체를 하자, 네 번째 북한돕기운동을 하자, 다섯째 휴전선 없애기 평화운동으로까지 왔다. 이 하나의 흐름을 대표하는 분이 이태호 위원장이다. 저 같은 경우에는 여기에 겹치는 부분도 있고 멀어지는 부분도 있다. 이와 또 다른 흐름으로 홍진표 상임이사님 쪽이 있다.

홍진표
과거 생각과 지금 생각이 많이 바뀌어서, 어떤 생각에 맞춰 말씀드려야 할지 혼란스럽다. (일동 웃음) 제 생각이 어떤 식으로 변화되었는지 편하게 말씀드려 보겠다. 1980~90년대에 통일운동을 열심히 할 때는 여기서 말하는 선통일 후민주 입장이었다. 한국사회 민주화도 분단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완성되기 어렵다는 관점으로, 이른바 NL 내에서도 NL주사파의 시각이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민주화와 통일은 서로 독립된 문제였던 것 같다. 분단이 민주화의 진전을 크게 방해할 것으로 보았지만, 그러나 결국 한국 민주화가 계속 발전되어온 것을 보면 역시나 독립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화문제는 사실 저야 그 당시 이태호 위원장과 같은 입장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통일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피해가는 것으로 보았다. 평화가 우선이라는 주장 자체는 반대할 이유가 없지만, 노선 대립이 되었을 때 통일과 평화 중 무엇을 더 중시하냐는 차이가 있었다.

통일과 무관하게 분단 상황 하에서 안정적인 평화공존이 가능한가는 여전히 논쟁 지점이다. 통일이 되면 적어도 남북 간에 있어서의 평화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분단 고착화 흐름도 강해지는 정세를 볼 때, 분단체제에서의 평화공존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김창수
장준하 선생은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말씀하셨다.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말씀하신 건 아니겠지만, 이게 결국 선통일론이다. 문익환 목사님은 “통일이 민주고 민주가 통일이다”라고 시인다운 절충형 표현을 하셨다. 저는 문 목사님 말씀에 가까운 입장에 있었다. 통일운동의 활성화를 통해 민주주의도 발전시켜야 하고, 민주주의를 완성하려면 남북관계도 발전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통일과 평화의 함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로 가는 과정과 수단이 평화여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의 이유는 평화의 완전한 실현이다. 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서는 1단계 교류협력, 2단계 남북연합, 3단계 통일의 단계를 제시한다. 1, 2단계의 교류협력과 남북연합이 평화공존이고, 이것이 통일의 초기단계다.

자연스레 90년대 중후반으로 넘어와 북한동포돕기운동과 함께 북한인권 문제가 제기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북한동포돕기운동

홍진표
저는 북한 체제에 대해 우호적 생각을 가지고 통일운동을 시작했다가, 1990년대 중반에 비판적으로 바뀐 경우다. 저만의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같이 활동했던 주사파 지하조직이었던 민혁당 성원 중 일부가 생각을 같이했다. 그 중심에는 김영환 씨가 있었다. 그러면서 국내외 여론을 통해 북한 인권 개선 압력을 가하고, 북한 내의 반체제 활동가들을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접근했었다.

제가 북한에 우호적일 때는 북한 정권이 통일을 100프로 원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남에 의한 흡수통일만 아니면, 꼭 북한이 전체적으로 주도하는 통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극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북한의 큰 격차로 인해 한국의 흡수통일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북한은 통일에 대해 소극적이 되었다. 그래서 북한 정권의 교체가 있어야만 통일이 될 것이란 판단을 하게 되었다.

참고로 강성 주사파 쪽은 북한돕기운동을 반대했고, 민족회의는 적극적으로 했다. 그 안에서도 분화가 있었다.

이태호
통일운동이 ‘통일하자’는 구호보다 한반도 전체 변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문제를 던진 것이 사회운동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선민주 후통일이라고 했지만 진짜 문제는 한반도 변혁이다. 통일은 상황의 산물이 될 것이니, 통일 방안 같은 것에 목 맬 필요가 없다. 양측을 변화시키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환영이다.
저는 개량주의자다. 이라크 전쟁의 경험에서, 어디가 우월하고 어디를 민주화한다는 발상이 결국 민주화를 못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았다. 충격적 방식으로 분단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통일과 급격한 변화에도 회의가 생겼다. 오히려 평화라는 입장에서 갈등을 해결하고 인권을 증진시키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또 서로 싸운 사람 간의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탈군사주의 해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동맹과 전쟁에 반대하기도 하고, 주변국 간 안보공동체와 평화공동체를 만드는 운동을 병행했다. 예외주의를 가지고 정권과 권력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힘을 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변혁운동이다.

김창수
저 역시도 1990년대 중반에 변화를 겪었다. 북한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신비주의에 빠졌다가 1990년대 초중반 이후에 탈북자들이 등장하면서 북한 실상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북한에 수재가 났을 때 너무 자연스럽게 북한동포돕기운동을 할 수 있었다. 민족회의는 1997년부터 한겨레신문과 같이 북한돕기운동을 큰 캠페인으로 벌였다. 북한 체제가 가난하고 어렵다는 것을 부각시킨다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북한 체제에 어려움과 문제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공감이 있어서 가능했고, 이게 국내 통일운동 측면에서 본다면 통일운동의 생활화와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 북한인권운동이나 탈군사화를 통해 양쪽 권력 힘 빼기로 나가지 않았던 흐름은, 이 위원장님 측과 미세한 차이가 있다.

이태호
탈냉전 이후 남한과 중국, 남한과 러시아는 수교를 맺었는데, 북한은 아직도 미국과 수교를 맺지 못했다. 그렇다고 북한이 망하지도 않았다. 평화 관점에서 보면 2000년 6월부터 11월까지가 굉장히 중요하다. 북한과 수교를 맺지 않은 미국과, 남북관계의 당사자인 남한이 서로 평화라는 측면에서 정책적 아귀가 유일하게 맞았던 때였다. 당시 6·15선언으로 북미 관계가 활성화되었고, 울브라이트가 방북했고, 북미공동선언도 발표됐다. 냉전 이후 한반도 문제가 크게 개선될 기회였는데 그 기회를 놓쳤다. 그 후 이라크 전쟁이 나고 테러와의 전쟁 사태와, 제2차 북핵위기가 오면서 그런 문제들을 뒷수습하느라 힘들었다. DJ와 노무현도 한미동맹, 세계적인 전쟁 위기, 북한 군사주의, 남한 군사주의 등의 덫에 걸려 큰 성과를 내지 못했던 것 같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9년을 보면 북한인권에 대해 말할 때 한반도 인권이라는 식으로 자성적인 언어를 쓰는 게 아니라, 타자화시키고 북한을 지질한 체제로 묘사하는 담론이 형성됐다. 남한 정치를 왜곡하는 데 북한을 동원한 것이다. 북한인권운동을 하려던 분들의 의지도 곡해되어 남한 정치를 흔드는 기제로 작동하면서 한 줌도 안 되는 평화는 더더욱 위축되었다.

통일운동의 현재 모습

김창수
6·15선언 이후 상황에 대한 말씀을 하시니 저도 떠오르는 일들이 있다. 2001년 6·15선언 1주년을 맞아 남북 공동으로 다양한 축하행사를 열었다. 그해 8월에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한에서 330명 정도가 평양을 방문했는데, 그때 제가 실무를 맡았다. 당시 통일운동 진영이 행사를 치를 만큼의 축적된 경험과 역량이 없어 온갖 대형사고가 쏟아졌다. 2000~2002년 간은 사고도 많이 치고 불안하게 남북 민간교류가 진행됐던 시기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성과는 남북의 자율적 힘에 의해 서로가 만났다는 것이다. 북한은 처음엔 문을 조금 여는 것에도 주저하다가, 경각심이 낮아지고 의심이 풀리면서 접촉면이 넓어졌다. 그러나 요즘은 남북 교류나 평화운동 쪽은 어디서 명함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활동이 적다. 통일운동의 현재는 어떤 모습인가.

홍진표
북핵문제는 돌이켜보면 YS 때부터 지금까지 남북관계의 중심 이슈다. 북한 정권 입장에서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사태 등을 보며, 핵을 일종의 자기들의 생명선처럼 여길 것이기 때문에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북의 비핵화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직시한 상태에서 접근해야 한다.

김정은 집권이후 근래 북한의 변화도 살펴야한다. 저야 북한민주화를 위해 반체제 투쟁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김정은 정권의 지속가능성 때문에라도 통일은 장기간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이 주도하는 통일에서 북한에 상당한 자치권을 보장하는 통일국가 운영방안으로서 연방제를 지지한다. 그러나 연방제 수준의 독자성을 부여하더라도 북한에서 ‘우리를 왜 차별하나?, 왜 더 지원을 안 해주나’하는 불만이 누적되어 독립운동 같은 것이 나타나 재분단으로 나갈 수도 있다. 통일은 생각할수록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로 다가온다. 그래서 요즘은 통일이 과연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고 있다.

이태호
거듭 강조하지만 저는 북핵, 북한인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한반도 인권이고 한반도 핵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핵은 동북아 전후 체제의 문제이며 국제핵군축 레짐 해체의 문제다. 그런데 중동에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팔레스타인으로 몰고 거기서부터 자기 이해관계나 포지션을 도출하는 것처럼, 동북아의 모든 문제를 북한이라고 하는 쓰레기장에 다 던져놓는 것이 문제다. 북한 때문에 한·미·일 동맹도 하고, 북한 때문에 ‘동북아 나토’도 만들고, 북한 때문에 중국은 도련선(island chain) 이야기를 하는 등, 모든 것을 북한 문제로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이다. 한국의 인권운동, 평화운동, 통일운동이 조금 더 시야를 넓게 갖고, 조금 더 보편적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민족주의라는 경계를 넘어서는 것도 큰 주제다. 솔직히 한국에 북핵 반대운동은 있지만 핵무기 반대운동은 없지 않나. 이는 북핵 문제를 푸는 데 담론적 장애가 되고 불공정함을 초래한다. 인권도 인권 자체를 말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북한인권운동이 힘을 얻을 때 왜 남한인권운동은 위축되어야 하나.

김창수
이태호 위원장님이 개인 이력을 이야기하다가 결국 귀착된 곳이 탈군사화와 권력의 힘 빼기다. 본인 스스로 개량주의자라 했는데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래디컬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은폐시키기 위해 개량주의자라 하시는 것 아니냐.(일동 웃음)

이태호
저는 그런 불일치가 많은 사람이다. 남북한 교류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말했지만, 오히려 저는 북한과의 대화를 계속해오고 있다. 천안함 직후부터 지금까지 매년 북한의 민간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김창수
제 생각도 정리해 보겠다. 첫째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어떻게 할 거냐의 문제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텐데, 우리는 폐기를 목표로 해야 하는 딜레마가 있다. 미국에서는 벌써부터 “핵은 인정하고 미사일은 포기시켜야 한다”느니 온갖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대한 전략이 전혀 없다.
두 번째로 김정은 체제 문제이다. 3대세습에 성공한 김정은은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하고 이복형 김정남을 암살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정일보다 김정은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정서적 거부감이 큰 것 같은데, 김정은 체제는 비교적 안정적이다. 이 또한 난제다.
남북한의 두 나무를 연리지처럼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경제와 생활상의 교류다. 현실적으로 할 만한 사람도 없고 상황도 아니지만, 상황이 좋아지면 그런 접근을 해야 할 것이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통일운동 30년의 흐름과 맥락을 잘 짚어주셨다. 서로 비슷하고도 다른 지점에서 운동을 해왔지만, 2017년 현재 시점에서는 비슷한 지점이 더 많아졌다는 것을 확인한 유익한 좌담이었다. 오늘 참석해주신 두 분과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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