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6월항쟁`의 중심지 부평
인천 '6월항쟁'의 중심지 부평
글 한종수
부평은 조선시대만 해도 인천과는 다른 고을이었고, 독자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경인선의 개통과 일제의 강점은 부평의 역사를 인천에 속하게 만들었다. 원래는 더 큰 고을이었던 동래와 회덕이 부산과 대전에 속하게 된 것과 같은 사례였다. 어쨌든 부평은 서울과 가깝고, 평탄한 지형이라 잠재력이 큰 땅이었다. 이 때문인지 중일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37년, 조선총독부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도시의 재편을 목표로 ‘인천 시가지 계획’을 발표한다. 당시 인천의 계획인구를 20만 명으로 상정하여, 상업, 공업, 주거지로 구분, 통제 가능한 도시를 만들려 했던 이 계획의 완성년도는 놀랍게도 ‘1964년’이었다. 같은해에 일본군에 필요한 군용차를 조립하는 공장이 세워졌다. 이를 계기로 경성모터스, 중앙모터스, 대동모터스 등 자동차 서비스 공장이 부평에 들어선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자동차 도시 부평의 시작이었다.
2년 후 1939년, 부평에는 ‘조병창’으로 불리운 일본육군의 병기창이 들어섰다. 현재 부평의 동아, 대림, 욱일 아파트와 산곡동의 미군부대, 현대아파트 단지 일대에 광범위하게 들어선 조병창은 해방이 될 때까지 소총, 탄약, 포탄, 차량 등이 제작됐는데, 그 주변에 하청업체들이 줄지어 자리를 잡게 되면서 부평은 하나의 거대한 군수공업도시로 변신하였다. 참고로 한국전쟁 발발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이 이 곳 공장장 출신이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이 일대에는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기도 했으며, 징용을 면제받았던 공장 종사자들이 주변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조병창 주변에는 판자촌이 형성되어, 해방 후까지 계속 이어졌다. 침략을 위한 무기를 제작하고 있는 공장이었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몰려있는 까닭에 조병창은 항일운동가들의 주요한 거점이 되기도 했다. 1943년 3월 5일, 황장연이라는 인물이 조병창 내에서 ‘고려재건당’이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해 임시정부 연락원에게 권총 3정과 탄환 50발을 전달하다 적발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창천체육회’라는 비밀조직의 회장이었던 오순환은 무기조작기술을 획득할 목적으로 조병창에 위장 입사, 활동을 벌이다 일경에게 체포되기도 했다. 당시 조병창에는 1∼3공장이 있었는데, 3공장은 대장간으로 주로 군인들이 사용하는 총검이나 군도 등을 제작했다. 1944년 당시 조병창은 연간 소형선박 250척, 무전기 200대, 소총 4천정, 포탄 3만발, 차량 200대를 생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부평은 조병창의 존재 때문에 인천상륙 작전 이후 미 해병대의 목표가 되기도 했고, 최근까지도 미군기지가 남아 있었다. 부평의 자동차 산업은 새나라, 신진, 대우로 계속 이어져 왔고, 1985년 4월, 한국 노동운동사의 기념비적인 사건인 대우자동차 파업 투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이 파업은 YH나 동일방직, 원풍모방 등 기존의 여성 노동자 중심의 사업장과는 달리 남성 중심 중공업 부문에서 일어난 최초의 조직적인 파업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노동자 대표로서 김우중 회장과 단독협상을 벌였던 동국대 출신의 위장취업자이자 용접공이었던 홍영표는 현재 부평을 지역구로 세 번 내리 당선된 현역 국회의원이다. 이런 전통으로 부평은 인천 원도심과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 인천지역 공동대책위원회가 주최한 궐기대회가 오후 6시, 부평역 광장에서 열렸다. 애국가와 함께 택시기사들의 경적이 울려퍼지면서 ‘장기집권 획책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라는 대형플래카드를 앞세운 수천명의 시위대가 광장과 거리를 메웠다. 경찰들과 충돌이 벌어졌지만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도 시위대에 박수를 보내고, 상점 주인들은 빵과 음료수, 휴지를 건네고, 쫓기는 참가자를 숨겨 주는 등 사실상 시위대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인하대생 1천여명도 교내 출정식 후 부평역까지 진출하여 힘을 보탰다. 이후 매일 시민과 노동자, 학생들은 대학교 부근, 성당과 교회, 동인천역과 부평역 등 거의 인천 시내 전역에서 시위를 벌리며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투쟁을 이어나갔다.
인천 지역 6월 항쟁의 하이라이트는 ‘6월 18일, 최루탄 추방 전국대회’였고, 그 무대는 부평역 광장이었다. 오후6시 만 명이 넘는 시민과 학생, 노동자들이 모여 토론회를 가졌고, 11시 40분 경에는 전두환 화형식을 열었다. 정오 이후에 시위대가 1만 5천명으로 불어나자 두려움을 느낀 경찰은 최루탄 발사는 물론 백골단을 대거 투입하여 해산에 나섰는데 ‘부평만행사건’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무차별적인 폭력과 연행의 연속이었다. 새벽 5시까지 계속된 이 ‘작전’으로 무려 700명이 넘는 시민, 학생, 노동자가 연행되었는데 인하대생만도 219명에 달했다고 한다. 일부 시위대는 인근 철마산으로 올라가 산줄기를 타고 아침에 청천동과 효성동 파출소를 공격하고 아침이 되어서야 귀가했을 정도였다.
이후 인하대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는 부평역 광장에서 규탄대회를 열려 했지만 계속 경찰의 원천봉쇄로 저지되었다. 26일에야 범시민 평화대행진을 부평역광장에서 열었고 결국 충돌이 벌어졌지만 대우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 시위대는 경찰버스에 연행된 사람들까지 구출할 정도로 강력한 투쟁의지를 보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사흘 후 노태우가 6.29선언을 하면서 장대했던 6월 항쟁은 막을 내렸다.
부평역 광장은 이렇게 6월 10일과 18일, 26일 인천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세 집회의 무대였지만 별다른 기념시설이 없었다. 지난 6월 10일에야 6월 민주항쟁 30주년 인천조직위원회는 부평역 쉼터광장에서 ‘6월의 꽃, 촛불로 타오르다’라는 주제로 ‘6월 민주항쟁 30주년 인천 시민대회’를 열고 기념 표석을 설치했다. 그 표석에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1987년 6월 인천에 울려 퍼졌던 그 때, 그 자리, 그 사람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외침을 기억합니다"란 글이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