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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평화연합’(APU) 상상 프로젝트의 출범, ‘1955년 반둥’을 넘어

‘아시아평화연합’(APU) 상상 프로젝트의 출범, ‘1955년 반둥’을 넘어

박은홍(성공회대 대학원 아시아비정부기구학전공 교수)

성공회대 대학원 아시아비정부기구학 전공(MAINS, 이하 메인즈)은 지난 8월 26일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에서 열린 2017년 한국동남아학회 연례학술대회에서 Asian Peace Union(APU) as a Realistic Utopian Project란 주제의 라운드테이블 세션을 성황리에 마쳤다. 이 날 발표자로는 국내에서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박은홍 메인즈 주임교수, 김희정 메인즈 재학생, 해외에서는 Walden Bello 미국 뉴욕주립대 교수, Ekapant Pindavanija 태국 마히돈대학 교수, 백태웅 미국 하와이대 교수 등이 참여하였다. 이에 앞서 조효제, 박은홍 성공회대 교수와 해외에서 초청된 교수진은 메인즈 학생들을 대상으로 ‘아시아평화연합’(이하 APU)과 관련된 주제 특강을 진행했다. 이번 ‘APU 상상프로젝트’의 출범은 2013년에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을 비롯한 몇몇 ‘긴급조치 9호’ 수형자들과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기금’ 마련 협약을 체결한 아름대운재단의 지원으로 개최되었기에 인권과 함께 가는 평화에 대한 토론이 더욱 의미 있었다.

‘아시아평화연합’(APU) 프로젝트의 현실가능성
이번 학술회의와 특강을 통해 APU 프로젝트는 유토피아적 성격의 프로젝트이지만 현실 가능한 내재적 힘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류의 역사가 인류의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듯이, APU 프로젝트도 제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국제적 수준에서 국가 간 연대를 꿈꾸었던 것은 제1차 대전이 끝나고 조직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었지만 국가중심주의의 벽을 넘지 못했고, 2차대전이 끝나고 조직된 국제연합(UN) 역시 국익우선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평화라는 의미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천명한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심지어 프로레타리아트 국제주의까지 중-소 갈등에서 볼 수 있었듯이 국가주의의 종속변수였을 뿐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자아(ego)를 제거하면 더 이상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처럼 국가중심주의는 국가를 국가답게 하는 본질인 양 간주되었다. 중요한 것은 일국 내에서 인간이 서로 상생하는 시민사회를 조직해냈고, 이들 시민사회는 다시 국제적으로 서로가 상생할 수 있는 국가 간 연합을 견인해왔다는 점이다. 특히 국가 간 평화 실현을 위해서는 각 국가 내 민주적 공화주의의 도입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이마누엘 칸트(I. Kant)의 ‘영구평화론’은 시민사회가 국가중심주의를 압박하는 중요한 철학적 논거가 되었다.

‘반둥’을 넘어, 국가주의에 포획된 평화 개념에 대한 도전
그렇다면 왜 아시아인가? 아시아는 식민주의, 빈곤, 독재 등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고, 이 중에서도 특히 식민주의 경험에서 연유되었다고 볼 수 있는 국가주권 제일주의는 인민주권 혹은 개인주권을 무시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때 평화 담론은 국가주권 제일주의를 정당화하는데 활용되었다. 이를테면 혹독한 탄압을 일삼았던 버마의 군사평의회 명칭이 국가평화발전위원회(SPDC)였고, 현재 태국에서 군정체제를 이끌고 있는 군사평의회 명칭 역시 국가평화질서회의(NCPO)이다.

흥미로운 것은 비동맹회의(Non-Aligned Movement)의 모태가 된 1955년에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Asian-African Conference)에서도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를 기치로 한 세계평화와 협력의 추진에 관한 《반둥 10 원칙》이 선포되었는데, 이때 참여한 국가들 대부분이 인민주권 혹은 개인주권을 무시하는 반민주, 반인권 국가로 낙인찍혔다는 점이다. 비동맹회의의 지도 그룹에 속하는 중국에서 장기 수감 중이던 노벨 평화상 수상자 류사오보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것 역시 1955년 반둥정신의 한계를 보여준다.

동남아시아에서도 2007년에 인권개선, 민주주의 증진, 좋은 지배구조(good governance)의 정착, 법치주의 실현 등을 명문화한 아세안 헌장이 채택되었지만 필리핀에서 비사법적 처형을 일삼는 두테르테 정부의 출범, 태국에서의 군정체제의 부활과 표현의 자유의 실종, 버마 아웅산 수지 민주정부 하에서 오히려 악화되고 있는 로힝야 인권문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동남아시아에서의 인권개선은 답보상태이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상태가 회원국내 인권문제에 눈을 감는 불간섭주의와 연관이 깊다는 점이다.

이렇듯 많은 한계를 안고 있는 아세안이지만 회원국들이 모여 평화와 인권증진에 합의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이러한 변화가 아세안 시민사회의 성장의 결과이기도 하다면 아세안을 토대로 아세안+3(한, 중, 일)이 지역 내 평화-인권 레짐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로 구성된 동아시아 내 시민사회 간 교류확대, 그리고 시민사회연대 트랙의 정부 간 협력 트랙에 대한 지속적인 영향력 행사가 필수일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를 토대로 APU의 미래를 전망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아시아평화연합(APU), 한반도 평화정착 프로젝트의 미래
첫 번째로, 동아시아에서는 역사적, 상황적 특수성의 산물인 주권, 개발, 안보 중심의 논의가 여전히 지배적이며 국가 중심주의사고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부 간 동아시아 평화-인권 공동체 논의 과정에 국가주의를 넘어 보편적 가치로서의 공공선을 추구하는 시민사회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두 번째로 동아시아는 체제, 역사, 문화, 민족, 국력 등의 차이로 인해 하나의 정체성을 이끌어 내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질성은 동아시아에서 평화-인권 레짐의 역사가 어째서 전무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영토분쟁, 테러, 이주노동자, 난민, 환경오염 등과 같은 지리적 인접성에 따른 상호 연관된 문제에 봉착하면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인간안보, 생태계 보존 등과 같은 의제를 공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세 번째로, 동북아시아를 보자면 일본의 경우 지역 단위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시민사회조직들이 있지만 국가주의를 견제할 만큼의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하다. 중국의 경우 시민사회조직의 수가 늘어나고 있고 그 활동 범위도 넓어지고 있지만 국가주의의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활력 있는 시민사회를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촛불 시민혁명’을 통한 신정부의 탄생은 한국 시민사회의 역량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아시아에서 한국 시민사회와 정부에 거는 기대도 크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은 아시아 시민사회 지도자 교류와 차세대 활동가 양성에 보다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이는 시민사회 네트워크 강화를 통한 지역 차원에서의 민주적 거버넌스 구축과 인적 자본, 사회적 자본 강화를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노력은 장기적 맥락에서 국가주권 제일주의, 인권 없는 평화, 다시 말해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를 청산하고 동아시아, 나아가 아시아 전반에 평화-인권 레짐으로서의 APU를 현실화하는 경로(pathway)를 만들어가는 괴정이 될 것이다. 나아가 1955년 반둥회의 정신을 넘어서 극단적 국가주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북한을 APU 트랙으로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지를 공동으로 논의하고 지혜를 모으는 한반도 평화정착 프로젝트의 성격도 지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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