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이 낳은 언론투사 송건호
옥천이 낳은 언론투사 송건호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한 마디로 집안일에는 무심하셨죠. 100점 만점에 10점 정도일 거예요. 본인 월급이 얼만지도 몰랐고, 돈에 대해서는 거의 무감각하셨어요. 85년도쯤 서울 역촌동에 살적에 비가 굉장히 많이 왔는데, 지하실 서고에 물이 찼었죠. 그런데 제가 길가다 다쳤던 때보다 몇 배나 놀라셔서 아침 7시에 친구들을 난데없이 다 부르라는 거예요. 4명 정도가 왔는데, 12시간 정도 물 빼는 일을 했죠. 일을 끝나고 나니까 설렁탕 사먹으라고 10만원을 주시는 거예요. 그 당시 설렁탕 값이 1천원 밖에 안됐거든요. 한 두시간 등산을 하고 나서 들른 곳이 바로 역촌초등학교 앞의 고서점이었죠. 그 서점에 들어설 때 아버지는 굉장히 행복한 모습이었어요. 몰입해서 책을 찾고, 여러 책을 구입했죠. 무슨 서점이 아침 8시부터 문을 여는지 그 서점이 원망스러웠어요. 매우 배가 고팠었거든요.”
송건호의 차남 송재용씨의 회고이다. 돈보다 책이 더 중요한 천생 글쟁이였지만 시대 상황 때문에 언론투사로 살아야 했던 송건호. 그는 1926년 충북 옥천군 군북면 비야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1953년 대한통신사 기자 공채에 합격하면서 언론인의 길로 들어선다. <조선일보> 외신부, <한국일보>와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1972년 그는 10년 동안 살았던 흑석동 집을 정리하고 역촌동으로 이사했다. 아마도 인근에 기자촌이 들었기 때문일 것인데, 200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집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신문기자로서는 최고의 자리인 <동아일보> 편집국장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역촌동 시절은 끝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편집국장이 된 바로 그 해, 동아일보 기자들은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였고, 12월 10일부터는 그 유명한 광고탄압이 시작되었다. 동교동 자택에 연금되어 있던 김대중을 시작으로 한국현대사의 전설인 자발적 격려광고가 밀려들었지만 신문 경영진은 정권에 굴복하였고 그는 편집국장직을 사임했다. 이후 그는 번역과 집필로 겨우 생계를 이어나갔지만 한국현대사를 연구하며 유신정권에 대한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1980년 5월,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는 5월 17일 0시,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여 그들에 반대할 만한 인사들을 모조리 얽어매었는데 송건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피신하기는 했지만 과년한 딸이 넷이나 사는 역촌동 집에 구둣발로 들어와 장롱을 마구 뒤졌다. 송건호 역시 사흘 만에 잡혀 광화문 보안사,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갔다. 반 년 만에 풀려나긴 했지만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레서 그는 1982년부터 오랜 동지이자 가까운 불광동에 사는 이웃이기도 한 이호철의 권유로 ‘거시기 산악회’에 참가했다.
일요일이면 빠지지 않고 이들과 산에 올랐다. 회원들은 전부 박정희ㆍ전두환 정권에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거나 직장에서 쫓겨나 할 일이 없는 ‘낭인’들이었다. 이돈명 변호사ㆍ리영희 교수, 백낙청 교수ㆍ박현채 경제학자ㆍ변형윤 교수ㆍ정치인 김상현ㆍ다산연구가 박석무ㆍ출판인 윤형두ㆍ등이었다. 여름에는 아침 7시, 겨울에는 9시 이렇게 매 일요일마다 10여 명이 등산을 했다. 이날 하루는 즐거운 날이다. 등산이란 건강에도 좋을 뿐 아니라 심리적 발산처로서도 더 없이 좋았다. 일주일 내내 집안에 박혀 있으며 답답증도 생기고 마음이 우울해지기도 하나, 이날 하루 동안 웃고 떠들면 답답했던 가슴 속이 한결 후련해진다. 일요일 등산은 몸의 건강 이상으로 심리생활의 활력소 구실을 한 것이다. 그들의 등산은 산행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동병상련의 처지가 비슷했고, 안으로만 삭일 수 없는 분노를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좋았던 것이다. 송건호는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 증후군이 나타나기 시작한 1990년까지 일요등산은 거의 빠지지 않았다.
http://archives.kdemo.or.kr/isad/view/00700384
1984년에는 해직언론인협의회 회원들이 중심이 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의장이 되고, 기관지로 <말>을 창간했다. <말>의 첫 근거지는 묘하게도 한겨레 신문이 들어설 만리동 고개 아래쪽 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국민을 주주로 한 새 신문 창간 운동이 일어났고 송건호는 자연스럽게 대표자 역할을 하면서 창간에 발 벗고 나섰다. 새신문의 이름은 <한겨레신문>이었고, 2만 7223명으로부터 50억원이 모였다. 1987년 12월 한겨레신문주식회사 창립총회가 열리고 송건호는 대표이사가 되었다. 다음 해 2월에는 첫 신입사원 공채시험을 열었는데, 수습기자 23명, 사원 10명을 뽑는데 무려 8052명이 응시했을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그리고 5월 15일 창간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그는 13년 만에 언론현장으로 돌아왔고, 1991년 12월에는 한겨레 신문 사옥이 마포구 공덕동 만리재 중턱에 들어섰다. 하지만 신문의 특성상 대기업 광고가 많이 들어오지 않았고 만성 적자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결국 1993년 7월, 대표이사 라는 무거운 직책을 내려놓고 사회적으로는 자유인이 되었지만, 고문후유증이 그의 몸을 자유롭게 해주지 않았다. 운명을 예감한 그는 담담하게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1996년 9월, 소장 도서 1만 5천 여권을 한겨레신문에 기증하여, 자신의 호를 딴 청암문고가 탄생했다. 그 문고는 13년 후 국회도서관으로 옮겨져 ‘송건호 문고’로 재탄생 하였다.
말년의 그는 상복이 많았다. 심산상을 비롯하여 호암상 언론상, 한국언론상 본상, 정일형 자유민주상 그리고 금관문화훈장까지 받았다. 하지만 이 상들이 병을 치료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2001년 12월 21일 그는 역촌동 자택에서 영면에 들었고 망월동 국립묘지에 묻혔다. 유언 중에는 미쳐 완성하지 못한 원고에 대한 고료 200만원을 돌려주라는 부탁도 있었다고 한다. 유족들은 그의 유산을 출연하여 송건호 언론상을 만들었는데, 수상자 중에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위르겐 힌츠페터, 손석희 jTBC 보도부문 사장, 고인이 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도 있다. 청암 인생의 3분의 1 이상을 보낸 역촌동 자택은 사라졌고, 한겨레 신문 본사 로비에는 흉상이 서있다.
작년 12월, 옥천군에서 생가 앞에 기념비를 세웠지만 아직은 청암에 대한 사진 하나 전시되어 있지 않다. 아쉽긴 하지만 3.5km 입구부터 안내판이 있는 등 나름대로 노력은 하는 듯 싶다. 이제 시작이니 다음에는 더 환경이 좋아 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묵념을 한 다음 현장을 떠났다. 청암의 고향답게 옥천은 인구가 3만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옥천신문>이 15명의 직원을 고용할 정도로 지역언론이 활성화되어 있고, 언론개혁 운동이 활발한 곳이다.
이번 촛불혁명은 저널리즘의 승리이기도 했다. 청암이 살아있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오는 12월 21일은 벌써 16주기를 맞이하는 그의 기일이다.
<송 건 호>
1926년 충북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에서 출생1940년 경성 한성사립상업학교에 입학
1948년 서울대 법대 진학
1953년 서울대 복교, 대한통신사 외신부 기자
1953년 이정순 여사와 결혼
1961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1965년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취임
1972년 남북적십자사 자문위원으로 평양 방문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취임
1975년 언론 탄압에 항의, 편집국장 사임
1977년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출간
1978년 『씨알의 소리』편집위원
1979년 『한국현대 사론』 『현실과 이성』 출간
1980년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 서대문구치소에 수감
1982년 ‘거시기산악회’에 참가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의장에 선임
1987년 새 신문 창간발기위원장에 취임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초대 사장 및 회장 역임
1990년 파킨슨증후군 나타나기 시작
1996년 소장 도서를 한겨레신문에 기증, ‘청암문고’ 개설
1999년 ‘20세기 최고 언론인’으로 선정
1994~2001년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파킨슨증후군으로 8년 동안 투병생활
2001년 12월 21일 영면. 5.18국립묘지에 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