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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라는 빅브라더


대한민국이라는 빅브라더

강성호 역사학자 / justbookshop@hanmail.net


기습시위의 정보가 세어나가 경찰이 원천봉쇄한 가운데 홀로 구호를 외치는 성유보 민통련 사무처장 /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역사의 전진이 존재한다면, 그건 양심의 선구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신이 몸담은 조직의 비리를 폭로한 양심선언자들이야말로 그렇습니다. 재벌들의 위법 행위를 눈감은 감사원의 비밀을 밝힌 이문옥(1990)과 군의 선거 부정을 폭로한 이지문(1992), 그리고 관권 선거를 고발한 한준수(1992). 자신이 몸담은 곳의 문제점을 드러낸 이들이 1990년대 초반에 많은 이유는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 시대로 막 진입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터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 불의에 맞서는 이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겁니다.  

국군보안사령부(일명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알린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도 마찬가지입니다. 1990년 10월 5일, 보안사에서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은 보안사의 사찰 대상 목록이 담긴 디스크를 들고 탈영해 그 목록을 공개했습니다. 여기에는 정치계와 노동계, 그리고 종교계 등에 대한 사찰 기록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태우 정권 퇴진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보안사는 국군기무사령부(일명 기무사)로 이름을 바꾸고 그 역할이 축소되었습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는 전체주의 체제에서 한 개인이 이에 저항하다 파멸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전체주의의 폐해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때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독재자인 ‘빅브라더’는 권력의 감시를 상징하는 존재로 70년이 지난 지금 일반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인 푸코는 감옥 속에서 죄수들에게 행해지는 감시와 통제가 사회적으로 확산됨으로써 근대적 감시사회가 등장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푸코는 이러한 사회를 팝옵티콘(Panopticon) 사회라고 지칭했습니다. 비극적인 사실은 한국 근현대사도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근대적 감시체제가 한국 근현대사라는 질곡 속에서 형성되었고,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식민권력의 요시찰명부

근대적 감시체제는 일제의 감시를 통해 선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크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사찰(査察)과 특정 인물을 일정기간 동안 주기적으로 감시하는 요시찰(要視察)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찰은 일본에서 근대 경찰이 성립하면서부터 일반 주민들을 감시․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요시찰의 경우 사회주의 운동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면서 등장했습니다. 요시찰 제도의 골격은 1910년대 초반에 만들어졌다가 1920년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요시찰 대상이 점차 재일조선인이나 외국인 등으로 확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일제의 강점 이후 조선에서 ‘병합’에 반대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요시찰이 행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일제는 1916년 7월 1일 내무성훈 제618호로 「요시찰조선인시찰내규」라는 걸 제정하여 감시 대상을 갑호와 을호로 나누었습니다. 여기서 갑호는 배일사상이 투철하고 배일단체의 지도자에 해당되며, 을호는 배일사상을 갖고 있거나 혐의가 있는 자로 구분했습니다. 이들에 대한 조사 항목은 매우 자세했습니다. 이름, 생년월일, 본적, 주소 등 기본적인 사항뿐만 아니라 인상 및 특징, 소속, 친교 있는 사람 등도 기재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감시 대상의 사진과 필적까지 수집했으며, 요시찰인 명부에 변동이 발생했을 경우 명부 등본을 첨부하여 조선총독부에 보고해야 했습니다. 예컨대, 1919년 2․8독립선언서를 작성했던 이광수에 대한 요시찰명부를 보면, 일제의 감시가 매우 촘촘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광수는 ‘치열한 배일사상을 고집하고 항상 국권회복의 음모를 계획하려는 자’로 갑호 요시찰인에 해당되었는데, 여기에는 그가 처와 이혼 수속 중이라는 사실과 일본 술을 좋아하지만 술버릇은 없다는 사항까지 일일이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일제는 치안유지법(1925)과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1936), 그리고 조선사상범예비구금령(1941)을 통해 주요 인물들을 감시하고 처치할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일제의 감시체제는 오늘날 독립 운동가들의 면모를 알 수 있는 자료를 남겼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인터넷으로 서비스하고 있는 ‘일제감시대상인물신상카드’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일제가 감시 대상으로 삼은 인물들의 신상 카드를 6,264건이나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카드에는 감시 대상 인물의 사진과 아울러 출생일, 출생지, 주소지, 신장 등 기본적인 신상 정보와 각종 활동 기록, 검거 기록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제가 작성한 자료이기 때문에 사료 비판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한국 근대사를 연구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감시의 일상화 

통치 기술로써의 감시는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특히, 군사독재 시절 정보과 형사들은 정치적 반대 세력이나 반정부 인사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의 민간인 사찰은 크게 2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데, 하나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일반사찰’과 특정인물 또는 단체를 대상으로 한 ‘요시찰’입니다. 일제의 감시체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946년 1월에 조직된 사찰계는 정보경찰의 등장을 알렸습니다. 정보경찰의 권한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후방에서 빨치산 소탕과 색출을 담당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다 자유당 말기에 이를수록 야당 탄압과 부정선거에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4월 혁명 이후에는 사찰과가 정보과로 개편되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해방 후 경찰은 일제의 요시찰 제도를 일부 수정․보완하여 운영했다는 사실입니다. 한 예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53년에는 부역자 등을 『요시인 명부』를 통해 관리해왔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감시 대상들을 ‘특수요시찰인’과 ‘보통요시찰인’으로 나누었으며, 1956년에 이르러서 요시찰인 분류가 특, 갑, 을로 정형화되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대표적인 민간인 사찰로는 진보당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진보당 사건이란 두 번의 대통령 선거를 통해 이승만의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한 조봉암을 제거한 공안사건을 가리킵니다. 이때 조봉암과 함께 사형을 당한 양이섭이 육군 첩보부(HID)와 특무대의 감시를 지속적으로 받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식민지 시절 조봉암과 함께 활동했던 동지로서 해방 후 남북교역 상인으로 활동한 인물입니다. 그러다 진보당 사건이 발생하자 조봉암과의 친교를 빌미로 수사당국의 조사를 받았고, 결국 간첩 혐의로 죽게 된 것이죠. 주목할 점은 그가 HID측 교역 상인으로서 북한을 왕래했을 때만 해도 조봉암과의 만남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HID와 특무대의 미행감시를 통해 파악되고 있었습니다.

감시의 일상화는 ‘블랙리스트’를 통해 지속되었습니다. 블랙리스트란 정부기관에서 감시가 필요한 인물들을 선별하여 이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작성된 명단입니다. 블랙리스트는 중앙정보부, 보안대, 경찰 등 권력기관의 주도와 기업의 협력으로 작성되어 노동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소위 ‘요시찰 명부의 현대판’이라고 할 수 있죠. 블랙리스트가 세상에 드러난 계기는 1978년 동일방직 사건이었습니다. 동일방직의 여성 노동자들은 1970년대 후반에 남성 중심의 어용노동조합에 맞서 민주노조를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똥물 세례를 받는가하면, 집단해고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126명의 동일방직 해고자 명단이 각 사업장에 배포되었는데, 이에 양심의 가책을 받은 한 노조 분회장의 폭로로 블랙리스트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동일방직 해고자 명단이 기록된 블랙리스트는 1980년대에 확대 및 재생산되었습니다. 블랙리스트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당국은 “블랙리스트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했지만, 1980년대 초반 노동부가 해고 노동자 명단을 배포하고 안기부가 이들의 동향을 감시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블랙리스트를 통한 노동통제와 감시가 본격화된 겁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들은 취업거부를 당했습니다. 어렵게 취업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갖은 구실로 해고를 당했습니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블랙리스트가 명백히 확인된 계기는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자료입니다. 문제는 민간인 사찰이 최근까지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명박 정권 때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사찰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국정원은 MBC 직원을 사칭해 사찰하다 탄로가 났고, 기무사는 쌍용차 파업 노동자와 진보정당에 대한 사찰을 일삼았습니다.  

문제는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인권을 침해한 이들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쉽지 않았던 것이죠. 민간인 사찰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한 헌법 제17조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인권 침해의 주체가 국가라는 점에서 명백히 국가범죄이기도 하고요. 민간인 사찰은 식민지 유산이자 군사독재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정보기관이 자행했던 행태가 그대로 반복될 수 있었던 이유는 민간인 사찰의 주체들이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공기관이 인권을 침해할 경우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정보기관이 수집한 자료는 일정기간이 지날 경우 예외 없이 공개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알 권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죠. 국가권력의 남용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지 않는 한 민주주의란 우리에게 요원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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