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나이테를 만들어가는 문화비축기지
시대의 나이테를 만들어가는 문화비축기지
박한나 작가 / hanna_p@naver.com
문화비축기지 ⓒ 문화비축기지 제공
산업화가 한창이던 1980-90년대 급증한 쓰레기는 난지도로 모였다. 상암동은 매립장에서 발생되는 악취와 공해 때문에 살기 힘든 곳이 됐다. 난지도를 수놓았던 동식물은 사라졌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만 남았다. 쓰레기 매립으로 인한 환경오염과 2차 피해가 점점 심각해지자 1993년 쓰레기 매립은 중단되고 안정화 사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월드컵을 계기로 공원을 조성하면서 죽음의 땅으로 불리던 난지도는 도심 속 자연 쉼터로 탈바꿈했다. 매립지 위에 만들어진 월드컵공원은 랜드마크가 되었고 복원 사업은 좋은 사례로 남았다.
‘땅으로부터 읽어낸 시간’
난지도쓰레기매립장이 만들어질 무렵, 근처 매봉산 자락에도 무언가가 묻혔다. 바로 석유 탱크다. 1차 석유 파동으로 서민 생활과 경제에 어려움이 닥치자 안정적인 석유 공급을 위해 1976~1978년에 6,908만 리터의 석유를 비축할 수 있는 탱크 5기를 짓고 보안을 위해 매몰한 것이다. 산업화의 동력이었던 석유 자원과 산업화의 부산물인 폐기물이 상암동 일대에 함께 묻혔던 셈이다.
하지만 석유비축기지는 건설할 때부터 1급 보안시설로 지정되어 시민의 접근이 차단됐기 때문에 2000년 폐쇄 시까지 대중은 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매립 중단 이후 바로 복원에 들어갔던 난지도와 달리 석유비축기지는 폐쇄 후 10년 이상 방치되었다. 이에 서울시는 2013년 석유비축기지 활용 아이디어 공모전을 열어 시민 의견에 따라 복합문화공간으로의 변신을 확정하고, 2014년 국제 현상 설계 공모 당선작 ‘땅으로부터 읽어 낸 시간’을 바탕으로 새로운 건축이 아닌 재생 방식으로 공간 조성에 돌입했다.
시작은 흙을 파내 땅 속에 묻힌 탱크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석유비축기지의 설계도면이 없어 실측을 통해 도면을 작성해야 했다. 건축 작업보다는 잠들어 있는 산업화 시기의 유물 발굴에 가까웠다. 다행히 과거 도면을 찾아냈지만 작업이 쉬워지진 않았다. 대부분의 탱크가 암반 위에 있어 공사가 어려웠다. 더구나 설계 원칙은 발굴한 탱크를 최대한 보존하는 것이었다. 기존 건축물을 부수지 않고 재생‧재활용하는 작업은 더 섬세하고 까다로웠다. 작업하던 시공사가 여럿 포기를 선언했다. 그럼에도 원칙을 고수했다. 공간을 설계한 허서구 건축가의 말처럼 “원형을 존중해 최소한의 건축적 개입을 통해 공간의 용도를 바꾸고 공간의 잠재력이 드러나게 하는 데 주안”([空間사람]석유에서 문화로 ‘문화비축기지’, )을 뒀기 때문이다.
문화비축기지 전경 ⓒ 문화비축기지 제공
이렇게 4년 동안 땀과 정성을 쏟은 결과, 2017년 9월 석유를 담던 탱크가 문화를 담는 공간 ‘문화비축기지’로 재탄생했다. T4와 T5는 탱크 형태를 최대한 살려 문화‧전시 공간으로 변신하고, T3는 석유비축기지 시절을 살필 수 있도록 유류저장탱크 그대로 보존됐다. T1과 T2는 전체 또는 일부를 해체해 커뮤니케이션 공간과 공연장으로 만들어졌다. 유일하게 신축한 T6는 T1과 T2에서 해체한 철판을 재활용해 커뮤니티센터가 되었다. 산업사회를 상징하던 공간이 산업화의 나이테를 도려내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쓰임새는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최근 문화비축기지는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2018 한국건축문화대상에서 사회공공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시민으로부터 읽어낸 공간
문화비축기지는 공간 조성뿐만이 아니라 운영에도 초기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시민 운영과 참여다. 말로만 시민을 앞세우고 실제로는 들러리 세우는 생색내기가 아니다. 문화비축기지는 조성 단계부터 시민주도형 도시재생 프로세스를 적용했고, 현재도 협치위원회를 구성해 시민주도 협치형 공원 운영을 하고 있다. 서울시와 민간전문가 17명으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기지 운영 관련 기획‧자문‧결정 등을 협치로 실행하는 것이다.
시민 문화기획자, 문화 큐레이터, 자원활동가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시민이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수행할 수도 있다. 기지 내 공원시설과 자연환경을 이용해 진행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공모해 선발되면 기획한 시민에게 직접 프로그램 운영을 맡긴다. 실제로 올해 열린 ‘생태생활문화프로그램’, ‘모두의 시장’, ‘개원1주년행사’ 등의 행사 모두 시민 기획단이 참여하고 주도했다.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기」에서는 시민들이 여성운동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서관 견학과 연계 수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3월부터 매달 주제를 정해 도서관 소장 자료를 전시하는 자료 컬렉션도 그 중 하나다. 7월에 열린 ‘처음 만나는 페미니즘’ 컬렉션은 큰 인기를 끌어 위치만 옮겨 현재까지도 전시되고 있다.
문화비축기지가 지키고 있는 다른 원칙은 친환경적 운영이다. 기존 건축물을 재생하고 재활용하여 매봉산 자락과 어우러지게 공간을 만든 것처럼 지속적으로 생태친화적으로 관리되고 이다. 우선 기지의 냉난방은 지열로 조절한다. 전기도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 친환경 발전을 시도하고 있다. 또 마켓이나 축제, 공연 등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리는 모든 행사에서는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는다. 음식을 먹으려면 보증금을 내고 그릇을 빌려 먹어야 한다. 먹고 난 뒤에는 설거지를 해서 반납하면 보증금을 돌려받는다. 행사가 없을 때에도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텀블러를 대여해 준다. 텀블러는 기지 내 카페와 음수대에서 자유롭게 사용하고 반납하면 된다. 음식물 쓰레기는 잘 삭혀 퇴비로 만든다. 텀블러나 그릇 대여를 번거로워 하는 시민들도 있지만 그 의미와 가치에 공감해 대부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문화비축기지에서 무대행사가 열리는 모습 ⓒ 문화비축기지 제공
원형을 간직한 기지의 탱크들이 산업화의 나이테라면 1년 남짓 쌓인 문화비축기지의 시간은 민주적이고 친환경적인 새로운 나이테를 만들고 있다. 문화비축기지 이태원 주무관은 “문화비축기지는 단순한 문화시설을 넘어 석유와 건설로 대표되는 산업화시대에서 친환경과 재생으로 넘어가는 미래로 도약하는 상징적인 공간이 되고자 한다.”며 이를 위해 “시민들이 문화비축기지를 생태 친화적이며 창의적인 방식으로 공유하고 사용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번 주말 이 주무관의 말처럼 문화비축기지를 찾아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새 시대의 나이테를 직접 새겨나가면 어떨까. 기지를 한 바퀴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문화적‧자연적 힘이 생겨나 한 주동안 지친 마음을 달래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