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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통치권 요원한 이라크의 민주화

 


원론적으로 말해서 민주화란 국민과 민중이 주인 되는 것, 즉 폭력 수단을 독점한 국가(state)로부터 사회(국민과 민중)가 자유와 평등권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유와 평등권이 주어졌을 때 주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갖추게 된다. 또한 인류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 한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권력 분립의 제도화를 통해 민주주의를 공고하게 해왔다. 오늘날의 민주화란 최소한의 생존권, 즉 의식주 문제의 해결까지 국가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런데 이슬람을 국교로 하고 있고 종교생활과 정치생활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은 이슬람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신권(神權)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 군주와 대통령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알라로부터 부여받은 통치권을 자신이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정당화시키고 있고, 다수 국민들은 이를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밑으로부터의 민주화운동은 매우 미미한 편이고 중동, 아랍, 이슬람 사회에서 성공한 민주화운동 사례는 아직까지 없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초부터 1990년대까지 남부 유럽, 라틴 아메리카, 중앙 아메리카, 아시아, 소련과 동유럽이 정치변동을 통한 민주화와 정치발전을 경험했다. 이제 중동지역의 민주화와 정치발전으로의 정치변동 여부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라크에서도 여러 차례의 정치변동이 있었으나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혁명은 달성하지 못한 상태이다.

여러 단층선이 그어져 있는 모자이크 사회

이라크는 내외적으로 여러 단층선이 그어져 있는 모자이크 사회이다. 이라크는 이슬람 사회이기 때문에 유럽의 기독교 문화와 단층선이 형성되어 있고, 아랍 국가이기 때문에 주변 이스라엘, 이란, 터키와 단층선이 형성되어 있다. 같은 아랍 이슬람 국가인 쿠웨이트를 침공함으로써 주변의 다른 아랍 국가들과도 단층선이 형성되었다. 이라크 내부는 갈등과 심지어 적대적일 정도로 골이 깊은 단층선이 형성되어 있다.
사담 후세인은 수 십 년 동안 바그다드를 꼭짓점으로 하는 수니 삼각지대 아랍인들을 중심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확대·강화해 왔다. 남부의 시아 아랍인과 북부의 수니 쿠르드인들은 그만큼 소외되었고, 심지어 수 천 명의 쿠르드인들은 생화학 무기로 살해되기도 했다.
2003년 이라크 전 이후, 미국의 이라크 안정화 정책이 혼란을 겪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적대적 관계에 있는 세 정파간 갈등을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라크에는 오랜 기간 동안 사회조직 형태였던 부족과 부족주의 문화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1천 여 개의 부족 간에도 크고 작은 수많은 단층선이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모자이크 사회에서 민주화운동 단체는 조직하기 힘들며, 조직된다 해도 민주적 사회로의 정치변동을 유인할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타 정파의 탄압으로부터 자신이 속한 정파의 해방, 자신이 속한 정파의 이익 극대화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다. 실제로 이라크에서 민주화운동 단체가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민주화 지체요인이 되고 있는 이라크 정치문화

이라크 사회가 수많은 단층선이 그어져 있는 모자이크 사회이기 때문에 그만큼 시민사회의 정치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급격한 도시화로 시민사회가 형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정체성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아직 참여형 정치문화는 형성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라크에는 상호 관련되어 있는 세 개의 문화, 즉 이슬람 문화, 부족주의 문화, 권위주의 문화가 존재한다. 이슬람(문화)과 민주주의 간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슬람은 민주화를 저해하는 요인인가, 아니면 기독교나 유대교처럼 민주화와 양립할 수 있는가? 버나드 레위스(Bernard Lewis)에 의하면 코란을 해석하고 반포할 권리를 가졌던 중세 울라마(이슬람 법학자)들은 ‘불의한 통치자일지라도 통치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이 신민의 종교적 의무였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와 서구 전통에 있었던 국가와 종교 간의 분리 원칙과 세속주의가 이슬람 사회에는 없었다는 주장이다. 엘 케두리(Elie Kedourie)도 이슬람 전통에서 “‘입헌주의와 국민의 대표에 의한 정부’라는 사상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고 “이슬람, 아랍의 정치 전통과 민주주의가 조화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이먼 머든(Samon Murden), 문명충돌론을 주장한 미국 내 네오콘으로 분류되는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등 많은 서구 학자들은 이슬람과 이슬람적인 사고가 민주발전에 장애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엘-마누피(El-Manoufi), 찰머스 갬빌(Chalmers Gambill) 같은 학자들은 이슬람이 정치발전의 장애요소도 아니며 촉진요소도 아닌 중립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M. 스티븐 피쉬(M. Steven Fish)는 이슬람과 민주주의 간의 상관관계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극히 미미한 수준이며, 이슬람 국가들이 비이슬람 국가에 비해 덜 세속적이며 정치적인 폭력의 정도가 더 높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라크는 정교일치의 이슬람을 국교로 하고 있고 국민의 95% 이상이 무슬림이다. 무슬림은 ‘복종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슬람 법인 샤리아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다. 이슬람 사고는 유전자처럼 종교 생활뿐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생활 전반에 뿌리박혀 있다. 이라크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이슬람 국가에서는 일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들이 무함마드와 정통 칼리프 시대(622~660년)의 종교공동체였던 움마공동체 건설, 즉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 건설을 궁극적 목표로 설정하고 투쟁하고 있다. 이란의 ‘신정체제(神政體制)’를 이상국가로 상정하고 모방하려고 한다. 이슬람 문화의 특성으로 보아 이라크의 민주화 가능성은 있지만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이라크에서는 부족주의 문화가 민주화에 지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968년 7월 정권을 잡은 바아스당은 커뮤니케 1(Communique No.1)에서 “식민주의의 잔재인 종교적 종파주의, 인종주의, 부족주의(al-qabiliyya)에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부족장과 부족주의를 사회분열의 배경이고 ‘생산관계의 발전’을 지체시키며 사회적 반동의 전형이라고 간주하여 폐기하려고 했다. 부족주의는 잠시 사라지는 듯 했다. 민주화로 일보 전진할 수 있는 기회였다. 종파주의와 부족주의를 청산의 대상으로 보고 세속정권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8년에 정권을 잡은 이후 반민주적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해 오던 사담 후세인은 1991년 이후부터 다시 부족의 국가화와 국가의 부족화(State-ization of the Tribe and Tribalization of State) 정책을 통해 자신을 ‘부족장들의 부족장(shaykh al-mashaikh)’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부족 규범을 국가 규범 안으로 흡수했던 것이다. 다시 봉건주의 시대의 권위주의 문화가 사회 곳곳에 침투했다. 가부장적인 가치, 불신과 기회주의적인 경향, 개인의 역할과 정치경쟁에 대한 잘못된 시각, 종교와 정치의 미 분리와 같은 권위주의 문화에서는 민주주의 꽃이 필 수 없다. 이라크의 이러한 권위주의 정치문화는 민주화의 지체요인으로 작용했다.

 

미국의 자유화 정책, 이라크 민주화 유인하기 힘들 것

미국은 2003년 3월 20일 이라크를 공격하며 그 명분으로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9·11 사건에 이라크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에 불과했다. 아랍인과 많은 세계시민들은 이라크 전쟁을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인식했다. 첫째, 당시 이라크가 타 국가를 공격하지 않았고, 후세인이 알 카에다를 지원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둘째,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이라크는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받아들였다. 셋째, UN안보리 상임이사국 중 프랑스, 러시아, 중국이 즉각적인 군사행동의 필요성을 확신하지 못했고, 동의하지 않았다. 넷째, 반전 여론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른바 ‘의지의 동맹’ 국가인 영국, 터키, 스페인과 일부 동유럽 국가들이 미국의 군사행동을 지지했지만, 이들 국가의 국민들이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다섯째, 이라크 전 종전 이후 ‘전쟁 포로 인권 침해 사건’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미국식 도덕적 절대주의와 인권 존중 사상이 허구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전쟁의 명분과 관련하여 부시 독트린의 기조, 즉 ①9·11 사건과 안보 아젠다의 변화, ②도덕적 절대주의, ③패권적 일방주의, ④공세적 현실주의, ⑤숨은 실리 : 석유와 이스라엘 등에 대해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이라크 전 종전 6개월이 지난 2003년 11월 6일 부시 미 대통령은 중동지역의 개혁과 민주화를 골자로 하는 ‘대중동 구상’을 발표했다. 권위주의적 독재국가와 중세기적인 이슬람 왕정국가들을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지원해 왔던 미국이 이제 와서 민주화를 추진하겠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동안 미국이 중동에서만 민주주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비민주적 정권을 일방적으로 지원해 옴으로써 결국 이 지역의 반미정서와 9·11 슈퍼테러를 부추겼다’는 것이 민주화 프로그램의 배경이다. 부시 정부 내 네오콘들은 ‘중동의 민주화 없이는 테러의 근본 원인을 제거할 수 없다’, ‘9·11 테러범들은 모두 국내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미국에 테러를 감행했다’는 인식에서 ‘중동 국가들의 민주화’를 들고 나온 것이다. 이라크 자유화 정책도 ‘대중동 구상’이라는 대중동 외교정책 기조 하에 실행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이 이라크에서 성공할 것인가?


2004년 4월 팔루자 사건, 아부 그라이브 감옥의 인권 침해 사건을 경험한 이라크인들은 미국을 해방자가 아니라 침략자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라크인들은 지금 민주화가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 미국으로부터의 해방을 더 긴급한 사안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라크의 민주적 정치변동에 대한 몇 가지 전망을 하고 있다. 첫째,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국가의 안정과 응집력을 가능하게 하는 민주주의에 대안적인 것(alternatives to democracy)이 존재한다. 둘째, 이라크는 민주주의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셋째, 이라크 사회는 너무 파편화되어 있어서 결합시킬 수 없다. 이라크가 선거와 같은 표면적인 민주제도를 가진다해도, 실제로 그러한 제도는 다수 시아의 폭정 같은 반자유주의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넷째, 이라크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너무 위험한 것이고, 너무 취약한 정부가 들어설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제도화, 특히 연방형태의 민주주의 제도화는 실패할 것이다.
이라크에서 민주주의의 싹을 틔우기가 어렵고, 밑으로부터의 민주화 혁명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은 그 대안으로 과두정치와 좀 더 온건한 독재정치를 내세운다. 민주주의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좀 더 현실적인 대안으로 이라크 안정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장 많이 제시되는 탈 사담 시대 이라크 정부의 형태는 아프간의 카르자이(Karzai) 정권과 유사한 일종의 국민통합 정부(national unity government)이다. 주요 인종, 종교, 부족, 지리적, 기능적 그룹 모두를 함께 아우르는 연합 과두정부(consociational oligarchy)이다. 주요 그룹을 대표할 수 있고, 최소한 그들의 종교와 여러 인종에 가장 기본적인 이해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민주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상률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정치학 석사), 국제관계학과 졸업(정치학 박사). 현 한국중동학회, 한국국제정치학회, 한국정치학회 회원 및 임원, 한국외국어대학교 연구교수, 세종연구소 객원교수.
저서로는 『현대국제정치의 이해』(공저), 『국제정치의 패러다임과 지역질서』(공저), 『중동정치의 이해 1, 2』(공저)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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