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청년들의 민주화 시위, 그리고 한국
나현필(국제민주연대)
민주주의를 위해 금기에 도전하는 태국 청년들
태국은 한국인들에게 어느 나라보다 친숙한 국가이다. 코로나 19 사태 이전에는 태국 정부가 태국을 방문하는 한국 관광객 수를 삼백만 명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을 정도로 많은 한국인이 태국을 찾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도 많은 태국인 이주노동자들과 유학생 및 관광객들이 한국을 찾고 있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태국인은 2017년도 기준으로 15만 명에 달하며 출신 국가로 보면 중국과 베트남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인적교류의 확대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 태국이 차지해온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위상을 감안할 때, 태국은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남방정책의 핵심 국가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렇듯 한국인들에게 친숙하고 또 중요한 국가이지만, 2014년도에 태국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군부 세력이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한국인들은 그리 많지 않다.
태국 군부는 끊임없이 쿠데타를 통해 정치에 개입해왔다. 태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군부에 정치개입에 저항해온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2001년에 태국의 재벌인 탁신이 집권하고 나서부터는 재벌임에도 불구하고 친 민중적 정책을 내놓은 탁신계 정당들은 선거 때마다 승리하여 태국 기득권 세력을 긴장시켰다. 2006년에 쿠데타로 탁신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치러진 2011년 선거에서도 또다시 탁신의 여동생이 이끄는 탁신계 정당이 승리하자 군부는 2014년 쿠데타 이후에 2019년까지 아예 선거를 실시조차 하지 않았다.
그동안 태국 군부는 헌법을 바꿔서 아예 상원을 군부가 장악하도록 하였다. 총리 후보도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지 않은 사람도 출마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미 집권 세력인 군부가 지명하는 250명의 상원의원이 확보되어 있기 때문에 집권 세력은 500명의 하원 의석 중에서 120석만 확보해도 정권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설사, 탁신계 정당과 같은 야당이 선거(하원 선거)에서 압도적인 의석을 확보하더라도 난관은 또 있다. 바로 태국 헌법재판소이다. 태국 헌법재판소는 여러 차례 정치적인 판결을 통해서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키는 판결을 해왔다. 실제로 2014년에 태국 헌법재판소는 탁신의 여동생인 잉럭 총리의 권한을 정지시켰다. 이렇듯 헌법을 바꿔서 집권 세력에게 유리하게 총리선출 제도를 만들고, 헌법재판소의 개입으로 야당의 집권을 막고, 그마저도 안 되면 군부가 나서서 쿠데타로 정권을 무너뜨리는 불공정하고 편파적인 정치가 계속될 수 있는 배경에는 바로 태국 왕실이 있다.
한국산 물대포로 맞선 태국 정부
군부 쿠데타에 맞서 태국의 학생들이 저항했고, 군부의 후퇴를 이뤄낸 태국 민주화 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역사로 기록되는 1973년 “10월 14일 민주화운동”기념일을 맞이하여 다시 방콕에 모인 수만 명의 시위대에 대해 태국 정부는 물대포로 진압에 나서는 한편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5인 이상의 집회를 금지하였고, 활동가들을 지속해서 체포하였다. 10월 14일 이후에 10월 22일까지 체포된 활동가 등 중에는 왕실 모독죄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2017년에 광주 인권상을 수상한 자투팟씨를 비롯하여 태국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개사해 보급한 노동활동가 소묫씨도 있었다. 그동안의 태국 시위 양상을 보면 정부가 강경 진압을 하고 활동가들을 체포하면 시위가 소강상태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태국의 청년들은 비상사태 선포를 비웃기라도 하듯 거침없이 거리에 모여서 쁘라윳 총리 퇴진과 왕실 개혁, 헌법개정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시위대의 기세에 놀란 쁘라윳 총리는 10월 22일에 비상사태조치를 철회하였다. 그리고 태국 온라인에서는 태국 시위대를 진압하던 살수차가 한국산이라는 증언과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시위대에게 물대포를 쏘던 진압 차량이 한국기업인 지노모터스사가 태국에 수출한 것임이 확인된 것이다. 고 백남기 농민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물대포가 태국 시위진압에 사용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시민사회도 긴급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기자회견에는 고 백남기 농민의 유족인 백도라지씨가 메시지를 보내서 “살상 무기를 수출하는 부끄러운 짓을 당장 멈출 것”을 요구하였다.
경찰의 물대포 세례에 대항하고 있는 가건물 망루의 농성자들 (경향신문 제공, 출처 오픈아카이브)
한국은 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이번 태국 시위에서 한국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한국산 물대포만은 아니었다. 태국은 전 세계적인 케이팝 인기 속에서도 특히 케이팝의 인기가 높은 국가로 손꼽힌다. 이번 태국 시위에 케이팝 팬클럽들이 시위 지지 모금을 해서 무려 1억 원을 모금하였다. 그리고 이중 가장 많은 돈을 모금한 소녀시대 팬클럽은 모금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시위 현장에 나와서 소녀시대의 히트곡인 “다시 만난 세계”와 “GEE”를 부르며 시위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 아이돌로 활동하고 있는 태국 멤버들도 SNS를 통해서 정부의 폭력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높은 케이팝의 인기가 태국 청년들의 시위에서 확인되는 상황에서 한국산 물대포가 태국 청년들을 진압하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서 태국 학생운동가 네티윗은 10월 23일에 진행된 한국 시민단체 기자회견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헌법에 따르면 당국은 평화적 시위자들을 해산하는 데 폭력을 사용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시위대 다수는 18세 이하의 청소년이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수는 K-Pop 팬이기도 합니다) 그날 현장에는 살수차 두 대가 배치됐습니다. 저는 이 살수차가 2012년 ‘지노’라는 한국 기업으로부터 각 2천5백만 바트에 수입된 장비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 메시지를 한국 활동가가 대독할 때, 기자회견에 참여했던 한국 활동가들은 큰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태국 청년들은 한국어로 작성된 호소문을 SNS를 통해 올리면서, 한국 시민들이 태국의 민주화 시위를 지지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또한, 태국 청년들은 10월 14일 집회를 독려하면서, 한국의 87항쟁이 전두환 군부독재를 끝장냈듯이, 태국도 군부독재를 끝장낼 수 있다면서 87항쟁 사진을 배경으로 한 온라인 포스터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10월 25일에는 한국에서도 태국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는 집회가 열렸다. 코로나 19 상황으로 집회 개최가 여의치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와 유학생으로 살아가는 태국 청년들은 마스크를 쓰고 손수 만든 피켓을 들고 쁘라윳 총리의 퇴진과 왕실 개혁을 요구하는 본국의 목소리에 함께 하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개최된 집회에 많은 태국 청년들은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한국의 시민들이 태국의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온라인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태국시위대가 요구한 총리사퇴기한인 10월 25일까지 쁘라윳 총리가 사퇴하지 않자, 태국 시위대는 10월 26일부터 다시 대규모 시위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독일 대사관까지 행진하여 독일 정부에 보내는 서한을 전달했다. 독일 대사관까지 행진한 이유는 태국 국왕이 독일에 머무르면서 호화생활을 즐겼기 때문이다. 이에 독일 외무장관은 태국 정부에 대해 적어도 독일 영토로 간주하는 대사관 내에서 시위대에 대해 진압을 할 경우에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독일 정부가 자국 영토로 간주하는 대사관의 사법관할 문제를 지적한 원론적 입장이라 볼 수 있지만, 외무장관이 “최근 몇 주 동안 이 문제를 주시하고 있다”면서 밝힌 이 입장은 사실상 태국 시위에 대한 지지로 해석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어떤가? 한국 정부는 만약 태국 시위대가 한국산 물대포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는 서한을 한국대사관까지 행진하여 전달했을 때, 이런 입장을 밝힐 수 있을까? 수많은 태국 청년들이 케이팝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민주화 시위에 나서고 있는데도 말이다. 신남방정책의 핵심국가이기 때문에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군인 총리를 인정하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치안 한류라는 이름으로 물대포를 수출하는 것에 대한 성찰과 논의는 필요해 보인다.
태국의 청년들이 한국의 민주주의 성과를 보며 희망을 품고, 한국 노래를 부르며, 한국어로 연대를 호소하는 지금, 한국 사회는 이에 어떻게 응답할지 고민해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케이팝이 인기라는 것을 자랑할 때, 케이팝을 소비하는 전 세계 청년들의 정의로운 외침에 과연 우리 사회는 얼마나 경제적 이익 대신에 그들의 목소리에 함께 할 수 있는지를 준비할 때이다.
10월 25일에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앞 광장에서 열린 집회의 마지막 순서는 재한 태국인들이 태국 민주화 시위의 상징인 영화 헝거 게임에서 나왔던 세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태국국가를 부르는 것이다. 꼭 태국의 청년들이, 태국 시민들이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랜 금기를 깨고 민주주의와 개혁을 위해 나선 태국 청년들의 곁에 한국이 든든한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