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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종단열차를 타고 찾아간 빈목땅굴



한국에 있는 기념관, 기념공간을 비롯하여 해외의 주요 기념관, 박물관, 기념공간을 살펴보는 글을 연재합니다. 국가 폭력, 식민 지배, 전쟁, 독재 등의 체제에 대한 민중의 저항과 투쟁, 인권 등을 주제로 조성된 기념공간과 기념시설을 고찰해보고, 이를 통해 현재 건립 중인 ‘민주인권기념관’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연재되는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웹진-민주주의]에 게시되었던 것으로, 원고 작성이 2016 ~ 2019년에 이루어져 시기나 내용적으로 현시점과 맞지 않는 부분이 다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원고의 논지는 저술자의 관점에 입각한 것임을 밝힙니다.



베트남 종단열차를 타고 찾아간 빈목땅굴

글. 사진 권기봉(작가, 여행가)

북쪽 하노이에서 남쪽 호치민시티까지 1,726km 길이의 어마어마한 노선을 자랑하는 베트남 철도. 평균 57km/h의 속력으로 달리는 일명 ‘통일열차’로 종단하는 데만 34~35시간이 걸린다. 그 긴 기차여행 동안 만난 한 아저씨와 그가 추천해준 ‘갑작스러운 여행지’는 베트남의 어제와 한국의 오늘 가늠해볼 수 있게 해주었다.

# 베트콩에서 철도 노동자로... 위엔 탕 아저씨를 만나다
수도 하노이를 떠나 남쪽을 향해 달리는 017B-725호 열차는 우리네 통일호와 같은 객차만이 아니라 침대칸 객차도 함께 이뤄져 있다. 하루 이상을 달려야 목적지에 닿는 장거리 승객들을 위한 배려다.

하노이에서 호치민시티까지 가야 했던 나는 2등 침대칸을 택했다. 베트남 화폐로 약 3백만 동, 한화로는 약 18만 원 정도다. 두 평 정도 되는 객실 안에 2층으로 된 침대가 마주보고 있고, 늘 뜨거운 찻물이 제공되고 있었다.

“청년, 여기 맥주나 함께 마시지 않겠어요?”

여기저기 객차 내부를 구경하고 다니던 중 근처 칸에 탄 한 아저씨가 맥주를 함께 마시자며 말을 걸어왔다. 런닝셔츠 차림에 남루한 행색이었지만 표정에서만은 더 없이 융숭한 호의가 느껴졌다.

“호치민시티까지 간다고요? 아, 거기까지 간다니 내 젊은 시절 얘기를 안 할 수가 없구먼. 내가 베트콩에 합류한 게 15살 생일 때였소. 전쟁 막바지, 그러니까 1972년에 입대해 전쟁이 끝나는 75년까지 4년 동안 고생 참 많이 했지. 어떻게 해서든 자네가 가려는 호치민시티, 당시에는 호치민시티가 아니라 사이공이라 불렀는데 암튼 거기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말이야.”

1957년생인 위엔 탕 아저씨가 복무한 곳은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가 만나는 접경지대를 따라 남북으로 나있는 이른바 ‘호치민 루트[호치민 트레일]’였다. 호치민 루트는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북베트남군이 남부와 중부 베트남으로 잠입해 작전을 펼치기 위해, 혹은 그곳에서 활동하는 베트콩과 연락을 취하고 병참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연락로이자 수송로였다. 총 길이가 약 500km에 달한다.

“호치민 루트를 오가면서 틈틈이 우리가 타고 있는 이 열차 노선에까지 진출해 작전을 폈지요. 야음을 틈타 빠른 속도로 이동할 때 이용하기도 했지만 주로는 남베트남군이나 미군이 지나가려고 할 때 폭파를 하면서...”

세월이 흐르면서 베트남에서도 전쟁의 흔적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었지만 바로 내 앞에 전쟁의 당사자가 앉아 있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지만 기차여행의 매력이 또한 거기에 있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그의 ‘현재’였다.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베트남이 통일된 이후 자신이 폭파 대상으로 삼았던 철도를 관리하는 베트남 철도국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철도와 관련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철도와 기차의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것도 행운일 테지만, 이왕이면 호치민시티로 바로 가지 말고 중간쯤 있는 꽝찌현에 내려 빈목땅굴에 한 번 가보라고 권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은 전쟁의 상흔을 맞닥뜨릴 수 있을 것이라며.


‘생존을 위한 지하도시’ 빈목땅굴


한반도의 동서를 횡단하는 비무장지대처럼 베트남에도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을 가르는 비무장지대가 있었다. 위엔 탕 아저씨가 꼭 가보라고 추천한 빈목땅굴은 비무장지대의 바로 남쪽 바닷가에 위치해 있었다.

호치민시티 근처에 있는 구찌땅굴이 주로 군인들의 침투를 목적으로 판 것이었다면, 빈목땅굴은 마을 주민들이 실제 거주를 위해 판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규모도 남달랐다. 주민들 스스로 1965년부터 자그마치 3년 동안 지하 3층 구조에 총길이 2km에 달하는 땅굴을 팠다고 하는데, 그 안에 침실이나 화장실은 물론 부엌에 우물까지 갖춰져 있었다. 가히 ‘생존을 위한 지하도시’라고 할 만 했다.

이곳 주민들이 멀쩡한 마을을 놔두고 땅 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한 가지였다. 미군의 가공할 폭격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에게 식량과 무기를 공급하고 있다고 생각해 전쟁 기간 동안만 모두 9,000톤에 달하는 폭탄을 투하한 것이다. 마을 인구가 천3백 명 정도였다고 하니 1인당 7톤이 넘는 폭탄 세례를 받은 셈이다.



다행히 전쟁 기간을 통틀어 땅굴 안에서 목숨을 잃은 주민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땅굴 생활을 하는 동안 17명의 아기가 태어나기도 했다는데, 내가 빈목땅굴을 찾았을 때 안내를 맡아 수고해준 이 역시 그들 중 한 명인 위엔 반 리 씨였다.

1968년에 태어나 이제 40대 중반이 된 위엔 씨는, 그러나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 당시 지하동굴을 강타한 폭탄의 압력 때문에 귀가 먼 나머지 정상 생활을 하기 힘들어 보였다. 채 한 문장의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의사소통 능력이 떨어지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결국 이렇게 여행자들이 주고 가는 몇 푼의 안내비에 의지해 근근이 살아가는 것뿐인 듯했다.


자유의 십자군으로 당당하게 출정?


기차에서 만난 위엔 탕 아저씨가 빈목땅굴 여행을 권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빈목땅굴이나 위엔 반 리 씨의 오늘을 있게 한 데에는 총 32만여 명에 달하는 군인을 파병한 한국에도 책임이 있다. 그것이 위엔 반 리 씨와 함께 걸으며 한 없이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리라.

한국이 공식적으로 인식하는 베트남전쟁은 베트남인들의 그것과 사뭇 다른 면이 있는 듯하다. 베트남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 용산에 자리 잡은 전쟁기념관을 찾았을 때 그 생각은 더욱 확실해졌다. 3층에 있는 ‘해외파병실’을 찾았는데, 그곳에서는 박정희 정권 당시의 베트남 파병에 대해 주로 전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각이 베트남인들의 그것과 달리, 그리고 베트남전을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독립전쟁으로 보는 해외의 일반적인 시각과도 달리 ‘거룩한 반공 전쟁’ 그 자체였다. 심지어 파병의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는 전시물은 “자유의 십자군으로 당당하게 출정함으로써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며, 지극히 기독교 중심적이며 침략자적인 입장에서 기록돼 있었다.

한국군이 왜 거기까지 가서 베트남인들과 싸워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과 ‘라이따이한’ 문제는 도대체 얼마나 되고, 또 참전 국군 장병들의 고엽제 피해 구제와 보상문제는 어떻게 해결되고 있는지 등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주고 있는 전시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두 전직 대통령들이 베트남에 공식적인 사과를 표했지만 전쟁기념관과 같은 공공기관마저도 베트남전 참전을 냉전적 시각으로만 보고 있는 한국의 오늘... 통일열차에서 만난 위엔 탕 아저씨와 빈목땅굴에서 만난 위엔 반 리 씨를 다시 만나게 되면 나는 과연 고개를 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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