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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힘이 지역의 역사가 된 여산성당

지리적 여건에서 받아들인 천주교

전북 익산시에 속해 있는 여산은 면 소재지로 충남 논산과 접해 있다. 내게는 생소한 지명이었으나, 천주교도들에겐 순교성지로 잘 알려져 있다. 천호성지에 이어 전주교구의 제 2의 성지라고 한다.


예로부터 여산은 충남과 전북을 잇는 호남의 첫 관문이어서 사람의 왕래가 잦았고, 같은 이유로 천주교의 전래도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빨랐다. 1866년부터 1871년까지 계속되었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 당시 여산 인근의 산골짜기마다 숨어 지내던 수많은 신도들이 끌려와 처형을 당했다.

 

 

 

 

숲정이, 동헌과 기금터, 옥터, 배다리, 뒷말 치명터 등 여산 전체가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영향 때문인지 지금도 면을 한 바퀴 돌다보면 성당, 교회, 원불교 교당 등이 시야를 벗어나는 법이 없이 들어서 있어 종교적인 색채가 매우 짙은 곳임을 느끼게 한다.

 

우리나라의 여느 시골 면 소재지가 다 그렇듯이 여산면의 중심가도 쇠락한 기운이 느껴지는 작은 마을이었다. 좁은 왕복 2차선 도로를 달려 신협을 끼고 골목으로 올라가니 먼저 옛 여산교회가 보이고, 교회를 끼고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올라가면 바로 여산성당이 나타난다.


문을 들어서면 예전에는 텃밭으로 이용했다는 널찍한 마당이 있고, 그 위쪽으로 본당과 수녀관 등의 건물 서너 채가 가지런하게 들어서 있고, 수녀관 앞마당에는 잘 단장된 정원이 있다.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 단아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는 성당이다. 

지역에서 가톨릭은 신앙이 아니라 현실의 눈

1980년 6월 25일, 이곳에서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테러사건이 일어났다. 신군부의 광주학살이 있은 지 한 달여가 지난 그때, 여산성당의 주임신부로 있던 박창신 신부(66세, 정읍 연지동성당 주임신부)가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한 것이다.


당시 마흔의 젊은 신부였던 그는 가톨릭농민회의 지도신문을 제작하면서 비민주적인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한 사람으로 반정부운동에 동참하고 있었다. 5·18민중항쟁 이후에 열린 농민대회에 참가했던 농민회 총무로부터 광주 소식을 듣고 매우 끔찍하고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천신만고 끝에 광주를 탈출한 김현장(그는 훗날,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체포되었다)이 전주교구를 찾아와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군부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생생하게 증언했다.


이에 전주교구는 급히 사제단 회의를 열어 김현장이 작성한 유인물 10만 장을 제작해 경상도에 일부를 보내고 전주 시내와 충남 일대에 뿌렸다. 이때가 5월 20일경이었으니, 모든 언론이 통제되고 광주 바깥으로 향하는 길목 또한 완전히 차단된 계엄 하에서 전주교구가 배포한 유인물은 광주의 참상을 세상에 알린 첫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원래는 전북에 속해 있던 금산군과 익산군 황하면이 1963년도에 충남으로 편입되었다. 이 황하면에는 여산성당이 관할하는 공소(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작은 예배소)가 6곳이 있었는데, 행정구역과는 별도로 모두 전주교구에 속해 있었다. 전주교구는 교구 내의 모든 성당과 공소를 통해 신도들에게 광주의 상황을 알렸다. 충청도에서 유인물을 뿌리며 신도 외의 일반 시민들에게 알린 것은 여산성당 마전공소에 다니던 여중생 유영희, 현미숙, 김양순이었다.

 

이에 충남계엄사가 발칵 뒤집혀 공소에 있던 유인물을 모두 수거하고 세 명의 여중생을 충남 강경경찰서로 연행했고, 신근리공소의 신도회장이었던 이명구도 대전에 있는 계엄사로 연행되었다. 박창신 신부의 증언에 따르면 이 네 사람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끌려갔다고 한다. 이로써 전주교구에서 유인물을 배포한 것이 충남에서 사건화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이들은 미성년자였거나 혐의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아 큰 탈 없이 풀려날 수 있었다.


이러한 탄압이 전주교구가 관할하는 성당과 공소가 훨씬 많이 있는 전북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것은 전라도 지역의 천주교구가 워낙 강성인 탓에 계엄사에서조차 쉬쉬하며 입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박창신 신부는 그 해 5월 21일부터 약 보름 동안 금마공소, 마전공소, 신근리공소 등 여산성당 내의 모든 공소를 돌며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강론을 펼쳤다. 그 강론이 공소 내의 신도들에게만 조용히 전해졌다면 테러는 면할 수 있었을까. 놀랍게도 박 신부는 외부 확성기까지 설치하고 마을 전체를 향해 강론하였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용기에 자못 놀라워하며 무섭지 않았냐고 물었다.


“아니, 전혀 무섭다거나 두렵다거나 그런 생각은 안 했어. 무서운 걸 몰랐지.”
희끗한 머리칼을 뺀다면 예순 중반을 넘긴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젊어 보이는 반듯한 이목구비와 온화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을 통해 26년 전, 분노와 결기에 찬 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 후 박 신부는 조심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걱정에 조금 몸을 사렸을 뿐 평상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사건이 일어난 당일, 지금은 성당으로 바뀐 금마공소에서 강론을 마치고 여산성당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늘 혼자 버스를 타고 다니던 30리 길인데, 그날만은 혼자 가기가 꺼려져 임을영과 소화숙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고 한다. 당시 학생이었던 임을영과 노동운동가였던 소화숙은 금마공소 신도였다.

 

 

 

 

사제관에서 벌어진 테러사건

세 사람은 사제관 2층에서 수확한 토마토를 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방에서 일하던 아주머니로부터 수상한 그림자가 비친다는 소리를 듣고 임을영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며칠 전에 도둑이 들었던 터라 성당을 살펴보고 단속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박 신부가 잠가두었던 현관문을 여는 순간, 쇠파이프와 칼을 든 청년 다섯 명이 들이닥쳤다. 그 중 네 명은 박 신부를 둘러싸고 칼을 휘두르며 폭행을 했고, 한 명은 임을영을 주방 쪽으로 몰아붙인 채 폭행을 했다. 박 신부는 두 팔을 올려 머리를 감싼 포즈를 취해 보이며 당시 상황을 들려주었다.
“머리만 안 맞았어.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야. 순식간이었는데도 다섯 군데나 칼에 찔리고 피를 엄청 흘렸어. 왼쪽 갈비뼈도 부러졌지.”


2층에 남아 있던 소화숙이 그 소리를 듣고 내려오자 괴한들이 일제히 달아났다고 하니, 집단폭행을 당한 시간은 불과 2~3분, 길어야 5분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여산에서 응급처치를 받은 박 신부는 전북대학교 병원으로 옮겨져 3주 동안 치료를 받고 퇴원했으나, 상처가 악화되다가 1년 뒤에 재발하였다. 하반신 마비까지 와서 석 달 동안 다시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5년 동안은 휠체어와 목발, 지팡이 등에 의지한 채 사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녀관으로 바뀐 사제관은 옛날 모습 그대로다. 원래 수녀관은 외부인에게 개방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인데, 박 신부의 특별 부탁으로 1층 복도까지만 허락을 받고 사진 촬영도 할 수 있었다. 현관문을 들어서면 좁은 복도가 있고 복도 오른편으로는 주방이, 왼편으로는 2층 사제실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있다. 박 신부가 테러를 당한 곳은 현관문 바로 옆 복도였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면 꽉 찰 정도로 좁은 복도에서 그 짧은 시간에 그 만큼의 상처를 입힐 수 있으려면 어지간히 민첩하게 단련된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전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여러 정황증거들을 수집하고 조사한 결과, 박 신부를 공격한 괴한들이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의 공수대원들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박 신부가 금마공소에서 강론할 때 ‘국민을 죽이는 군대는 민족의 군대가 아니다. 공수부대원은 민족의 배신자다. 공수부대원들에게는 집을 세주거나 쌀을 팔지 말라.’고 해 금마 전체가 술렁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7공수여단은 광주에 직접 투입된 부대였기 때문에 이러한 추측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피습 당시, 괴한들이 얼굴을 허옇게 분칠을 하고 스포츠형으로 머리를 짧게 쳤다는 것만 기억할 수 있는 박 신부로서는 그들이 7공수여단 부대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전한다. 어쨌든 그들이 군인인 것만은 틀림없으니, 7공수여단이든 아니든 광주학살을 자행한 신군부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으리라.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져 테러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었으나, 치정에 얽힌 폭행사건으로 의도적으로 조작해 한낱 추문으로 사건의 진상을 덮으려고 했다. 이에 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5·18민중항쟁과 박 신부 테러사건 등 시국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후 12·12 군사쿠데타으로 집권한 신군부 치하에서 진상 규명을 기대하는 것은 새로운 희생자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 하에 수사 중지를 의뢰하게 되었다. 엄혹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미완의 민주화 시대

그러나 그 일로 인해 박 신부와 교회가 받은 상처는 컸다. 1988년 9월, 천주교정의구현 전주교구 사제단은 재조사를 요구하고 끝까지 진상을 밝힐 것을 결의했다. 당시는 여소야대의 정국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의 조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에 박창신 신부 테러사건에 대한 재수사는 언론에 집중 보도되면서 진행되었다. 사제단은 가능한 한 모든 힘과 노력을 기울여 증거자료를 제출하였고, 여소야대의 정국 속에서 진실이 밝혀질 것을 바라마지 않았다. 그러나 진상규명은 차일피일 미루어졌고, 1990년 1월 밀실야합에 의한 3당 합당으로 여대야소의 정국으로 바뀌면서 사건의 진상은 다시 미궁에 빠졌다.


비록 지금까지 가해자가 누구인지, 테러 명령을 내린 상부가 어디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박 신부는 5·18에 의한 피해자로 인정되어 국가유공자로 살아가고 있다.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의문의 사건들이 산재해 있으며, 광주학살의 발포 명령자도 밝혀내지 못한 채 권력 쟁탈로 세월을 보냈으며, 지금도 역시 뻔히 다 아는 ‘가해자’를 국가기관에서 입증하기를 꺼려하는 미완의 민주화 시대임을 누가 모르랴.


어느덧 26년의 세월이 흘렀다. 박창신 신부는 가해자 얘기가 나오자 체념과 용서가 묘하게 뒤섞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반백의 머리 위로 소슬한 가을비가 몇 방울 떨어져 내렸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알린 역사의 현장인 전주교구 여산성당. 가을 햇살과 가을비를 동시에 맞고 서 있던 그날따라 기품 있게 보이던 여산성당의 모습이 쉬이 잊히지 않는다.
 

 

류외향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1996년 대구 매일신문으로 등단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가 있음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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