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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이끈 울산노동자들의 함성2

 

 


탄압에서 터져 나온 분노의 파도 같은 현대중공업 노조

울산의 노동자들은 1987년 7·8월 대투쟁을 통해 이 사회의 주인임을 선포하였고, 노조를 통해 민주화운동의 한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당한 숱한 고난과 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해고자 사무실에서 야구방망이와 각목으로 구타하고 집기를 부수는 등의 폭력이 벌어졌는데 그 배후에는 현대중공업이 고용한 노조파괴 전문가인 한국계 미국인 제임스 리(한국명 이윤섭)가 있었다. 그는 1987년부터 노동자들이 있는 현장에 나타나 노조 결성을 방해하거나 노조를 좌경 불순세력으로 몰아 폭력을 유도하는 교육을 하기도 했다. 이런 모진 탄압 속에서도 울산의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성장, 발전하였다. 이로 인해 흔히 울산은 ‘노동운동의 메카’로 불리기도 한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1987년 7·8월 대투쟁에 이어 1988년부터 89년까지 2년에 걸쳐 단체협약과 4명의 해고자 복직문제를 둘러싸고 ‘128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89년 3월 30일, 이름하여 ‘울산30작전’, 암구호 ‘아침이슬’, 1만 5천 명의 경찰병력이 육·해·공 3면 입체작전으로 미포만의 새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부터 4월 18일까지 울산 동구에서는 제 2의 광주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매일 투쟁이 벌어졌고, 노동자 가족들은 대책위를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주먹밥을 만들어 주는 등 공동체 정신을 이어나갔다. 투쟁의 초기인 1988년 12월 26일 당시 노무현 국회의원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여러분! 헌법에도 노동3권을 명시해 놓고 다만 방위산업체는 안 된다고 합니다. 입만 열면 안보, 전쟁위협을 하면서 비행기로 3분 거리에 있는 서울에 왜 63빌딩을 짓습니까? 방위산업체 쟁의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은 대한민국 노동운동을 콱 밟아버려라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는 지키지 않아야 합니다. 또 말로만 하지 말고 악법은 국민의 손으로 철폐시켜야 합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이 단체협약에 승리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지만 노동자들의 목을 죄는 모든 악법을 깨부수기 위한 중요한 싸움임을 강조한 것이다. 1989년 4월 18일 현대중공업 노조 지도부는 정상조업 성명서를 발표하고 현장조합원이 지켜보는 현대중공업 정문에서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총 53명의 구속자와 55명의 해고자를 낳은 ‘128일 투쟁’은 현대의 잔인한 테러와 가공할 공권력의 힘 앞에 무참히 짓밟히면서 현대노동자의 가슴 속에 깊은 한을 남기고 그 막을 내렸다. 그러나 ‘128일 투쟁’은 패배하지 않았다. 연이은 선거투쟁에서 민주집행부를 당선시켰고 그 해 8월 10일 구속자 석방과 해고자 복직에 관한 합의서를 쟁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노사관계의 봄날은 잠시였을 뿐 1990년 1월 5대 집행부가 다시 한번 민주집행부로 당선되자 험난한 가시밭길이 놓여 있었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세 번째 투쟁, 일명 ‘외로운 늑대들의 투쟁, 골리앗 투쟁’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횃불을 높이 들고 다시 한번 일어선 것이다.(골리앗은 조선소에서 배를 만들 때 무거운 것을 들 수 있는 크레인을 말하는데 약 800톤 이상을 들 수 있으며 크기도 100미터 가까이 된다. ‘아~아 골리앗이여 서러워 울지 말아라’ 라는 노동가가 있을 정도로 현대중공업 노조의 상징이기도 하다.) 

현대중공업 노조 5대 집행부는 첫 단추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통상적인 이·취임식을 인정하지 않자 근무시간에 강행하는 것과 ‘128일 투쟁’과 관련하여 1심보다 2심에서 구형량을 많이 내린 사법부에 항의하기 위해 전 조합원이 집단 조퇴를 하고 공판에 참석하는 것을 결정한다. 이에 사측은 바로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들을 고소·고발하고 구속하는 신속성을 발휘하였다. 결국 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이 구속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파업투쟁이 벌어졌으며, 비상대책위를 구성하고 4월 25일 총파업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4명의 부위원장들이 일신상의 이유로 위원장 직무대행을 고사하자 당시 사무국장이던 이갑용 씨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 또한 ‘128일 투쟁’으로 옥고를 치뤘고 아직 직무대행을 맡을 만큼 확고한 신념이 부족할 수도 있었을 텐데 “사나이 한평생 이런 순간에 꽁무니를 뺀다는 것이 나의 인생철학에 용납될 수 없다.” 는 투지로 상황을 피하지 않았고 이후 벌어진 골리앗 파업투쟁의 선봉에 나서게 된다.


파업이 시작되자 자본과 정권은 신속하게 대응했다. 파업 3일째인 4월 28일 새벽 5시 미포만 작전이 시행되었다. 파업대오를 둘로 나누어 120명 결사항전의 대오는 드디어 골리앗에 오르고, 야전지도부를 중심으로 가두시위에 나서기로 한다. 그러나 엄청난 탄압과 회유 앞에 투쟁은 오래가지 못하고 시들어져 5월 10일 외로운 골리앗의 전사 51명은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며 계단을 내려와야 했다.

이 투쟁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현장 조합원의 가슴에는 패배의 상처가 깊게 패었고, 이후 현대중공업 노조는 현장의 조직력이 살아나지 못하고 회사의 다양한 노무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긴 어둠 속에서 지내야 했다.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며 민선 2기 울산 동구청장(공무원노조 파업시 징계하지 않은 이유로 직무정지)이었던 이갑용 씨는 당시 세 번의 구속과 네 차례의 해고로 지금은 해고자 신분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과연 19년이 지난 지금 현대중공업 노조는 무엇으로, 어떻게 민주노조의 희망을 만들 것인가?
 

 

 

 

끈질긴 생명력으로
민주노조의 미래를 열어 나가는 현대자동차 노조

현대자동차 노조는 1987년 노조설립 이후 노사 협조주의 세력에게 1대 집행부를 빼앗겼고, 이후 현대중공업 노조가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현대자동차 노조 1대 집행부는 노골적으로 노조 최초의 임금인상을 직권조인으로 하는 등 회사의 품안에서 실리만을 챙기는 말 그대로 어용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현장의 조합원들은 이런 집행부의 행태에 대해 점점 불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2년의 임기를 어영부영 마치고 2대 집행부 선거에서 이상범 씨가 지난 패배를 설욕하고 1차에서 당선되는 쾌거를 이뤘다. 현대자동차 노조 이상범 위원장의 당선은 민주노조 진영의 승리로 받아들여지면서 엄청난 기대와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기대가 큰 만큼 이후 두 번의 실수는 그를 평생 따라다니는 영욕의 매듭이 되어버린다. 하나는 현대중공업 노조의 골리앗 투쟁시 대의원대회에서 결정한 파업을 번복한 일이고, 또 하나는 1990년 임금투쟁에서 해서는 안 되는 ‘직권조인’을 한 것이다. 노동조합운동에서 교섭결과의 승인은 총회이다.

 

물론 100% 만족할 수 있는 안은 없다. 그러기에 오히려 과정과 절차를 거쳐 총회를 통해 문제를 정리하여 그나마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것이 민주노조운동의 기준이었다. 그 자신은 소신껏 했다고 하고, 단식까지 하는 등 입장을 굽히지 않았지만 현장 조합원의 시각은 분명했다. 왜 위원장이 독단적으로 했냐? 라는 것이다.


2대에 이어 3대 집행부도 민주노조의 선명한 활동가인 이헌구 씨가 당선되면서 맥은 이어갔다. 당선되자마자 집행부의 높은 기대를 반영하듯이 연말 성과금 투쟁이 벌어졌고, 집행부는 착실히 쟁의행위를 준비하여 투쟁에 돌입하였으나 초기 집회 때 2만이 넘는 조합원의 열기가 실제 공권력의 침탈을 앞두고 남아있는 수는 5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지도부는 눈물을 머금고 장외투쟁을 선언하고 밖으로 나갔으나 산발적인 투쟁으로 오래 버티지 못하였다. 또 다시 작은 투쟁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울산의 현대노동자들은 비록 패배한 싸움일지라도 지치지 않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잎처럼 생동하는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현대자동차 노조 역시 몇 번의 투쟁을 거치면서 조직력이 무너지는 듯 보였지만 또다시 일어섰다. 1993년 현총련 공동임투는 현대중공업 노조, 현대자동차 노조를 중심으로 현대 계열사 노조 전체가 일치단결하여 김영삼 문민정부의 신 노사관계의 허구에 파열구를 만들었고, 당시 이인제 노동부 장관이 직접 내려올 정도의 급박한 상황을 만들었다. 울산의 현대노동자들은 다시 한번 1987년 대투쟁의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완강하게 버티면서 연대투쟁의 성과들을 낳았다.


그러나 막바지 개별기업이 임단협으로 정리되면서 현대자동차 노조에만 정부가 긴급조정권을 밀어붙이는 상황이 오자 ‘울며 겨자먹기식’의 임단협으로 정리되었고, 현장의 후유증은 크게 나타났다. 결국 이후 선거에서 1대 위원장을 했던 노사 협조주의 세력에게 다시 집행부를 넘겨주는 상황이 되었다.
1993년~95년까지 현장은 쑥대밭이 되었고 현장의 민주화운동을 했던 활동가와 동지들은 회사보다는 집행부와 싸우기 바빴다.  

그러던 중에 고 양봉수 동지의 분신을 계기로 다시 한번 파업투쟁의 기운을 모아 범 민주 세력들이 뭉쳤고, 그 중심에 전직 위원장들이 적극 나서게 되었다. 이때 이상범 씨는 즉각 비상대책위 위원장으로 파업을 진두진휘 하였고 마무리 이후 구속되는 몸이 되었지만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 갈 정도로 여한 없는 투쟁을 하였다. 이후 시의원을 거쳐 울산시 2대 북구청장으로 당선되었지만 이갑용 전 동구청장과 같이 공무원노조와 관련하여 직무정지를 당하였다. 그는 현재 임기를 마치고 현장에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1987년의 정신은 무엇인가?

 

1987년 7·8월 대투쟁을 역사의 현장으로 되돌아보자는 취재 의도의 연락을 받고 1987년 당시의 동지들을 찾아보았다. 어떻게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정리할 수 있을까? 쉬운 문제가 아니지만 고민하다가 이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노조운동도 결국 사람이 사는 문제를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해결하는 만큼, 그 시절을 동지가 했던 모습으로 투영해 보면서 부족하나마 추적하고 정리하는 것이 좋을 듯 하여 대표적인 두 사람을 선정하였다. 소개한 만큼 해석과 평가는 독자들이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내년이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난 지 20년이 된다. 기념행사가 있을 수 있으나 행사보다는 1987년의 정신은 무엇인지, 앞으로 무슨 전망으로 노조운동을 해야 하는지라는 고민과 더불어 그래도 열심히 민주노조운동을 하는 동지들과 함께 노동자가 꿈꾸는 세상을 제대로 그리고 싶다.

 

김호규
1988년에 울산에 내려가 현대정공에 취업하여 현재까지 노동운동을 하고 있으며 현대정공 수석부위원장을 지냈고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금속산업연맹 사무처장을 맡았다. 현재 현대자동차노동조합 교육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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