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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진 세월의 쪽빛 양지, 종로5가 기독교 회관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위치한 기독교회관. 1968년 시공된 이래 한국 현대사의 굵은 물줄기는 늘 이곳을 관통해 흘렀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 그 뒤를 이어 1972년 유신체제의 등장은 한국 현대사의 기나긴 고난을 예고하고 있었다.

 

군사독재정권이라는 그늘진 세월 속에서도 사람들의 억눌린 숨통을 틔어주는 쪽빛 양지를 제공한 곳이 바로 기독교회관과 명동성당이었다. 그래서 그 이름 앞에는 ‘민주화운동의 성지·메카·보루’ 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우뚝 솟아 여전히 지긋한 시선으로 인간사를 내려다보는 기독교회관, 그 건물 틈틈이 새새이 켜켜이 머금고 있는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본다.

 

역사와 함께 숨쉬는 교회

한국 기독교 교회의 사회참여 역사는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항거에서부터 시작된다.

민중들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 가족과 이웃을 넘어서 전 인류애를 실천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 같은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함께 했으며, 1960년대 중반 이후 도입된 ‘해방신학’은 수많은 기독교 사회단체들이 만들어지는데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1970년대 초, 기독교회관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인권위원회·한국기독학생총연합·한국기독청년협의회·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본부 등 현실참여 성향을 지닌 많은 기독교 단체들과 진보성향의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본부·한국기독교장로회여신도회전국연합회 등이 입주하게 된다.

 

그 중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이후 사회선교협의회)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노동·농민·학생·성직자 운동을 총 망라한 연합기구로 1980년대 후반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종교적 이념을 넘어선 연대를 통해 현실의 고통과 함께 하고자 했던 사회선교협의회는 아직 부문별 사회운동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1970~80년대 한국 현실에서 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담당하였다.
“1970년대 사회선교협의회가 여름수련회를 가면 운동권이 다 모이는 겁니다. 그때 해직 기자들(동아투위·조선투위)만 붙으면 이른바 재야세력들이 다 모이는 셈이었죠. 문정현 신부님도 회장을 역임하셨고 당시 웬만한 운동권 인사들 치고 여기(사회선교협의회)를 안 거쳐 가신 분이 없었어요.

 

1980년대 초 ‘반미성명’이 처음 나온 곳도 사회선교협의회였습니다. 민주화운동에 있어서 교두보 같은 역할을 했죠.” (58 임흥기, 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부총무)
 

 

 

 

민주화운동 세력의 집결지

1973년 남산부활절예배사건, 뒤를 이어 1974년 민청학련사건이 일어난다. 민청학련사건으로 180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이 구속되는데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한국기독교회협의회에서는 인권위원회를 발족하였고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이를 계기로 구속자 가족뿐 아니라 대책위원회 활동가들이 이곳 기독교회관을 찾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회관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온 나라를 공포에 떨게 했던 정권도 종교건물에 공권력을 투입하는 것에는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뒤이은 1976년 인혁당사건과 3·1민주구국선언사건을 통해 더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인권위원회를 찾았고, ‘종교’라는 우산 밑으로 들어와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1978년에는 동일방직 노조원들이 생존권 보장을 위한 농성을 이 곳에서 벌이기도 했다. 명실 공히 민주운동세력의 집결지가 되어버린 기독교회관 주변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몰려든다. 동대문경찰서·시경·치안본부·정보사·안기부 등 많은 기관의 사복형사들이 건물 밖에 상주하며 민주화운동과 함께했다.


“유신 시절에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없었어요. 대학교에 경찰이 상주하는 것은 기본이고, 누군가 ‘30초만 떠들어도(외쳐도)’ 잘 떠들었다고 할 정도로 감시가 심한 시절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이 마음 놓고 모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기독교회관 아니면 명동성당이었습니다.

 

명동성당 마당은 민주화운동을 위해 잘 내준 반면 기독교회관은 마당이 없으니까 대신 사무실이나 2층 강당을 아주 요긴하게 쓴 거죠. 구속자 가족 어머니들은 2층 강당에서 열린 기도회에 참석하거나 기장여신도회 사무실에 가서 무거운 마음을 잠시 내려놓기도 했고, 대학생들은 또 자연스레 청년 단체 사무실에 모이게 된 거죠. 여러 대책위들이 단체 사무실에 더불어 생활하게 됐습니다.

 

심지어 해직 교수들이나 해직 기자들도 매일 이곳으로 출근했습니다. 리영희 교수님도 매일 나오셨죠. 마땅히 갈 곳이 없잖아요. 이곳에 모이면 서로 마음에 의지도 되고 여러 정보도 교환하게 되니까요. 그러고 보면 리영희 교수님도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는데 이곳 출입을 하시다가 기독교인이 되신 것 같아요.” (임흥기)

목요기도회와 목요집회

기독교회관을 일반시민에게까지 널리 알리게 한 것은 바로 ‘목요기도회’였다. 목요기도회는 이해동 목사를 비롯한 젊은 목사들의 자생모임으로 1974년 7월에 시작됐다. 독재에 항거하다 구속된 많은 젊은이들과 동료들을 위한 순수기도모임이던 목요기도회는 회를 거듭할수록 민청학련 구속자 가족들이 하나 둘 참여하면서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또한 민주화운동가족실천연합회(이후 민가협)의 모체인 구속자가족협의회가 결성되는 성과를 낳는다. 우리는 매주 목요일이면 탑골공원 앞에서 보라색 수건을 쓴 민가협 어머니들을 만날 수 있다. 민가협에서 주최하는 목요집회는 ‘목요기도회’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목요기도회는 기자들을 통해 일반시민에게까지 그 소식이 알려졌다. 그때부터 구속자 가족·민주화 운동세력 외에 일반시민들이 목요기도회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목요기도회는 종교와 계층과 직업, 세대와 학력을 넘어선 범국민적 집회가 되었다. 목요기도회에 모인 사람들은 한 주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함께 공유했고, 때론 시국 성토의 장이 되고 때론 토론장이 되기도 했다. 기도회를 찾은 사람들은 고난 속에 홀로 서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자신과 함께 하고 있음에 위안을 얻고 서로의 역량을 모아 난세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북돋았다.


처음 목요기도회의 장소는 종로5가 기독교회관의 소회의실(지금은 강당으로 편입됨)이었지만 점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참석하면서 2층 강당으로 옮기게 된다. 강당이 비좁아 복도까지 사람들이 들어차 스피커를 설치해야만 했다. 이해동 목사는 『한국교회 인권선교 20년사』에서 당시 현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목요기도회의 분위기는 매우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것이었다. 거기에는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의 간격이 전혀 의식되지 않고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기독교 신자냐, 비신자냐 하는 구별도 전혀 없었다. 그저 사람이면 되었다. 아픔을 지닌 사람이면 한층 더 가깝게 느껴지고 다정해졌다. -중략- 진한 아픔으로 함께 울기도 하고, 그 아픔을 뚫고 솟는 기쁨으로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목요기도회는 이제 군부독재정권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정권의 탄압은 점점 커져만 갔다. 외압에 의해 기독교회관 측은 강당 대여를 거부했고, ‘이번 주 목요기도회는 쉽니다’라는 광고를 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구속자 가정과 교회를 전전하며 그 명맥을 잇던 목요기도회는 1976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계엄포고령이 내려지면서 끝을 맞게 된다. 하지만 목요기도회는 1980년대 들어 한국기독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재개되었다. ‘박정희’의 망령은 ‘전두환’이라는 새로운 독재자로 부활하여 민주화의 발목을 부여잡았다. 어찌 보면 군부독재가 가장 큰 세력을 떨칠 때 목요기도회가 만들어졌고, 군부독재의 몰락과 함께 목요기도회 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셈이 되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사무실이 기독교회관에 있었습니다. 그때가 기독교회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큰 물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이미 운동판의 폭이 넓어지고 부문운동도 확대된 시점입니다. 구태여 이곳에 모이지 않아도 각 부문별로 독자적인 공간에서의 활동이 가능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기독교회관이 그동안 짊어졌던 짐을 내려놓게 된 셈이죠.” (임흥기)


1970~80년대 이곳에 모였던 이들은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가 다양한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과거의 향수처럼 기독교회관을 이야기하고 때론 그리워한다. 하지만 삶의 끝자락까지 내몰린 이들은 여전히 이곳 기독교회관을 찾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
 

 

시대의 별, 열사 김의기

기독교회관은 수많은 이들의 분노와 고통의 탄식, 절망과 희망, 눈물과 웃음을 품어왔다. 생존을 위해, 민주화를 위해, 인권을 위해, 평화를 위해, 통일을 위해 싸워온 많은 이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왔다.

 

역사와 양심을 위해 싸워온 이들이 공권력의 이빨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 또한 이곳에 서려있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안타까움이 있다.  

 

 

 

 

자신의 작은 몸을 공중에 띄워 한국 현대사의 그늘을 끌어안고자 했던 열사 김의기(서강대 무역학과 재학). 1980년 광주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그는 삼엄한 계엄령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던 대중에게 광주의 투쟁을 알리기 위해 기독교회관 6층에서 자신의 몸을 날린다. ‘동포에게 남기는 글’을 하늘에 뿌리고 자신 또한 하늘에 뿌렸다. 비록 육신은 추락했지만 그의 정신은 시대의 별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삶의 나침반’이 되어 준다. 매년 5월 30일이면 서강대에서는 ‘의기제’가 열린다. 청년 열사의 삶을 통해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고자 하는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 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 잔당들의 악랄한 언론 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김의기, ‘동포에게 남기는 글’ 일부 발췌)

지난달 10일(화) 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는 빈민연대소속 김도균 씨의 ‘대추리진상발표 기자회견’이 있었다. 우리는 문자와 영상을 통해 평택의 아픔을 접한다. 그리고 그것에 함께 공감하고 분노하면서 충분히 내 할 도리는 했다는 안도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기독교회관의 역사 - 사람들이 한데 몰려 덩어리를 이뤘던 그 시대를 돌이켜 보면 현재 우리는 작고 또한 외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살내음을 그리워하는 시절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지홍
격월간 『삶이보이는 창』의 객원기자로 활동했고, 르뽀집 『마지막 공간』에 작가로 참여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극작을 공부하고 있으며 탈춤과 승무북을 배우고 있다.

사진 제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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