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으로 바로가기

d-letter

생명의 반딧불이, 산업재해 피해자 문송면 군

 

 

 

영등포는 우리나라 산업 역사상 초기에 형성된 공업지역으로 이른바 ‘마찌고바’로 불리는 소규모 영세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던 곳이다. 1990년대 들어 많은 공장들이 지방으로 이전을 시작해, 지금은 몇몇 중소 공장들만이 남아있다. 우리가 찾은 양평동 또한 그러한 변화에 예외일 순 없다. 지금은 몇몇 중소 공장들만이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을 뿐 대부분의 지역이 아파트와 상가들로 빼곡하다.


양평동 사거리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선 박석운 씨(52, 당시 고 문송면 산업재해노동자장례위원회 대변인)는 갈림길에서 잠시 멈춰 선다. 세월을 더듬듯 찬찬히 주위를 살핀 후 발걸음을 뗀다. 나도 그 뒤를 따라 걷는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걸었을 그 길, 차를 위한 길은 있어도 사람을 위한 인도 하나 놓여있지 않은 좁은 길, 화학원료가 뿜어내는 시큼한 공기와 기계들이 토해내는 소음 속에서도 희망이라는 단어를 가슴 속에 새기며 어린 노동자 송면이가 걸었던 그 길을, 오늘 우리가 걷는다.

 

불덩이보다 더 뜨거운 분노

1988년 7월, 한여름의 태양보다도 더 뜨거운 불덩이를 사람들에게 안겨준 사건이 있었다. 협성계공에서 일하던 15살 어린 노동자 문송면 군이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양심 있는 시민들의 움직임은 거세지기 시작했다. 노동계·보건의료계·재야 단체와 종교계·정치계에서 노동부와 악덕 기업주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날로 높아져 갔고, 열악한 산업 환경에 대한 사회적 고발이 봇물 터지듯 그렇게 터져 나왔다. 은폐와 왜곡으로 썩어 버린 노동자의 삶에 새살을 틔우려는 노력은 어린 노동자 문송면으로부터 시작됐다.


1987년 12월 5일 중학교 졸업을 앞둔 송면이는 8명의 친구들과 함께 야간공고 진학을 위해 고향인 충남 서산을 떠나 영등포 협성계공에 입사하게 된다. 협성계공은 압력계와 온도계를 생산하는 회사로 당시 60여 명의 사원들이 근무하고 있었고 생산직 노동자들 대부분이 야간학교들 다니는 송면이 또래의 어린 노동자들이었다. 공장에서 신나 작업과 수은 주입작업 등을 하던 송면이는 불면증, 두통, 식욕감퇴 등에 시달리다 입사한지 두 달 하고도 3일 만에 휴직계를 제출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송면이의 단꿈은 불과 두 달 만에 악몽이 되어 그의 삶을 송두리째 찢어놓았다.

 

증상은 있으나 병명은 없다

송면이와 그의 가족들은 수은 중독과 유기용제 중독이라는 올바른 진단을 받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겪게 된다. 처음 송면이를 진찰한 회사 근처 병원에서는 단순한 감기로 처방을 내렸고, 이후에는 엑스레이 촬영을 한 후 물리치료를 하면 된다는 등의 오진을 남발했다.

 

고향에서의 전신발작 이후 한약방, 외과, 고려대 구로병원 등을 전전했지만 이렇다 할 병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가족들은 절망과 함께 산더미처럼 부푼 치료비만을 떠안게 된다.

 

그렇게 이유도 없이 죽어가고 있는 송면이를 안타깝게 바라만 보던 가족들은 마지막으로 서울대학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게 하자고 입을 모은다. 박석운 씨는 서울대학병원 소아과에 입원한 송면이가 박희순 의사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박희순 의사의 가까운 지인 중에 산업재해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이가 있었나 봐요. 평소에 산재에 대해 들어온 터라, 송면이한테 ‘너 어디서 일하다가 이렇게 됐니?’라고 물었다는 군요. 

 

 

 

 

송면이가 수은을 갖고 작업을 했다고 하니까 이 의사가 수은 중독이 아닌가 해서 소변과 피를 받아다가 중금속 검사를 하게 된 거죠. 당시 박희순 씨 빼고 어느 의사도 직업병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못 했어요.”
이렇듯 노동자가 직업병 진단을 받는다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일과 같았다. 군부독재의 비호 속에 경제 발전을 이루던 한국사회에서 직업병이라는 것을 들춰내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다. 이와 관련한 김록호 선생(48, 고 문송면 산업재해노동자장례위원회 대변인으로서 언론에 수은 중독의 의학적인 부분을 알리는 역할을 담당함)의 증언을 들어보자.


“당시만 해도 수은 중독 같은 직업병을 진단할 수 있는 의료계의 능력이 모자랐습니다. 의과대학에서 산업의학을 거의 몇 시간밖에 가르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직업병의 진단을 꺼리는 사회적, 정치적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냉전, 반공사상 때문에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취급되었고, 직업병 진단을 하여 노동자를 도와주는 것은 의료인들에게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사실 진보적 보건의료단체가 연합해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심각한 직업병, 산재 실태를 알리는 계기로 인식되었습니다. 의료계는 당시나 지금이나 전문직의 이해관계에만 관심을 갖는 다수의 보수적인 의료인과 인도주의·인권·환경·국민의료 보장권 등에 관심을 갖는 진보적 소수 의료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사건이 의료계 일반에는 별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없고, 진보적 의료인들에게는 큰 충격을 주면서 진보적 의료인이 적극적으로 예방의학, 산업의학을 공부해서 노동자의 건강권 확보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인식을 준 것 같습니다.”
 

 

  진짜 절망은 이제부터였다

이제 병명을 알았으니 치료할 길이 생겼다고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쥐고 있던 가족들은 더 큰 절벽 앞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병원 박희순 의사의 소개로 구로의원(진보적 의료인들이 만든 산재 전문 병원) 상담실장 김은혜 씨(55, 고 문송면 산업재해노동자장례위원회 총무위원장)를 만나게 되면서 직업병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갖게 된다. 가족들은 직업병 판정을 받기 위해 회사와 노동부를 뛰어다녀야 했다.


하지만 회사와 노동부 그 어느 곳에서도 어린 노동자의 눈앞에 임박한 죽음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다.
회사는 시골 농약이나 음식물에 의한 수은 중독일 수 있다고 오리발을 내밀었고 직업병 요양 신청서에 의도적으로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서울대학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어준 의사를 찾아가 따지고 가족들에게 횡포를 부렸다. 한술 더 떠 노동부는 회사의 의도적 날인 회피에 대해 감시하기 보다는 그것을 이유로 들어 요양신청을 반려했고, 서울대학병원이 산재지정 병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협성 지정 한강성심병원의 진단서를 요구하는 등 산재를 의도적으로 은폐했다.

 

회사와 노동부의 무성의에 가족들은 어떻게든 직장에 의한 수은 중독을 밝혀내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동료들의 피 검사를 요구했지만 어린 친구들은 겁에 질려 선뜻 나서지 못 했고, 송면이의 머리카락을 잘라 과학기술원을 찾아갔지만 그곳에서도 이렇다 할 도움을 받지 못 했다. 가족과의 상담을 맡아온 김혜은 씨는 당시 문송면 가족들이 보여준 헌신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순박하면서도 의연한 가족들의 모습에 정말 많은 감동을 받았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인상 한번 찌푸리는 일 없이 늘 의연했고, 그러면서도 절대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강한 힘을 갖고 있었죠. 정말 건강한 농촌가정의 전형 같았어요. 소처럼 말예요.”

 

산업재해·직업병을 세상에 알리다

김은혜 씨의 소개로 가족들은 시민공익법률상담소에서 노동법 관련 법률 상담을 하는 박석운 씨를 만나게 된다. “문근면이라고 송면이 형을 만났는데, 걔가 눈이 소처럼 크고 순해 빠졌어요.

 

 

  

날 보자 애가 말은 못 하고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는 거야. 얼마나 기가 차고 힘들었겠어. 이제 갓 스물 먹은 어린 앤데…….”
당시를 회상하는 박석운 씨의 눈에 눈물이 번진다.
“얘기를 해보니까 법으로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신문에 내자고 그런 거죠. 그때만 해도 동아일보가 젊은 기자들이 살아 움직이던 시절이었어요. 동아일보 임채청 사회부 기자를 만나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1988년 5월 11일, 동아일보에 문송면 수은 중독에 관한 최초 기사가 실리게 된다. 그때서야 노동부는 가톨릭의대에 부랴부랴 직업병 심사를 의뢰했고, 6월 20일이 되어서야 산재요양 승인서를 받게 된다. 그렇게도 바라던 직업병 판정을 받았음에도 6월 29일 여의도 성모병원 직업병과로 전원한 송면이는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7월 2일 새벽 2시 30분에 사망한다.


“아마 서울대학병원에만 있었어도 송면이는 안 죽었을지 몰라요. 전원하면서 세심한 관리가 안 된 것 같아. 서울대학병원에 있을 때만 해도 송면이가 기자들한테 말도 걸고, 가렵다고 긁어달라는 말도 했다고 해요. 병이 중하긴 했지만 그렇게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서울대에서 꾸준한 관리가 이뤄졌거든요. 우리가 그때 여의도 성심병원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생각도 있었는데, 자칫 투쟁의 방향이 훼손될까봐 그냥 넘어갔어요.” 라며 박석운 씨는 송면이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산재 노동자의 빛이 되어

진상조사단으로 현장 조사에 나섰던 김록호 씨는 참혹한 산업 현장의 목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현장에 가보니 약 3~5평 정도의 폐쇄된 작업장에 난로가 놓여 있고 수은 주입기가 벽 한쪽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송면이가 기숙사에서 텃세를 당해 잠을 그 작업장에서 난로를 펴놓고 잤다고 합니다. 작업장에 수은 방울이 널려 있는데 이 수은이 증발되어 밀폐된 공간에 확산되어 있는데 이 공기를 송면이가 마시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잔 것입니다. 송면이가 이 작업장에서 일하던 한 달 남짓 동안 고농도의 수은에 노출되어 그 중독으로 신경증상이 생겼다고 전후 사정, 주변 정황, 환자 증세 등을 종합하여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한참 부모의 귀여움을 받으며 뛰놀아야 할 15세의 어린 아이가 직업병으로 죽어야 한다니 참으로 참담한 기분이었습니다.”


현장 조사에 이어 진상조사단이 발표한 노동부의 산업재해 의혹은 충격의 연발탄을 쏜 격이었다. 노동부는 협성계공 노동자들 중 6명이 수은과 유기용제에 의해 심한 피해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은폐했다는 관련 문서들을 발굴해 냈다.
1988년 7월 17일 일요일, 여의도 성모병원을 나선 운구차는 협성계공 앞 작은 사거리에 멈췄다. 그곳에서 열린 ‘고 문송면 군 산업재해 노동자장’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한 어린 노동자의 죽음이 산재·직업병 노동자를 구원하는 생명의 빛, 생명의 반딧불이로 부활할 것을 염원했다.


“최초로 직업병이 사회문제화 된 거죠. 그 당시 원진레이온 피해자 가족들이 장례 투쟁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자신들도 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16일 동안의 장례투쟁이 끝나고 바로 원진레이온 투쟁이 진행될 수 있었죠. 결국 원진레이온이라는 본격적인 산재·직업병 투쟁의 불씨가 됐던 것이 문송면사건입니다. 우리가 십 수 년에 걸쳐 전문적인 산재·직업병 전문 의료기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게 원진 재단이 생기면서 가능해졌죠. 오늘의 녹색병원의 씨앗을 틔운 사람이 바로 송면입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협성계공(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ㄱ’자 모양의 3층 벽돌 건물, 예전 그대로이다. 세월에 바란 붉은 벽돌들 때문인가 공장은 완고한 인상을 준다. 다만, 회색 외벽을 따라 조성된 세 뼘 화단이 눈에 띈다. 원추리인지 잔디인지 아니면 그냥 잡초인지, 이름 모를 작은 풀들이 듬성듬성 박힌 초라한 화단이 애달파 보인다.



이지홍
격월간 『삶이보이는 창』의 객원기자로 활동했고, 르뽀집 『마지막 공간』에 작가로 참여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극작을 공부하고 있으며 탈춤과 승무북을 배우고 있다.

사진 황석선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