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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4.3의 역사 2 - 북촌을 가다

 

 

 

 

4·3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북촌’이라는 마을을 4·3과 동일시한다. 그만큼 북촌이라는 마을이 제주4·3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코드가 된다는 것이다. 북촌과 4·3을 연결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다름 아닌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이다. 물론 소설에는 ‘북촌’이 아니라 ‘서촌’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북촌의 원래 명칭은 ‘뒷개’다. 마을의 아래쪽으로 포구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주시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북촌이 있다. 일주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함덕리가 나오는데, 이 함덕리가 4·3 당시 북촌에서 있었던 이른바 ‘북촌대학살’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함덕리에 당시 대대본부가 있었고 북촌 학살에 참여한 군부대가 바로 이 부대이다. 대대본부가 있었던 함덕초등학교는 지금 놀이공원이 되어 그때의 흔적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대학살의 전초가 된 북촌포구

지금은 방파제가 들어서고 포구를 새로이 만들어 옛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북촌에 들르면 우선 포구에 가야 한다. 눈 앞에 섬이 들어온다. ‘달여도’라는 섬이다. 포구 앞에 섬이 있으면 비교적 부촌이라 했다. 왜냐하면 섬과 포구 사이에는 비교적 수심이 낮고 해산물이 많아 넉넉하기 때문이다.


1948년 6월 북촌리 포구로 풍선 한 척이 들어온다. 우도를 출발하여 제주로 향하던 배가 풍랑을 만나 잠시 정박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다. 당시 북촌에는 군경의 검거 선풍이 몰아치던 국면이라 마을의 소년·소녀들은 언덕에 엎드려 깃발을 흔들어 마을에 들어오는 배 또는 사람들을 마을에 알리는 일을 했다. 배가 들어오자 어김없이 깃발이 나부꼈고 마을 사람들은 포구로 향한다. 배 안에는 경찰 두 명이 타고 있었고 결국 경찰은 마을 사람들에게 희생된다. 그렇지 않아도 5·10 선거를 보이콧 당한 경찰은 이를 빌미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선다. 마을 사람들은 남아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처지라 삼삼오오 산으로 오르거나 잠시 집을 피해 마을을 떠난다.


포구 옆에는 ‘등명대’ 라는 비석이 남아있는데 그곳에 등대가 있었다는 흔적이다. 1912년에 세워진 등대이니 꽤 오래된 등대이다. 그런데 이 등대를 유심히 바라보면 군데군데 흠집이 나 있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군경들이 포구에 왔다가 저 비석을 과녁으로 사격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선 인간도 짐승도 그 어떠한 것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연설 들으러 나오라” - 북촌초등학교

1948년 음력 섣달 열 아흐렛날 새벽.
북촌 앞을 지나가던 군용차량이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이 희생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도망간 무장대를 추적하던 군인들은 그들의 노획물 중 차롱에 담겨 있는 따뜻한 밥이 있음을 확인하고 필시 이 마을에서 무장대와 내통하고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바로 북촌대학살의 직접적인 도화선이다. 날이 밝자 마을 어른들은 숙의 끝에 시신을 싣고 함덕에 있는 대대본부로 향한다. 우리 마을 사람들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그러나 대대본부로 간 십여 명의 노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노인을 학살한 군인들은 몇 대의 트럭에 나누어 타고 북촌으로 들어온다. 그날 북촌은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초가지붕을 덮을 집 줄을 짜고 있거나 파도에 실려 올라온 감태나 해초를 주우러 바다에 가 있었다.

 

4,5명씩 조를 지어 골목마다 돌아다니며 군인들은 외친다.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나와야 한다.”
“나오지 않으면 모두 빨갱이다.”


마을 사람들은 엉겁결에 운동장으로 모인다. 병약한 노인들도 가족의 등에 업혀 나온다. 운동장에는 대략 천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줄을 지어 앉아 있다. 군인들은 우선 군경가족들을 한쪽으로 정열하고 나머지는 한쪽으로 몰아세운다.한편 주민들을 운동장으로 내몬 군인들은 마을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조짚에 불을 붙이고 지붕 위로 던진다.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지붕이 타들어가고 서까래가 힘없이 무너진다. 돼지우리에 있던 돼지가 불에 타고 쇠막에 묶여 있던 소가 타 죽는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어 방안에 누워있던 사람들이 아무 대책 없이 불길에 휩싸인다. 포구로 내려온 군인들은 묶어놓았던 배에도 불을 던진다. 배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불길을 피해 바다로 뛰어내렸으나 군인들의 총탄은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마을이 불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동요를 하기 시작한다.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울타리로 오른다. 울타리가 무너진다. 총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총소리에 놀란 마을 사람들이 운동장 구석으로 몸을 피한다. 진눈깨비로 질척거리는 운동장에는 짝을 잃은 고무신들이 수도 없이 나뒹굴고 있다. 운동장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고, 어미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젖먹이가 어미의 젖가슴을 파고든다.


대대장의 차량이 운동장으로 들어오고 차량에서 긴급 간부회의가 열린다. 마을 사람들을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다. 운동장을 돌아가면서 기관총을 걸어 한꺼번에 죽이자는 의견은 총살 경험이 없는 군인들에게 경험을 쌓게 해주어야 한다는 의견에 묻혀 결국 초등학교 옆 ‘당팟’, ‘너분숭이’로 끌려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람들이 수십 명씩 밭 한가운데로 밀려나오자 총소리가 귀를 찢는다. 아비규환이다. 모두 쓰러지면 총소리도 멎는다. 군인들은 다시 밭으로 들어가 시신들을 발로 툭,툭 건드린다. 확인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숨이 붙어있는 사람의 등짝엔 여지없이 총탄이 박힌다.
이렇게 수십 명 단위로 열 번이 넘게 학살이 계속되었다. 죽음과 죽임이 반복되는 동안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옴팡진밭의 유채꽃

당시 학살의 현장인 ‘당팟’으로 간다. ‘당(堂)이 옆에 있는 밭’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늘이 싱그럽게 대를 세우고 있다. 학살 이후 이 밭에 고구마를 심었는데 고구마 알맹이가 어린아이 머리통만 했다 한다. 죽은 사람의 피와 살을 먹고 자란 고구마여서 색깔도 핏빛을 띠어 아무도 먹지 않았다 한다.


‘너분숭이’로 간다. 넓은 바위라는 말이다. 당시 죽어간 어린아이의 무덤들이 이십여 개 눈에 들어온다. 경황이 없던 터라 제대로 묻지도 못하고 대강 가매장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 곳은 원래 소나무 밭이었는데 도로를 확장하면서 공원으로 조성되어 정지작업을 하던 중에 발견하였다.
이제는 4·3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많은 이들이 찾는다. 지난해 제주에서 민족문학인대회가 열렸는데 전국에서 모여든 문인들이 자기 지역의 물과 흙을 들고 와 동백나무를 심으면서 합수 합토제를 지냈는데 그때 심은 동백나무가 바람을 머금고 서 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 보면 미완으로 남아있는 방사탑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에서도 이 탑에 대해 정확한 증언을 하는 이가 없다. 무슨 연유로, 누가 쌓았는지 알 길이 없다. 사실적 근거가 없으면 역사적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 미완의 방사탑에 대해 오승국 제주4·3연구소 사무처장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북촌대학살 이후 마을에서 한 사람이 죽자 마을 사람들은 장례를 치른 다음 빈 상여를 매고 돌아오다가 북촌초등학교에 이른다. 그중 한 사람이 제안을 한다. 4·3 당시에 이곳에서 우리마을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어갔으나 한번도 예를 갖추어 추모를 해보지 못했다.

 

마침 오늘 장례를 맞아 이곳에 왔으니 간단히 제물을 차리고 곡(哭)을 하는 게 어떠냐? 마을 사람 대부분이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누가 마다할 것인가. 한 사람이 울음을 터뜨리자 마치 연쇄반응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울음소리는 학교 울타리를 넘어 파출소에 이르렀고 급기야 경찰이 출동한다.

 

당시만 해도 4·3에 대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대단한 죄악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이장이 물러나고 주모자들도 옥살이를 하게 되었으니 이른바 ‘아이고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 한을 달래기 위해, 다시는 이 땅에 그런 야만의 학살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누군가 이 탑을 쌓았는데 미완으로 남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너분숭이 옆 옴팡밭으로 간다. 마침 아주머니 한 분이 밭으로 간다. 옴팡밭 가운데에는 무덤으로 추정되는 조그마한 돌무더기가 있는데 그 내력을 혹시나 알고 있는가 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맞수다. 4·3시절에 죽은 사람 무덤이라고 합디다. 나는 잘 모릅니다. 우리 시어머니가 잘 아는데 북촌사람 무덤이라고 합니다. 친척도 지금 북촌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무덤을 옮기라고 해도 옮기지 않아 우리로서도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놔두고 있는 겁니다. 무덤인데 우리가 함부로 할 수가 없는 일입주”


누가 보기에도 그 돌무더기는 밭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서 농사를 짓는데 여간 불편하지 않을 것 같으나 그대로 놔두고 있는 그 마음씨가 너무 곱다. 해마다 4월이 되면 저 무덤에는 어김없이 유채꽃이 피곤 한다.

 

 

마을의 산 증인 팽나무, 돌성

섬을 돌다 보면 어렵지 않게 아름드리 팽나무를 만난다. 그 팽나무의 역사가 곧 마을의 역사다. 북촌 입구에 아름드리 팽나무가 서 있고, 마을 안쪽에도 팽나무가 세 그루 서서 마을을 지키고 있다. 나무의 아랫도리에도 어김없이 총탄자국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마을 입구에는 비석거리라고 해서 공덕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비석도 여지없이 총알받이 역할을 해야 했다. 비석의 총탄자국에 시멘트를 발랐는데 오히려 더 눈에 띤다. 팽나무는 어린아이들에게는 놀이터였고, 어른들에게는 쉼터였다.

 

여름철이면 어린아이들은 팽나무에 올라 매미 잡이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어른들은 팽나무 아래에서 달콤한 낮잠을 즐기기도 했다. 또한 팽나무는 당목(堂木)으로서 제 기능을 한다. 신앙공동체의 중심에 팽나무가 있는 것이다. 문헌에 의하면 조선시대 이형상 목사는 당 오백 절 오백을 불살랐다 한다. 얼마나 많은 팽나무들이 민심을 사납게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잘려나갔을까?

 

 

이태 후면 4·3항쟁은 60주년을 맞이한다. 환갑을 맞은 셈이다. 5·10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반대하고 통일된 조국을 열망하던 섬 사람들이 국가공권력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당한 지 60주년이 다가오는 것이다. 물론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4·3을 올곧게 역사의 연표에 기록하는 것이다. 다시는 이 땅에 죽임과 죽음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후손들에게 남겨야 한다.

 


김수열
1959년 제주 출생. 198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는 『어디에 선들 어떠랴』,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산문집으로는 『김수열의 책읽기』, 『섯마파람 부는 날이면』 등이 있음. 현재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 지회장,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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