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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4.3의 역사 1 동광리를 찾아서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나는 4·3과 관련한 청탁을 받곤 하는데 그 내용은 현장 취재를 하는데 동행하자는 부탁이거나 4·3과 관련한 원고를 써달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현기영 선생의 「순이삼촌」을 영화로 만드는 각색 작업을 마무리해야할 처지에 놓여 있어서 올해만큼은 어떠한 청탁도 받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결국은 허사다.


서울에서 내려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의 황석선 씨와 제주4·3연구소 강태권 연구원과 함께 남제주군 안덕면 동광리로 향한다.
섬의 날씨는 물론 일기예보가 정확하겠지만 때로는 섬사람들의 삶의 체험에서 오는 감각적인 느낌이 더 정확할 때가 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하루에도 대여섯 번 변화무쌍한 날씨를 아무리 첨단과학시대라지만 어떻게 감 잡을 수 있겠는가. 일기예보에서는 날이 풀릴 거라고 예보하지만 하늘을 보니 전혀 그럴 낌새가 아니다.


취재를 하고 글을 쓰는 입장에서야 날씨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사진으로 현장을 기록해야 하는 사진작가의 입장에서 날씨는 결정적이다. 더군다나 뭍도 아니고 섬인데 사진만을 위해서 다시 섬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날씨가 더 이상 험악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담배 한 보루의 힘
현장 취재를 하면서 얻은 노하우 중에 두 가지만 소개하겠다. 사전에 인터뷰 약속을 하지 못하고 마을에 들어서게 되면 먼저 노인회관을 찾으면 된다. 그런데 조짐이 좋지 않다. 노인회관의 문이 잠겨 있다.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마을 안에 있는 상점으로 가면 답을 찾을 수가 있다. 동광리 부녀회가 운영하는 조그마한 가게에 들러 물어본다.

“김여수 할아버지 어디 있수과?”
“아마도 아들네 집에 있을거라”
“아들네집이 어디우과?”
“학교 앞, 동광가든”

 

가게에서 담배 한 보루를 산다. 현장 취재를 할 때 이 점이 참 중요하다. 취재 동행을 부탁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그에 준하는 예우를 갖추라는 것이다. 이건 뇌물이 아니라 그야말로 예우다. 그 속에는 ‘당신은 참 소중한 분입니다’ 라는 인사도 함께 들어 있어서 담배 한 보루를 받아든 김여수 노인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사실 4·3과 관련해서 현장을 체험한 분을 모시고 동행하는 일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가족이나 벗들은 다 죽고 자기만 살아남았다는 일종의 죄의식이랄까, 아니면 그 처참했던 현장을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짙게 배어 있는 분들인데 그 정도의 예우는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삶과 죽음의 공동체 - 큰넓궤
이제는 당당히 4·3 코드의 반열에 오른 큰넓궤로 향한다. 나는 제주4·3을 설명할 수 있는 곳을 들라 하면 망설이지 않고 북제주군 북촌리와 남제주군 동광리를 든다. 물론 섬 어디에 가더라도 4·3의 상흔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나, 중산간 마을로서의 동광리와 해안 마을로서의 북촌리를 이해하는 건 어쩌면 제주4·3의 알파이자 오메가다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동광리의 핵심에 큰넓궤가 있다. ‘궤’란 말을 굳이 표준어로 바꾸면 ‘굴’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그렇다면 ‘큰넓궤’란 ‘크고 넓은 굴’ 정도로 이해하면 틀림이 없겠다.


동광리를 이루고 있는 자연부락들을 무장대와 격리시킨다는 명분으로 군경토벌대가 마을에 불을 지르자 사람들은 마을 주변 곶자왈로 모여든다. 곶자왈은 사시사철 울창한 활엽수림지대라 몸을 피해 있기에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다.


해안으로 내려가도 죽은 목숨이 될 것을 염려하여 차라리 마을 근처에 숨었다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지금은 마을 공동 목장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이곳에는 크고 작은 굴들이 많다. 화산작용에 의해 생긴 것들이다. 처음에는 주로 가족단위로 흩어져 있었는데 마을의 한 사람이 큰넓궤를 발견하면서 대부분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게 된다.
 

 

 

 

 


 

화산작용에 의해 생긴 것들이다. 처음에는 주로 가족단위로 흩어져 있었는데 마을의 한 사람이 큰넓궤를 발견하면서 대부분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게 된다. 더군다나 이 무렵이 1948년 겨울이어서 큰넓궤는 안성마춤이었다.
굴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지금은 철제로 굴 입구를 보호하고 있어 쉬 눈에 띠지만 당시에는 숲으로 가려져 있어서 비교적 안전한 은신처였다. 당시 열여덟 살로 큰넓궤에서 살아남은 김여수(76) 노인의 증언이다.

“120여 명 정도가 살았어. 주변에 작은 굴에 가서 밥을 해다가 차롱에 담아 가져와 먹고, 물은 마전동에 소 먹이던 물을 물구덕에 길어서 날라다 먹었지. 밖에 나다닐 때는 발자국이 남지 않게 돌 위로만 다녔지. 똥도 밖에 나가 누지 못했어. 굴 한쪽 구석을 변소로 정해서 거기에다 볼일을 보곤 했지. 굴 안에 있던 젊은 사람들이 대나무로 만든 창을 들고 주변에 있는 작은 굴에 숨어서 망을 보거나 연락병 역할을 했지.”

 

 

 

 

 


굴 안은 그야말로 작은 공동체였다. 비록 각지불에 의존하는 어둠이었지만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따뜻함으로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도 오래 가지 않았다. 큰넓궤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지 40여 일이 지났을 무렵 토벌대의 집요한 추적 끝에 결국 굴은 발각되고 만다. 굴 밖에서 보초를 서던 사람이 잡히게 되고 모진 고문 끝에 굴의 위치를 알리고 만 것이다.


굴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초행길인 사람은 제대로 들어갈 수가 없다. 토벌대들이 밖에서 총질을 해대자 안에서는 태울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굴 입구로 가지고 와 태우면서 맞섰다. 고춧가루도 함께 태웠다. 매운 연기를 내뿜어 들어오지 못하게 함이었다.
결국 토벌대는 굴의 입구를 막아버리고 돌아간다. 다시 올라와 체포하자는 속셈이다. 이웃에 떨어져 있는 도너리오름에서 망을 보던 마을 사람이 밤에 몰래 찾아와 막혔던 굴의 입구를 다시 허문다. 큰넓궤가 발각된 이상 더는 여기서 살 수 없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헤치고 맨발로 어디를 간다는 말인가? 그래도 떠날 수밖에 없다. 큰넓궤에서 나온 사람들은 돌오름이나 볼레오름으로 밤길을 재촉한다.


이후 보름 동안 토벌대는 악착같이 피란민들의 뒤를 추적하고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붙잡히고 만다.  

 

 

 

 

  그때는 이미 숫자가 절반 이상으로 줄어든 후였다. 굶주림과 추위가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들은 결국 제대로 조사도 받아보지 못하고 모두 학살되고 만다.

시신도 없는 헛묘

큰넓궤에서 내려오는 길에 김여수 노인은 길가 무덤 옆에서 우리 일행을 내리게 한다. 무덤가로 다가간다. 담배를 물고 한숨부터 내쉰다. 봉분 세 개가 나란히 누워 있다. 노인의 작은아버지 내외, 작은아버지의 큰아들 내외, 작은 아들의 봉분이다. 주검은 다섯인데 봉분은 세 개다. 내외의 시신은 합묘(合墓)를 한 것이다. 담배를 태우던 김여수 노인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연다.

 

“여기에 있는 작은아버지 내외, 사촌형님 내외는 토벌대에 잡혀서 화순으로 옮겨졌다가 서귀포로 다시 옮겨졌지. 저쪽에 있는 작은아들은 어디서 죽었는지도 몰라.
나중에 들은 얘긴데 작은아버지 내외, 사촌형님 내외는 정방폭포에서 학살당했어. 정방폭포 옆에 소남머리라고 있는데 잡혀온 사람들을 동아줄로 줄줄이 묶어놓고 맨 앞 사람을 발로 차서 절벽 밑으로 떨어뜨리는 거지. 같이 묶여있던 사람들도 줄줄이 떨어지고.
정방폭포는 바다와 직접 연결이 되서 파도가 몰아치는 바람에 시신도 못 찾았지.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입던 옷 하나씩 관에 넣고 장례를 치렀지. 그러니까 여기 무덤에는 시신도 없어. 저쪽에 있는 작은 아들은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고.”

잠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한다. 줄줄이 사탕처럼 사람을 묶어놓고 맨 앞사람을 총으로 쏴 떨어뜨리거나 발로 걷어차서 나머지 사람들도 떨어지게 하는 이 광란의 죽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인간의 목숨이 총알 한 발의 가치도 없다는 것인가? 그렇게 죽어간 사람은 무슨 이념을 가지고 있거나 무장대 활동을 한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살기 위해서 굴에 숨어들었고 굴이 발각되자 살기 위해 도피를 한 죄밖에 없다. 그리고 죽였으면 시신이라도 수습하게 해야 하는 게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겉으로 보면 일반 무덤과 아무런 차이가 없어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무덤에 불과하지만 무덤의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함부로 그 옆을 지나치지 못한다. 지금쯤 저 원혼들은 어느 구천을 헤매고 있는 것일까? 중음신이 되어 바람길 구름길을 한없이 떠돌고 있는 건 아닐까?
김여수 노인의 헛묘 외에 동광리를 대표하는 헛묘는 동광 육거리 검문소 근처 밭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일곱 기의 헛묘가 있는데 그 사연은 대강 이렇다.


4·3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니 시신이라도 찾아서 장례를 치러야 하지 않겠냐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와서 학살터인 정방폭포 위 소남머리로 칠성판을 들고 간다. 가서 보니 뼈들이 엉켜서 누가 누구의 시신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미 살이 삭아들어 뼈만 남은 것이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시신은 못 찾았지만 죽은 이들의 혼이라도 부르고 비석이라도 세워야겠다는 생각에 헛봉분을 만든다.


 

잃어버린 마을 - 삼밭구석 그리고 무등이왓


김여수 노인의 가족이 묻혀 있는 헛묘에서 나와 그이가 살았던 삼밭구석으로 간다. 동광은 원래 네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대부분 미친 역사의 불길에 잿더미가 되고 지금은 한때 집터의 흔적이었음을 스산하게 웅변하고 있는 댓바람만 남아 있다.


삼밭구석의 중심이었던 곳에 차를 세운다. 아름드리 팽나무가 서 있다. 원래는 이보다 훨씬 큰, 350여 년이 넘는 수령의 팽나무가 있었는데 태풍에 쓰러졌다 한다. 팽나무 밑에 작은 추모비가 있다. 삼밭구석에 살다가 4·3 때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비석이다. 김여수 노인이 사비를 털어 만들었다고 한다. 비석 뒷면에는 김여수 노인의 부친을 비롯하여 헛묘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아버지 가족들, 그리고 이웃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삼밭구석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제주도에서 잃어버린 마을을 알리는 표석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안내표석이 있는데 아무래도 김여수 노인이 세운 추모비에 눈길이 간다.
 

 

 

 

삼밭구석. 풀이하면 삼을 경작하던 밭, 다시 말해 마전동(麻田洞)이다. 옛날에는 삼을 갈았던 곳이라는 의미겠는데 김여수 노인의 말에 의하면 당신은 삼을 본 적이 없다 하신다. 아마 그 이전의 역사이리라. 지금은 텅 빈 밭이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온 데 간 데 없다. 밭담을 에두르는 대숲만이 사람이 있었음을 말해줄 뿐이다.


무등이왓으로 간다. 4·3 당시 화마에 휩싸여 없어진 마을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곳이 바로 무등이왓이다. 지형이 춤을 추는 어린아이와 닮았다 해서 무동(舞童)이고 ‘왓’은 ‘밭’이라는 뜻이니 ‘어린아이가 춤을 추는 형상의 밭’이라는 뜻이겠다. 무등이왓 입구로 들어서는데 기이한 조형물이 눈에 띤다. 무등이왓을 찾은 예술가가 조형물을 설치해 놓은 것 같다. 추모를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겠는가.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한 군데를 하더라도 열과 성을 다했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무등이왓을 한눈에 조망하기에 적합한 장소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고 위에 올라가서 마을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같이 동행한 강태권 연구원이 귀뜸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곳에 가니 무등이왓만이 아니라 그 근처가 한눈에 들어온다. 무등이왓은 그 어디보다 마을의 자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다른 곳은 이미 밭으로 용도가 바뀌었거나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서서 흔적을 찾을 수가 없는데
무등이왓은 그 당시 마을의 형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을의 규모도 만만치가 않다, 그런 마을이 4·3의 불길에 완전히 전소되고 만 것이다.

 

 


 

 

 

그날 성완희 열사가 노조사무실에 석유를 가지고 들어갈 때만해도 누구도 그날의 사건을 예견하지 못했다. 사실, 그 당시 석유는 혹여 깡패나 다름없는 노조집행부가 노조 사무실로 진입해 들어올 때, 사무실 앞에 뿌리고 대처하기 위한 용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완희 열사는 그것으로 자신의 죽음을 택했다. 가장 강렬한 저항으로 탄광 노동자들의 고통을 항변했던 것이다.


안재성 씨는 성완희 열사에 대해 이야기를 끝맺으면서, 좋은 성품과 마음 때문에 늘 사람들의 중심에 서 있었으면서도 정작 성완희 열사 본인은 무척이나 외로웠던 사람이라고 했다.

 

 

실제로 복직투쟁을 전개해 나갈 때, 성완희 열사는 안재성 씨에게 하루에 열통 가까이 전화를 했었다고 한다.
안재성 씨는 그 외로움을 진정으로 알아주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늘 안타깝다고 했다. 정이 많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할 줄 몰랐으며, 자신의 아픈 성장 과정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늘 신뢰를 주었고, 그로인해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 그러나 정작 본인은 외로웠던 사람. 성완희 열사, 그는 속 깊고 믿음직한 형 혹은 오빠, 혹은 친구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폐쇄된 강원탄광 갱도
“성완희 형은 온화한 사람이었어요.”
한 때 성완희 열사와 함께 일했던 조호성 씨도 안재성 씨와 비슷한 맥락에서 그를 증언했다.
“말수도 없고. 안으로야 어땠는지 모르지만 밖으로는 불평불만을 잘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내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우리 숙소에 와서 함께 투쟁하자고 자주 말하던 거였지요.”


조호성 씨와 나는 강원탄광 갱도 입구에서 그 말을 주고받았다. 조호성 씨는 갱도 앞에서 당시 성완희 열사가 복직을 주장하다가 경비들에게 끌려갔던 일이며, 또 회사에서 경비임무를 맡겼을 당시 갱도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성완희 열사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여기였어요. 여기 이렇게 서 있었지요.”
그는 말했다. 그가 가리킨 지점은 갱도 입구에서 십여 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그 때, 갱도 입구 앞에서 경비들에게 끌려가면서도 복직을 주장하던 성완희 열사를, 또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경비직을 수행해야 했던 성완희 열사를 떠올렸다. 그것은 성완희 열사에게는 수모이자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광부들이 겪어야 했던 수모와 아픔의 은유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했을 것이며, 또 기억했을 것이다. 하지만 십오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성완희 열사도, 그 시절 갱도 입구를 드나들던 수많은 광부들도 찾아볼 수 없다. 두 갱도는 막혔고, 사무실이 있었다던 갱도 앞 건물도 사라졌다. 두 개의 갱도 입구와 그 주변에 떨어져 있는 낡은 장화 한 짝만이 그 시절을 기억할 뿐이다.
갱도 입구에서 사택지로 돌아오며 조호성씨는 말했다.
“다 떠났어요. 이제는 연락도 안돼요.”

 

 

 

철암역과 태백훈련원
강원탄광은 1993년에 폐광됐다. 석탄합리화 정책에 따른 것이다. 1987년 탄광 대파업 이후 채 십년도 되지 않아 그 같은 변화가 이뤄진 것이었다. 그야말로 해일의 밀물, 썰물과 같다.


원기준 목사는 이를 노동의식은 극대화 되고, 그 반대로 탄광산업은 한계에 직면한 결과라고 했다. 1989년 십여 개월 만에 각지의 탄광에서 일어난 240여 회나 되는 크고 작은 투쟁들이 그것을 잘 대변해 준다는 것이다. 강원탄광도 그 운명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철암역과 태백훈련원은 좁게는 강원탄광의, 또 넓게는 석탄산업의 그런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겨우 면 규모나 될법한 거리에서 철암역은 유독 크고 웅대했다.

 

 

 

 


그래서 너무도 쉽게 그 시절 철암역이 누렸을 영화가 얼마만큼 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곳은 한 때 강원탄광에서 나오는 석탄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옛일이 되었다. 강원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철암역의 영화도 끝이 난 것이다. 그 곳은 본래의 목적보다는 이제는 관광 경유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태백훈련원은 아예 종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한 때 그곳은 검은 노다지를 꿈꾸며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꿈을 찾는 첫걸음을 떼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사유지가 되어, 건물은 모두 헐리고 야산의 한 부분이 되어 가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입구 앞까지 가보니, 철문은 닫혀있고 늙은 개 한 마리가 경계하며 짖는다.


세월은 그렇게 역사의 현장을 조금씩 묻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성완희 열사가 남긴 역사의 정신만은 묻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성완희 열사의 분신사건 이후 전개된 광산 노동운동은 노동운동 문화와 태백시의 민주화운동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원기준 목사도 그런 정신을 이어가고자 <광산지역 사회연구소>를 설립했고, ‘포럼 탄광촌 사람들’을 운영했다. 작년에는 북한에 연탄을 무료로 공급하는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 나눔 운동’ 등을 펼치기도 했다. 성완희 열사의 정신은 그 때뿐 아니라 지금도 시대를 열어가는 여러 횃불 중 하나인 것이다.
 

 

 

 

 

 


김수열
1959년 제주 출생. 198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는 『어디에 선들 어떠랴』,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산문집으로는 『김수열의 책읽기』, 『섯마파람 부는 날이면』 등이 있음. 현재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 지회장,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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