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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들의 꿈이 흔적으로 남은 곳 강원탄광

강원도는 나에게 검은 이미지로 다가온다. 아마 그것은 험준한 산악과 탄광 때문일 것이다. 험준한 산악에는 검은 그늘이 있는 법이고, 탄광은 말할 것도 없다. 탄광은 어둠 속에서 검은 탄을 캐내는 곳이다.

 

태백시의 강원탄광을 찾아갈 때 나는 이 검은 이미지를 쫓아가는 느낌이었다. 제천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영월, 사북과 고한을 거쳐 태백시로 간다.

 

강원탄광의 흔적, 철암
태백시로 가면서, 나의 첫인상은 ‘역시 강원도’였다. 험준한 산맥들이 먼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강원도다운 풍경은 점차로 사라졌다.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고 사북이며 고한의 시가지에는 화려한 모텔과 음식점들의 입간판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인상적인 플래카드도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관광도시로 도약하자는 사북의 플래카드였고, 또 하나는 태백시 초입에 걸린 눈꽃축제 홍보 플래카드였다. 강원랜드를 안내하는 안내 표지판도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검은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내 선입견이 좀 엇나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어쩌면 강렬한 아침 햇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가 태백시에 닿을 무렵의 시간은 열시가 다 되어서였고, 그 즈음 태양은 험준한 산맥들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태백역에서 원기준 목사(46)에게 전화를 했다. 두 시에 약속을 했지만 그 전에 인터뷰를 할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흔쾌히 그렇게 하자고 했다. 무례한 이방인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것이다.


당시 태백지역 인권선교위원회에서 일을 했던 원기준 목사는 옛 강원탄광의 사택 지대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가 사는 집은 과거 강원탄광을 설립했던 정인욱이 집무를 보던 사무실 겸 숙소였다. 그 건물은 흰 색 건물로 25년 전에 지어졌는데, 당시 철암 일대에서는 가장 현대적인 건물이이었다고 한다. 그 곳에는 독일 탄광 기술자들의 숙소도 함께 있었다. 그 건물 옆에는 강원탄광 간부들의 숙소가 있었다. 그 건물 역시 당시 철암지역에서는 가장 현대적인 숙소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 두 동의 건물 앞으로 광부들이 살던 사택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허허벌판이었다. 후에 원기준 목사는 당시 사택들의 풍경을 담아놓은 흑백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시멘트 벽과 기와집들, 어린아이들, 할머니와 아낙들이 있었다. 그것은 거짓말 같은 풍경이었다.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강원탄광이 폐광된 이후 얼마나 많은 것들이 급격히 그리고 완전히 달라졌는지 증언하고 있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도 두 풍경 사이에서는 왠지 무색하게 느껴졌다.

그때 그 시절 - 검은 노다지
태백에서 처음 석탄이 발견된 것은 1920년대 경이었다. 장씨라는 사람이 먹돌배기에서 괴탄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석탄이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저 흔한 산골마을 중 하나였던 태백은 석탄도시로 변모하게 된다.
석탄산업은 석유가 들어오면서 잠시 불황기를 맞는다. 1966년 주유종탄(主油從炭- 석유를 주에너지로 석탄을 보조 에너지로 하는) 정책이 그것이다. 하지만 1970년 석유파동이 발생하면서 다시 석탄산업은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되고, 이 때부터 사람들이 광산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사람들이 광산으로 몰려든 까닭은 광산 노동자들이 일반 제조업에 비해 30~40% 정도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석탄을 ‘검은 노다지’라고 불렀다.
 

 

  

 

이 즈음 강원탄광에도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약 1천여 명이 그 곳에서 광부로 일했고, 5백 세대가 사택지에 집을 짓고 살았다.


원기준 목사는 당시 광부라는 직업이 ‘거지 다음의 직업’으로 불렸다고 했다. 그만큼 갱도 안의 노동은 힘들었고, 환경도 열악했으며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직업을 떠나 그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암흑만은 아니었다. 분명 최하층의 삶이었지만 그 안에 들어가 보면 특유의 활력과 소통이 있었다. 동료애가 있었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만의 정이 있었다. 원기준 목사와 함께 인터뷰에 참여했던 당시 강원탄광 노동자 조호성(44) 씨도 비슷한 맥락에서 그 시절을 회상했다.


“일은 힘들었죠.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땀으로 범벅이니깐. 그래도 그 시절이 좋았어요. 일 끝나면 친구들끼리 어울려 놀기도 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두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일이 끝나면 심심치 않게 삼겹살이나 태백 닭갈비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집에는 최첨단 가전제품도 더러 두고 살았다. 당시 지방에서는 웬만큼 살지 않으면 누리기 힘든 호사였다. 하지만 그런 호사도 사회 구조적으로 보면 없는 사람들의 ‘있는 척’ 하기에 다름 아니었다.  

원기준 목사는 돈이 없던 사람들이 돈맛을 알게 될 때 그것은 또 하나의 비극이 된다고 했다. 그것은 개인적인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거지 다음의 직업이라고 불릴 만큼 힘든 노동 그리고 그 노동 뒤에 그것을 보상받으려는 휴식.
조호성 씨는 그 시절이 좋았다는 회상 뒤에 아주 비극적인 회상도 했다.
“그 때 여러 사람이 소나무에서 목을 매달고 죽었어요. 일은 힘들지, 사는 것은 마음 같이 안 되지.”
시끌벅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몇 몇 사람이 자살을 선택해야 할 만큼 고달픔과 막막함이 공존했던 곳. 그 곳이 바로 이십여 년 전의 강원탄광이었다.

구두는 장화의 마음을 모른다
1987년 강원탄광 대투쟁의 역사도 바로 이러한 광부들의 고달픈 생활상이나 심리를 제대로 간파해내지 못한 업주들의 안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당시 자신들의 괴리를 인지하고, 의식이 성장해가는 광부들을 무시한 채 제도의 개선보다는 오로지 경쟁과 감독만으로만 그들을 이끌어가려 했다.
특히 도급제(하루 동안 캐낸 석탄의 질과 양에 따라 일한 만큼 급여를 주는 제도)는 광부들 사이에 경쟁의식을 부추겨 수많은 사고를 낳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 때에도 업주들은 사고를 그저 개인의 부주의로만 취급하려 했다.


원기준 목사는 이를 ‘구두는 장화의 마음을 모른다’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구두는 탄광의 업주와 간부들이며 장화는 광부들을 뜻한다. 그들의 대립은 어떤 면에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강원탄광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성완희 열사이다. 성완희 열사로 인해 강원탄광의 뜨거운 노동운동이 싹 텄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원탄광의 노동운동은 성완희 열사 이전에는 거의 전무했다고 한다. 성완희 열사로 인해 광산 노동자들의 의식이 트였고 민주노조가 설립되었으며 노동조건과 현장 분위기가 개선되었던 것이다. 또 자연발생적이며 비 이념적인 노동활동이 성완희 열사로 인해 조직화, 연대화, 정치세력화 되었던 것이다.

 

불꽃처럼 타오른 노동자, 성완희
성완희 열사는 1986년 11월 10일 태백훈련원에 입소하면서 강원탄광과 연을 맺었다. 그러다가 1987년 10월 강원탄광 대파업 당시 노동자 대표로 선출되어 파업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그는 강원탄광으로부터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혔고, 작업 중 부상을 입고 치료차 결근하자 강원탄광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해고시켰다. 당시 그것이 얼마나 부당한 해고였는지는 지방노동위원회의 복직판결이 말해준다.


회사는 마지못해 복직판결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성완희 열사를 광부가 아닌 경비직으로 복직시켰다. 이에 성완희 열사는 다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광부로서의 복직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1988년 6월 21일 그는 동료 노동자의 복직투쟁을 위해 결근계를 내고 농성을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6월 29일 노조사무실에서 삭발 단식에 들어갔다가 구사대가 난입해 들어오자 “광산쟁이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를 외치며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약 열흘 후인 7월 8일 원주기독병원에서 끝내 숨을 거두었다.


“죽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성완희는 인물이 좋았지요. 체구도 꽤 컸고 대인관계도 좋았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많은 사람이었어요. 또 호방하고 예의바른 성격이었지요.”
 

 

 

 

당시 광산지역 사회선교협의회 노동상담소 국장을 지냈던 안재성(47) 씨는 성완희 열사를 이렇게 기억했다. 당시 그는 성완희 열사의 복직 투쟁을 계기로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그는 성완희 열사의 죽음이 얼마만큼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고 했다. 평소에도 전태일처럼 노동자들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과 또 분신이라도 해서 투쟁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했다는 것이다. 실제 분신자살을 시도하기 얼마 전에도 그는 그 말을 했었다. 당시 안재성 씨는 불길한 마음에 그렇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며 성완희 열사에게 무척 화를 냈다고 한다.


 

  

 

그날 성완희 열사가 노조사무실에 석유를 가지고 들어갈 때만해도 누구도 그날의 사건을 예견하지 못했다. 사실, 그 당시 석유는 혹여 깡패나 다름없는 노조집행부가 노조 사무실로 진입해 들어올 때, 사무실 앞에 뿌리고 대처하기 위한 용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완희 열사는 그것으로 자신의 죽음을 택했다. 가장 강렬한 저항으로 탄광 노동자들의 고통을 항변했던 것이다.


안재성 씨는 성완희 열사에 대해 이야기를 끝맺으면서, 좋은 성품과 마음 때문에 늘 사람들의 중심에 서 있었으면서도 정작 성완희 열사 본인은 무척이나 외로웠던 사람이라고 했다.

실제로 복직투쟁을 전개해 나갈 때, 성완희 열사는 안재성 씨에게 하루에 열통 가까이 전화를 했었다고 한다.
안재성 씨는 그 외로움을 진정으로 알아주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늘 안타깝다고 했다. 정이 많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할 줄 몰랐으며, 자신의 아픈 성장 과정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늘 신뢰를 주었고, 그로인해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 그러나 정작 본인은 외로웠던 사람. 성완희 열사, 그는 속 깊고 믿음직한 형 혹은 오빠, 혹은 친구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폐쇄된 강원탄광 갱도
“성완희 형은 온화한 사람이었어요.”
한 때 성완희 열사와 함께 일했던 조호성 씨도 안재성 씨와 비슷한 맥락에서 그를 증언했다.
“말수도 없고. 안으로야 어땠는지 모르지만 밖으로는 불평불만을 잘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내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우리 숙소에 와서 함께 투쟁하자고 자주 말하던 거였지요.”


조호성 씨와 나는 강원탄광 갱도 입구에서 그 말을 주고받았다. 조호성 씨는 갱도 앞에서 당시 성완희 열사가 복직을 주장하다가 경비들에게 끌려갔던 일이며, 또 회사에서 경비임무를 맡겼을 당시 갱도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성완희 열사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여기였어요. 여기 이렇게 서 있었지요.”
그는 말했다. 그가 가리킨 지점은 갱도 입구에서 십여 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그 때, 갱도 입구 앞에서 경비들에게 끌려가면서도 복직을 주장하던 성완희 열사를, 또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경비직을 수행해야 했던 성완희 열사를 떠올렸다. 그것은 성완희 열사에게는 수모이자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광부들이 겪어야 했던 수모와 아픔의 은유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했을 것이며, 또 기억했을 것이다. 하지만 십오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성완희 열사도, 그 시절 갱도 입구를 드나들던 수많은 광부들도 찾아볼 수 없다. 두 갱도는 막혔고, 사무실이 있었다던 갱도 앞 건물도 사라졌다. 두 개의 갱도 입구와 그 주변에 떨어져 있는 낡은 장화 한 짝만이 그 시절을 기억할 뿐이다.
갱도 입구에서 사택지로 돌아오며 조호성씨는 말했다.
“다 떠났어요. 이제는 연락도 안돼요.”

 

철암역과 태백훈련원
강원탄광은 1993년에 폐광됐다. 석탄합리화 정책에 따른 것이다. 1987년 탄광 대파업 이후 채 십년도 되지 않아 그 같은 변화가 이뤄진 것이었다. 그야말로 해일의 밀물, 썰물과 같다.


원기준 목사는 이를 노동의식은 극대화 되고, 그 반대로 탄광산업은 한계에 직면한 결과라고 했다. 1989년 십여 개월 만에 각지의 탄광에서 일어난 240여 회나 되는 크고 작은 투쟁들이 그것을 잘 대변해 준다는 것이다. 강원탄광도 그 운명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철암역과 태백훈련원은 좁게는 강원탄광의, 또 넓게는 석탄산업의 그런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겨우 면 규모나 될법한 거리에서 철암역은 유독 크고 웅대했다.

 

 

 

 

그래서 너무도 쉽게 그 시절 철암역이 누렸을 영화가 얼마만큼 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곳은 한 때 강원탄광에서 나오는 석탄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옛일이 되었다. 강원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철암역의 영화도 끝이 난 것이다. 그 곳은 본래의 목적보다는 이제는 관광 경유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태백훈련원은 아예 종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한 때 그곳은 검은 노다지를 꿈꾸며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꿈을 찾는 첫걸음을 떼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사유지가 되어, 건물은 모두 헐리고 야산의 한 부분이 되어 가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입구 앞까지 가보니, 철문은 닫혀있고 늙은 개 한 마리가 경계하며 짖는다.


세월은 그렇게 역사의 현장을 조금씩 묻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성완희 열사가 남긴 역사의 정신만은 묻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성완희 열사의 분신사건 이후 전개된 광산 노동운동은 노동운동 문화와 태백시의 민주화운동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원기준 목사도 그런 정신을 이어가고자 <광산지역 사회연구소>를 설립했고, ‘포럼 탄광촌 사람들’을 운영했다. 작년에는 북한에 연탄을 무료로 공급하는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 나눔 운동’ 등을 펼치기도 했다. 성완희 열사의 정신은 그 때뿐 아니라 지금도 시대를 열어가는 여러 횃불 중 하나인 것이다.

 

글 이재웅
1974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실천문학 으로 데뷔
2005년 장편소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출간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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