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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이 갖는 가장 큰 어려움이라면, 바로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게 만드는가에 있다. 대개 기념관은 여러 자료들을 동원하여 그 기억을 만들어주지만, 자료만으로는 역사적 상상력을 증폭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료란 과거의 기억이고 증언이지만, 그것으로 역사적 체험을 대체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그 역사를 직접 살아보지 않은 후대들에게 기억을 살려내면서 역사적 인식으로 전환하기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다. 후손들은 역사적 체험이 아닌 자료로 역사를 그려가야 하는데, 그 자체가 매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역사란 정확한 기록과 자료를 통해 가능하다지만, 그래서라도 여전히 기념관은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역사적 체험에 준하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 바로 기념관이 처한 난관인 것이다.그런 점에서 기념관에서는 역사적 장면이나 특정한 환경과 시대상황을 재현하기 위해 디오라마와 영상, 음향, 특수조명 등을 사용하여 전시의 효과를 얻어내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트에 덧붙여 대개 인형이나 마네킹을 사용하여 실물 연출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료를 효과적으로 보이기 위한 노력이 늘 올바른 의미의 역사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기념관의 난관
이를테면 서대문 형무소의 경우를 보자. 그 곳에는 장소적 역사성과 특수성을 살리기 위해 형무소 내에 가상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일제시대의 가혹한 고문의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형무소 안으로 들어가면, 어두컴컴한 공간에 특수조명이 배치된 가운데 비명소리가 괴이하게 들리지만, 결과적으로는 과다한 연출로 인해 서대문 형무소의 장소성이 훼손되고 만다. 관람객은 서대문 형무소의 역사적 두께와 깊이를 느끼기보다는, 차라리 특수조명과 음향효과 속에서 밀납 인형들의 잔혹극을 즐기듯 바라보는 사도마조히즘적 관음증을 경험한다고나 할까. 그런 가운데 역사는 볼거리로 왜곡되고 축소되면서 아동적인 퇴행현상처럼 뒷걸음치게 된다. 다른 한편 흔히 기념관에 배치된 조형물에 별 의심 없이 관철되는 사실주의 양식에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전쟁기념관의 군인을 묘사한 기념조각들과 5·18 묘역의 민중들의 투항을 그린 기념조각상들은 대개 애국주의적 파토스와 비극적 영웅주의로 포장되어 있다. 하지만 거대한 기념공간이 갖는 권위주의적 위계성과 폐쇄성으로 인해 조형물 역시 이질감을 조성할 따름이다. 크기에서의 권위주의적 성향과 좌우대칭형 엄숙주의는, 그 위압적인 분위기와 함께 어떤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이미 답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영웅주의적 비극미 속에서 전쟁은 당연한 역사적 사명이고, 망월동의 저항적 상징성은 그대로 신화로 남아버린다는 것이다. 더 이상 관람객은 능동적으로 역사를 대하지 않게 되고, 또 스스로의 느낌을 찾아가면서 역사적 상상력을 추동하지도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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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기념관에서의 리얼리즘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우리는 리얼리즘을 하나의 사실적 묘사를 중심으로 하는 표현양식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일련의 의식의 과정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사실적 묘사는 일반적으로 표현된 그대로 의미가 전달되면서 역사적 배경을 풍부하게 드러내주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대체로 기념관 조형물에게는 재현에 대한 요구가 강박관념처럼 주어지면서 사실주의적 양식을 선호하게 되고, 대개 영웅주의적 맥락에 머물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의 역사는 당위론적으로 고착되어 새로운 해석을 내리기 위한 작업이 이루어지기 힘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념관의 자료와 전시기법, 그리고 건축물에서의 모든 체험들이 어떻게 역사적 인식에 다다르도록 도와줄 수 있느냐에 있다.
진정한 의미의 리얼리즘이란 사실주의 양식으로 답을 가르쳐주고, 계몽하는 교훈적 개념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현실에 개입해 가면서 현실인식을 깨우치고 주체적인 판단을 하도록 도와주는 과정으로 보자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리얼리즘 논쟁을 다시 꺼내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념관에서 매우 중시되는 언어로서, 리얼리즘을 새롭게 접근하는 일은 너무도 절실하고 필요한 사안임은 분명하다.
| | 건축언어의 새로운 리얼리즘
이에 대한 논의를 좀더 구체적으로 하기 위해 이번 호에서는 베를린 유대인박물관을 함께 보려 한다. 베를린 린덴 거리에 있는 유대인박물관은 기존의 기념관이 갖는 건축어법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간 사례이며, 또 2001년 개관 당시 그 건축적 특성으로 인해 엄청난 호응을 받았던 경우이다. 그것은 유태인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역사적 기억을 담아내기 위한 건축적 언어가 전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그재그로 건물을 배치한 방식에서부터 건물 외벽을 아연으로 뒤덮은 재료에서의 혁신,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세트를 연상하게 만드는 불규칙성과 과감한 공간 배분, 마치 상처 혹은 십자가를 연상하는 듯한 날카로운 선의 사용, 사각형 중심의 공간 설계를 과감하게 깨트린 파격, 그리고 텅 빈 공간들이 주는 영적인 분위기는 그대로 과거 홀로코스트의 역사의 현장을 만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박물관은 컬렉션이 아니라 건축물만으로 유명해진 경우다. 실제로 2001년에 개관하였다지만, 전시회가 없는 상태에서 건물만 가지고 1999년부터 개방되었다. 건물만으로도 엄청난 관람객을 동원한 사실로, 이 박물관에서 건축적 영향력이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최근 박물관·미술관건축이 유명 건축가의 ‘작품’(Art Work)처럼 인식되면서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과 같은 파격적인 건축물이 문화계의 큰 사건으로 회자되는 가운데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물론 박물관·미술관의 내용적 기능보다 건축가의 성과물이 앞서는 것도 문제다. 그러나 실제로 박물관·미술관의 컬렉션을 공간언어와 함께 성격을 부여한다는 것은 박물관·미술관 건축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며, 그런 점에서라면 한국에서의 많은 박물관·미술관 건축이 염두에 두어야 할 사안이라고 본다. 특히 기념관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어떻게 건축적 공간이 기념관에서 얻게 될 역사적 인식을 추동하는 데 충분한 계기를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절실하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리고 박물관·미술관 건축에 대한 비평적 논의와 평가 작업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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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역사와 건축 언어의 결합
베를린 유대인박물관은 1946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을 간 유대인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ebeskind)가 설계한 것이다. 그는 도시 디자인과 건축 설계 작업에 신비평과 학제 간 연구의 관점을 적용한 이론적 접근으로 유명하다. 특히 도시와 문화적 환경의 결합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는, 그가 이스라엘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역사와 건축이론을 공부하면서 무대 디자인과 설치를 한 경력과도 관련 있다. 그래서 그는 베를린 유대인박물관이 단순히 그 기능에만 집착하지 않고, 그 이상의 도덕성과 의미를 살려내려고 애썼다고 말한다. 자유 베를린의 통합과 그 이후의 변화를 한데 모아,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지속적으로 현대의 모습 위에 얹어놓고, 또 어떻게 새로운 미래로 유도해 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베를린 역사에서 유대인과 베를린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공동의 연대의식에 초점을 두었다고 한다. 조형적인 측면에서 보면, 주위 환경을 고려하여 위치와 빛, 재료, 건물 자체의 조형적 분할과 결합을 조절했으며, 어떤 분명한 정신적인 존재감을 빛과 그림자를 통해 표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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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공모에서 당선이 되면서 일약 스타가 된 리베스킨트는 1989년 이후 독일건축가협회의 일원으로 등록하여 베를린에서 살면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2002년 7월에 개관한 맨체스터 전쟁박물관을 비롯하여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의 나선형 증축공사와 텔아비브 바이언 대학교의 컨벤션센터, 코펜하겐의 네덜란드 유대인박물관, 드레스덴의 군사박물관 등을 설계하였고, 최근에는 런던 코벤트 가든의 로얄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바그너의 <링>의 무대장치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외벽은 아연과 티타늄으로 마감되어 있다. 반짝거리는 표면으로 인해 낮 시간 햇빛의 정도에 따라 반사되어 노을이 질 시간이면 불그레한 색감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건물이 지그재그 식으로 설계되어 마치 번개가 치는 모습 혹은 다윗왕의 별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건물은 두 개의 라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가 접속 혹은 관계의 라인(line of connection)이고 다른 하나가 부재와 비어있음의 라인(line of voids)이다. 첫 번째 라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문화적 교류와 상호 영향 관계를 상징하며, 다른 하나는 곧게 뻗어나가다 조각조각 흩어지는 방식으로 공간을 가로지는 방식으로 구획되어 있다. 이 곳에서는 연속된 빈 방을 방문하게 되는데, 빈 방의 부재는 곧 2차 대전 중의 유대인 학살과 처형으로 인해 지워진 생명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세대들을 시각적으로 감지하게 한다. 그리고 복도를 거닐면서 느끼게 되는 어떤 긴장감은 실제로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빛을 체험하는 순간에 발생되는 것이다. 또 칼자국처럼, 생채기처럼 날카롭게 찢겨져 난 창으로 흐르는 빛은 공간적 체험을 더욱 정신적인 것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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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스킨트의 건물 지하에는 독일 유대인 역사를 상징하는 세 개의 축이 있다. 첫 번째 축은 ‘연속성의 축’이라는 이름이 붙은 가장 긴 것으로, 원래 박물관 건물인 바로크 식 빌딩에서 시작하여 지상으로 향하는 길고 긴 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이는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아직 알 수 없는 미래로 향하는 시간의 흐름을 말한다. 관람객은 이 계단을 따라 전시장으로 도달하게 되는데, 여기는 독일 유대인의 과거와 현재를 개관할 수 있는 상설전시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두 번째 축은 ‘추방과 이민의 정원’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복도가 좁아지거나 갑작스레 기둥이 보행을 막듯이 박혀 있거나 벽은 기울어 있고 바닥도 불균등하게 만들어져 있다. 관람객은 이 불균형의 공간을 통해 추방과 이민의 고통을 감지하게 되며, 복도 끝에서 비쳐지는 햇빛을 따라 걷게 되면 바로 ‘추방과 이민의 정원’으로 나가게 된다. 그리고 세 번째 축은 최후의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 홀로코스트 탑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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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과 이민의 정원’은 6미터 높이의 기둥이 49개가 서 있으며, 주변으로 나무들이 있어 하나의 정원으로 조성된 곳이다. 49개의 기둥은 가로 세로 7열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7이라는 숫자는 7일째 되는 날에는 휴식을 취해야 하는 유대인의 역사를 반영한다. 또한 49개의 기둥은 48개와 1개를 더한 개념인데, 48은 이스라엘에 국가를 건립한 1948년을 뜻하며, 1은 베를린을 덧붙인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기둥 위로부터 가지를 뻗고 있는 올리브 나무는 희망과 평화를 상징한다. 그리고 정원 옆에 설치된 홀로코스트 탑은 콘크리트로 만든 탑으로, 묵직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박물관의 여러 빈 방처럼 이 탑도 텅 빈 상태다. 안에는 특별한 냉·난방 시설이 없이 여름에는 선선하고 습기가 있는 상태를 유지한다. 한낮에는 탑에 만들어진 가느다란 선의 창으로 햇빛이 창백하게 비치게 되고, 바깥의 자동차 소음 등이 웅얼거리는 듯 가볍게 들리게 된다. 이 홀로코스트 탑은 유대인 대학살의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한 공허와 벌거벗김의 개념을 적용한 곳이 된다.
‘거리두기의 전략’
전반적으로 베를린 유대인박물관을 관람하게 되면, 일종의 ‘거리두기’라는 개념이 떠올려진다. 아주 익숙하고 편안한 대상에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그것이 낯설게 보이고, 그 낯설게 보이는 과정에서 의미의 틈새가 작동하며, 그 틈새를 타고 새로운 역사적 해석이 이루어진다는 그런 과정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은 비어있는 공간에 난데없이 현대미술 작품이 설치된 공간을 만날 때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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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높고 긴 벽과 날카로운 선이 있는 공간에 메나슈 카디쉬만(Menache Kadishman)의 작품 <낙엽>이 바닥에 수없이 깔려있는데, 여기서 얻게 되는 감응은 사실주의 양식으로 획일화된 조형물에서 얻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와 유사한 방식을 사용하는 경우로 강원도 양구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들 수 있다. 이 곳에서도 공간을 가로지르는 가운데 녹슨 철판(현대미술에서 미니멀리즘을 연상하게 하는 작품)이 사뭇 공격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전쟁의 상흔과 공허함을 느끼게 하는 매우 중요한 장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기념관은 그 역할을 전쟁과 역사적 상처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 두기보다는, 역사에 대한 능동적인 해석을 유도함으로써 일종의 역사적 성찰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무엇을 기념할 것인가와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의 질문이 결국 ‘거리두기’의 전략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자료의 전시에서부터 컬렉션 확보, 전시기법의 연구와 교육 프로그램의 실시, 그리고 건축언어의 주제적 연관성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관철되어야 할 사안일 것이다. |
<박신의> 경희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