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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언론의 산실, 을지로 인쇄골목

 

 


피(P)

언로가 차단되었던 1970~80년대, 정의와 진실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불법 인쇄물’이 유일했다. 그것은 대중을 향한 유일한 선전수단이었고, 군사정권의 서슬 퍼런 감시망을 피해 점 조직으로 활동해야 했던 민주화 운동 세력의 용이한 지침서였다.

 

운동권 내부에서도, 그것을 감시하고 적발하기에 바빴던 형사들에게도 그러한 유인물들은 ‘피(P)’로 불렸다. 영어 ‘Paper’의 첫 글자를 딴 것이었지만, 군사독재에 대한 피 끓는 적개심과 분노를 표출하는 데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상징적인 이름이었다.


그 시절, 시위 현장에서 어김없이 뿌려졌던 그 수많은 유인물들이 비밀리에 탄생한 곳이 바로 을지로 인쇄골목이다. 지금도 명보사거리를 중심으로 한 원통골목 곳곳에 들어서 있는 인쇄소마다 연말을 맞아 인쇄기가 한창 바쁘게 돌아가고 있고, 종이와 인쇄물을 실은 지게차와 트럭과 오토바이들이 좁은 골목을 서로 빠져나가느라 번잡하다.


2~30여 년 전 을지로 인쇄골목이라 함은 서울 백병원 정문 옆으로 난 골목의 그 사이사이로 나 있는 골목까지 가리켰다. 지금 그 골목 대부분의 상가들은 재개발을 앞두고 굳게 닫힌 문 위로 ‘철거’라는 붉은 글씨를 새긴 채 지나간 한 시절을 쓸쓸하게 반추하고 있는 듯했다.


이 인쇄골목에서 마스터 인쇄기나 오프셋인쇄기를 이용하기 전에는 위험 부담도 크고 조악한 데다 한 장 한 장 손으로 롤러를 밀어 찍어내야 했던 등사 인쇄가 전부였다. 대량 인쇄가 가능해지면서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은 탄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 역시 중앙정보부나 경찰의 감시망을 벗어날 리는 만무했으니, 위험 부담이 크긴 매한가지였다. 운동권에게 그러한 일을 맡아줄 업자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고, 업자 선정의 첫째 조건은 기밀을 철저히 지켜줄 ‘동지’로서의 믿음과 연대감이었다.
 

세진인쇄와 대동인쇄

그러한 ‘동지’로 인쇄업자가 두 명 있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10년이 넘게 인쇄로써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인쇄운동 1세대로 불리는 고(故) 강은기 씨와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을지로 인쇄골목 곳곳에서 수많은 유인물을 찍어내며 인쇄운동 2세대로 불리는 윤여연(51세, 대동인쇄 대표) 씨가 그들이다.


지난 2002년 11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60 평생을 인쇄장이로 살다간 세진인쇄 사장 강은기 씨는 한국민주통일연합의 기관지인 『민족시보』 관련으로 중앙정보부에서 10일 동안 조사받은 것을 시작으로 안 가 본 경찰서가 없을 만큼 을지로에서는 감시 대상 0순위의 인쇄업자였다. 1970~80년대의 굵직굵직한 투쟁 현장에는 어김없이 그가 만든 유인물이 뿌려졌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등의 재야단체 기관지 역시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으니, 불온 유인물이 제작될 때마다 경찰은 당연지사로 세진인쇄부터 들이닥쳤다.

심지어는 다른 인쇄소의 직원이 끌려가도 ‘세진’이라는 이름을 둘러대는 통에 덤터기를 써야 했고, 1980년에는 <김재규 항소 이유서>를 제작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기까지 했다.

 

 

그렇게 숱한 곤욕을 치렀으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의 열망과 결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늘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1987년 6월항쟁을 맞았고, 1987년을 전후로 많은 운동권 젊은이들이 인쇄를 배우기 위해 을지로에 찾아들었다. 강은기 씨는 그것을 계기로 1988년에 24명의 인쇄인들과 함께 인쇄문화운동협의회(인문협)를 발족시키기에 이르렀다. 반정부 유인물을 찍어낼 때마다 연행되거나 구류를 살던 인쇄인들이 이제는 서로 연대해서 함께 맞서자는 것이 설립 취지였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으로 민주화 운동이 변화의 급물살을 타면서 인문협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합법적인 대중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이 대안으로 모색되면서 인문협의 구성원들은 저마다 활로를 모색하느라 뿔뿔이 흩어졌고, 세진인쇄를 찾는 발길도 점점 줄어들었다. 강은기 씨가 세상을 뜨고 난 뒤, 세진인쇄는 1977년도부터 함께 일을 한 동생 강은식 씨가 맡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1980년대에 인쇄 일을 배우러 을지로를 찾아온 젊은이들 중에는 밥벌이를 위한 방편으로 인쇄를 택한 이도 있었고, 운동의 한 방편으로 택한 이도 있었다. 윤여연 씨는 후자에 속했다. 1980년도 숭실대 총학생회장이었던 그는 제적을 당한 뒤, 운동권 선전물을 안정적으로 인쇄할 공간이 절실하다는 생각으로 을지로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세진인쇄였고, 강은기 씨 밑에서 20여 일 동안 일을 배우고 1984년 4월 9일, 대동인쇄를 차렸다.


인쇄 공정을 20일 만에 배울 수는 없을 터, 윤여연 씨의 주 임무는 유인물 물량을 받아오는 것이었고, 인쇄와 제본 등의 실제 작업은 다른 인쇄소에 하청을 주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2층짜리의 조그만 건물 위층을 임대해 만화가게로 위장한 인쇄소를 냈는데, 공안 당국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고물 인쇄기와 청타기만 들여놓고 그곳은 연락 사무소로 사용했다.

 

나중에는 원통골목 쪽에도 연락 사무소를 두어 군데 더 차릴 만큼 제작해야 하는 물량이 급격히 늘었고, 그만큼 정부기관의 감시망도 조밀해졌

인쇄운동의 중심

앞서 스케치한 현재의 재개발 구역이자 옛 을지로 인쇄골목의 한 모퉁이에 처음 문을 연 대동인쇄 건물은 다행히 아직까지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는 용케 버티고 있는 건물을 보고 적이 놀라워하며 금세 감회에 젖어들었다.


“여기 2층도 다 쓴 게 아니라 반만 썼어요. 한 3평쯤 될까, 아주 작았어요. 이렇게 조그맣게 시작한 대동인쇄는 당시 반정부 유인물의 6~70%를 찍어내며 등사 시대에서 대중 홍보시대를 열었던 상징적인 곳이었어요.”
그는 자신은 물론이고 대동인쇄 일을 함께했던 인쇄인들은 인쇄운동 2세대가 아니라 1.5세대에 속한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불온 유인물이 나돌았다 하면 정보기관은 세진인쇄 아니면 대동인쇄를 지목했고, 그 또한 숱하게 연행과 구금을 당해야 했으니 그의 자부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문을 닫아걸고 밤에만 인쇄기를 돌려야 하는 일은 당연지사였고, 낮 시간에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정보과 형사나 경찰들의 눈에 띄지 않게 유인물을 꼭꼭 숨겨두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렇게 무사히 적발의 눈길을 피한 인쇄물들은 오토바이 배달원으로 하여금 시위 현장에 떨어뜨려 놓거나 엉뚱한 장소에 떨어뜨려 놓고 학생들이 몰래 찾아가도록 했다. 이 일을 맡은 배달원은 인쇄물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그저 품삯을 받는 일거리로 여기고 대개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곤 했는데, 간혹 자주 배달을 하던 ‘고정’ 배달원의 경우 나중에는 보안사에 포섭되어 일을 그르치기도 했고, 그로 인해 인쇄소 사장들이 경찰서로 연행되어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대동인쇄 직원이었던 안삼화 씨와 권순갑 씨를 비롯해 한인철, 구기엽, 김복동, 윤문희, 정정용, 최경자 씨 등 대동인쇄 식구로 통했던 인쇄인들은 20여 명 가까이 되었다. 그 중 그때부터 지금까지 을지로에서 동광인쇄소를 운영하고 있는 김복동 씨, 대흥인쇄소를 운영하고 있는 윤문희 씨 등 몇 사람 외에는 뿔뿔이 흩어져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1985년 5·3인천항쟁 관련 유인물을 찍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동인쇄는 결국 2년 남짓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당시 편집을 담당했던 안삼화 씨와 경리를 맡으며 맏언니 역할을 했던 권순갑 씨가 보안사로 끌려가 일주일 넘게 고문을 당했고, 그 사이에 사장 윤여연 씨가 민청련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다 수배를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안사에서 풀려난 뒤로도 일년을 더 숨어 산 권순갑 씨는 아직도 고문당하던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등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한다.


이렇게 해서 대동인쇄는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지만, 윤여연 씨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점 조직망의 시스템을 다시 이용해 1987년 6월항쟁과 KAL기 폭파사건 관련 유인물을 많게는 5백만 장까지 인쇄해 시위 현장에 뿌렸다.
 

 

 

“<모이자 시청으로>라는 유인물이었죠. 들킬까 봐 무섭기도 했지만, 서울 시내를 뒤덮은 군중들을 보면서 인쇄를 통해 운동을 하겠다던 그 동안의 노력과 시련이 드디어 열매를 맺는구나 싶어 감격스러웠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유인물들을 한 장씩이라도 남겨두지 못한 것이 참 후회스러워요. 물론 그 시절에야 어디 무서워서 따로 보관할 생각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지만, 그게 다 사료인데 말이에요.”
그렇게 명맥을 유지하던 대동인쇄는 1991년 을지로에서 완전히 간판을 내리게 되었다.

인쇄인들의 역할

1년 전에 옛 인쇄골목에서 원통골목으로 이사한 대흥인쇄소에는 20년 전에 대량 유인물이 가능케 했던 귀한 인쇄기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당 1만 장 이상을 찍어내던 마스터기와 오프셋기가 그것인데, 중간에 폐기처분될 위기까지 맞았으나 용케 잘 넘기고 앞으로도 10년은 거뜬히 견딜 수 있을 것처럼 의연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인쇄물을 압수당하기도 여러 차례 겪었고, 서너 번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한 윤문희(57) 씨는 다 대동인쇄가 있었으니 그런 일을 하게 된 것이라며 자신은 언론에 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겸손해 했다.


“나는 생업에 종사했을 뿐이지 뭐. 끌려가더라도 먹고살라니 별 수 있냐고 하면 3, 4일 만에 풀어주고 그랬어요.”
위험수당을 얹어서 받긴 했어도 잘못 하다가는 목숨까지 왔다갔다하는 위험한 시대 상황인데, 선뜻 일을 맡기란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시대로 봐서는 많은 사람들한테 알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했죠. 내가 배운 게 인쇄고 그걸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했어요. 특히 잊을 수 없는 게 박종철 사체 사진인데, 세상에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싶었어요. 그걸 전국에 뿌리려고 칼라로 찍고 있으면 머리가……. 어휴! 광주학살 사진도 그랬고…….


 

 



그는 그 당시의 기분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내가 본 그 사진들을 바로 이곳에서 찍었구나 싶어 알은 체를 하며 한편으론 반가운 마음이, 또 한편으로는 나 역시 그 시절의 참혹한 민중학살을 직접 본 듯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제야 위험을 감수하며 주문을 받아오고, 야밤에 편집을 하고 인쇄기를 돌리고 인쇄물을 나르던 인쇄인들의 역할이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비로소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지하 언론이 필요 없는 대중운동 사회가 되었지만,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언론매체와 정보 속에서 정의와 진실을 찾기란 그 시절보다 오히려 더 힘든 일이 되었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작은 목소리라도 낼라치면 급격히 보수화되어 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대다수 언론들은 싸늘하게 눈길을 돌리기 일쑤지 않은가.


나는 암울했던 시절을 넘어서기 위해 스스로 불쏘시개로 살았던 고(故) 강은기 씨와 윤여연 씨를 비롯한 많은 인쇄인들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을 남긴 채 겨울 찬바람이 골목골목 휘도는 을지로 인쇄골목을 빠져나와야 했다.

※ 고(故) 강은기 씨에 관한 부분은 『희망세상』 2005년 5, 6월호 <시대의 불꽃> “인쇄는 나의 힘 강은기” 편(글 김기선)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류외향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1996년 대구 매일신문으로 등단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가 있음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에서 활동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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