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동일방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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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1일 05시 30분, 출근하는 조합원들이 회사의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노동조합 사무실안에서는 때려 부수는 소리와 함께 여자 조합원들의 비명소리가 고요의 새벽하늘을 뒤흔들었다. 40여 개의 투표함은 몽둥이로 모조리 때려 부서졌고 노동조합 사무실의 모든 기물은 전부 파괴되었으며 회사 측 조정을 받은 5~6명의 남자들은 미리 준비한 방화수통에 똥을 담아 가지고 와서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선거하러 들어오는 여자 조합원들에게 닥치는 대로 얼굴에 문대고 똥을 쳐 발랐다.(중략) 그리고 금남의 지역인 여자 기숙사까지 쫓아가 그 짓들을 하구도 직성이 안 풀렸던지 똥을 담았던 방화수통을 오 모 양의 머리에 뒤집어씌운 것을 보고 “경찰 아저씨 도와주세요.”하니 구경만 하고 있던 경찰은 “야, 이 ××아 입 닥쳐. 이따가 마를 거야.” 하며 오히려 욕설만 퍼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후략)” -『인천 동일방직노동조합 폭동과 똥물사건 경위』 중에서
동일방직 노동조합운동은 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 중 가장 끈질기고 치열한 투쟁 중의 하나였다.
동일방직의 노동운동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72년 한국 최초로 여성 지부장이 탄생하면서부터였다. 동일방직에 근무하는 다수의 여성노동자들을 소외시킨 채 회사 측과 적당히 타협하고 있던 어용화된 남성 독점의 노조를 깨고 노동자의 권익을 우선시 하는 새로운 모습의 노조 집행부를 구성한 것이다. 이후 동일방직 노조는 여성 지부장의 선출과 더불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
여성 지부장 선출로 시작된 변화 동일방직의 노조가 이처럼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조합으로 변한 데에는 도시산업선교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1966년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조화순 목사를 동일방직에 들어가 노동자와 함께 생활하며 선교활동을 벌이도록 하였다. 조화순 목사는 취업기간 동안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저임금, 장시간 노동, 열악한 작업환경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고 노동현장의 문제점들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소그룹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소그룹 활동을 통해 동일방직의 여성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획득하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노동조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민주노조가 건설되자 회사 측은 노조 간부에 대한 해고, 매수, 사표 강요, 부서 이동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탄압하였고 1976년 2월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는 노골적으로 노조를 파괴하려 하였다. 회사 측은 비교적 쉽게 회사 측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남자 조합원들을 이용하여 이들이 대의원이 되도록 적극 지원하였고 대의원이 된 남자 조합원들은 몇 달 간이나 정기 대의원대회를 무산시키면서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을 시도했다. 사태는 점차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지부장 이영숙이 노조원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유인물을 배포하였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된 가운데 1976년 7월 23일, 고두영을 비롯한 남자 대의원들은 기숙사 강당 문을 걸어 잠그고 자파 대의원들만으로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집행부 불신임안을 통과시킨 후 고두영을 신임 지부장으로 선출하였다. 이에 노조원 200여 명은 노조 사무실 앞에서 철야농성에 돌입하였고 다음날엔 농성자 수가 8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회사가 노조 사무실과 기숙사의 수도와 전기를 모두 끊어버린 악조건 속에서도 ‘이영숙 지부장을 석방하라’, ‘회사는 자율적인 노조활동에 개입하지 말라’, ‘7·23 대회는 무효다’, ‘무릎을 꿇고 사느니 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등을 외치며 농성을 계속하였다. 농성 3일째인 7월 25일 오후, 완전무장한 전투경찰이 농성장에 진입하여 노조원들을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 노조원들은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작업복을 벗어들고 ‘노총가’를 부르며 저항하였으나 약 30분 만에 경찰에 의해 완전 진압되었고 72명이 연행되었다. 이날 노조원 50여 명이 졸도했고 14명은 병원으로 실려 갔으며 2명은 심한 충격으로 6개월 간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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