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WCA 위장 결혼식 사건 통대선출저지 국민대회 며칠 전 필자는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필자와 동료들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담소의 주제는 ‘결혼’이었다. 담소를 나누던 중 위장결혼이라도 해서 부모님의 성화로부터 벗어나자는 농담이 나왔는데, 그 농담을 들은 한 동료가 예전에 집회할 때 결혼식을 가짜로 꾸며서 한 적도 있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자연스레 화제는 그 집회 이야기로 옮겨졌 다. 그 집회는 소위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으로 알려진 ‘통대선출저지 국민대회’였다. 필자는 ‘통대선출저지 국민대회’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인터넷을 검색하게 되었고, 사료관에 관련된 기록물이 있는지 찾아보게 되었다. 우선 기록물을 소개하기에 앞서 ‘통대선출저지 국민대회’에 대해서 짤막하게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위장 결혼?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10월 27일 대통령 대행에 최규하 총리가 임명되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1월 10일 최규하 대통령 대행은 ‘유신헌법대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고 그 후 민의를 모아 개헌을 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 담화는 민주세력들에게 유신독재체제를 고수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민주세력 일각에서는 유신체제의 청산과 민주헌법 제정을 위한 군중집회를 개최하자는 결의가 있었으나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던 터라 모든 집회는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이들은 집회를 열기 위한 방식을 생각하던 차에 5·16 쿠데타 직후인 1962년 서울예식장에서 결혼식을 가장해 ‘군정 연장 반대시위’를 벌였던 적이 있었음을 상기하고 ‘위장결혼식’을 생각해내게 되었다. |
이 위장결혼식은 ‘통대선출저지 국민대회’를 위해 가상으로 기획되었다. 신랑은 홍성엽 씨가 자임하였고, 신부는 민정(民政)이란 말을 뒤집어 ‘윤정민’이라는 가상의 인물로 만들어졌다. 통대선출저지 국민대회의 대회장에는 함석헌 선생, 준비위원장에는 양순직·박종태 전 공화당 국회의원, 김병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 백기완 백범사상연구소장, 임채정 동아투위 위원 등이 추대되었다. 1979년 11월 24일 오후 5시 30분에 명동에 위치한 YWCA 1층 강당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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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입장과 동시에 사방에서 여러 종류의 유인물이 살포되었고, 이어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반대한다는 취지문이 박종태 전 공화당 국회의원에 의해 낭독된 후, 통대선출 반대, 거국민주내각 구성 촉구 등의 구호를 김정택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회장이 선창하고 참석자들이 복창하였다. 이때 이미 대기 중이던 계엄군이 들이닥쳐 참석자들을 끌어냈다. | 대회장에서 빠져나온 참석자의 일부는 코스모스백화점 앞에 모여 “유신 철폐”, “통대선거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열을 만들어 조흥은행 본점까지 가두시위를 벌였으나 계엄군에 의해 일부는 잡히고 나머지는 해산되었다. 계엄군에 의해 체포된 사람들은 처음에는 포고령 위반(불법 집회와 시위)으로 연행되었으나 다음날에는 내란음모로 그 혐의가 변했고, 수사 과정에서 참혹한 구타와 고문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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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독재 연장 반대
필자가 사료관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기록물들을 찾아보니 ‘통대저지를 위한 국민선언’, ‘거국민주내각 구성을 위한 성명서’, ‘1심 최후진술서’, ‘사건 이후 작성된 성명서’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통대저지를 위한 국민선언’과 ‘거국민주내각 구성을 위한 성명서’가 눈길을 끌었다. 우선 ‘통대저지를 위한 국민선언’은 대회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 중요한 사료이다.
‘선 대통령 선출, 후 개헌’이라는 기만적인 정치일정을 내걸고 유신독재의 연장을 획책하고 있는 유신잔당들의 가증스러운 음모를 단호히 분쇄하고 민권의 승리를 확고하게 보장하기 위한 전 국민적인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기 위해 여기에 모였다.
이와 함께 당시 대회 참가자들은 선언문을 통해서 통대저지 및 유신철폐, 거국내각수립 등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거국민주내각 구성을 위한 성명서’는 위의 선언문에서 제시한 결의문의 내용 중 김종필-최규하 체제에게 요구했던 사항들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당시 참석자들은 이 성명서를 통해 통일주체국민회의, 유신정우회, 민주공화당은 자진 해산할 것, 개헌 후 총선을 치룬 다음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 반민중적 부패특권분자들을 심판할 것, 각계각층의 민중을 공정하게 대표할 수 있는 인사들로 구성된 거국 민주내각을 구성할 것, 민주화에 관한 외세의 간섭을 일체 거절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앞의 두 기록물을 통해서 이 대회의 목적과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면, 대회 개최 이후에 작성된 관련 단체들의 성명서를 통하여 대회 개최 이후의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알아볼 수 있다. 회장, 총무, 간사가 이 사건으로 구속된 EYC의 당시 성명서를 보면 아직껏 가족 이외에는 면회조차 금지시켜왔는가 하면 피고인을 출석시키지 않은 채 재판을 진행시키기까지 하는 실정이다.(4월 8일 고등 군법회의 시) 라고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못 했던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YWCA 사건 관련자를 석방하라’ 라는 성명서에서는
박정권 하에서 조차 유례가 없던 고문으로 백기완 민주인사 같은 분은 지금 감옥에서 사경을 해매이고 있다. 최소한의 인도적 견지에 의한 병보석 청원마저 현 정권은 거부하고 있다. 라고 참혹했던 당시 인권침해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관련해 ‘백기완선생을 살립시다’라는 성명서를 보면 고문으로 인해 백기완 선생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런 자료는 당시의 고문이 얼마나 잔인하고 가혹했는가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제 ……
앞서 소개한 기록물들은 당시 유신체제의 부활을 막기 위한 민주세력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즉 통대선출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는 당시 민주세력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박정희의 공백을 기존 유신세력들이 메워나가고 있었다는 사실과 유신정권 대신 폭력적인 군사정권이 새로운 국가권력의 실체로 등장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더불어 이 사건은 계엄철폐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과거 정치지배층들의 비민주적인 행태에 대항한 민주운동의 한켠을 되짚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가볍게 차 한 잔하면서 나눈 담소 속에서 과거의 이 엄청난 사건을 접하게 된 필자는 무심코 지나칠 수 있었던 관련 사료들을 직접 접할 수 있어서 기뻤다. 한줌의 이야기 거리로, 아니면 역사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이 사건을 중요한 사료를 통해서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다만 필자가 좀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이렇게 귀중한 기록물들이 부식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인 사건을 후대에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 우리는 그 사건과 관련된 기록물을 보존해야 한다. 2079년 11월 24일 후대가 100년 전을 기억할 수 있도록 기록물을 남기는 일은 1979년 11월 24일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신 분들을 위해 현재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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