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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와 조용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하여

민족일보와 조용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하여

 


 

민주화운동 관련 사료는 지나간 민주화운동의 역사들을 말하고 있다. 그 낡은 종이 한 장 한 장, 빛바랜 깃발과 사진 속에서 민주화를 향한 갈망과 외침과 뜨거운 함성들이 아우성치며, 투옥과 수배와 죽음도 마다않던 투쟁과 저항이 거친 숨으로 꿈틀댄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빛바랜 종이 한 장이 천근의 무게로 다가와 민주화와 통일의 뜨거운 염원으로 그날을 얘기하며 오늘을 묻고 있다.
지난 5월 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과거사법)의 국회 통과로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개정 논의가 한창인 무렵, 사업회에 소중한 사료가 수집되었다. 현재 통과된 과거사법 논란의 핵심사안 중 하나인 ‘조용수와 민족일보’ 관련 사료이다. 이 사료는 『조용수와 민족일보』 저자인 원희복 선생이 집필을 위해 수집,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민족일보진상규명위원회의 도움과 원희복 선생의 기증 동의로 수집되었다. 2003년 민족일보진상규명위원회의 민족일보 관련 사료 기증, 2003년 민족일보 관련자 조용준 선생과 김자동 선생의 구술에 이어 세 번째 수집이다.
이번에 수집한 사료는 조용수 개인과 관련된 사료와 민족일보사 관련 서류 및 국회 자료, 재판 자료 등 약 한 상자 분량이다. 민족일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주기에는 부족하지만 이 사료들은 조용수 개인의 삶의 궤적과 함께 민족일보의 정신과 사업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료로 보는 조용수와 그의 삶
민족일보 사건으로 5·16 군사정권에 의해 32세 때 사형당한 조용수는 1930년 경남 진양 태생이다. 6·25전쟁 시기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메이지대 정경학부에 편입한 조용수는 민단에서 일했으며 1956년에는 재일동포 북송반대운동, 1959년에는 조봉암 석방운동에 앞장섰다.
4·19혁명이 일어나자 조용수는 국내로 들어와 사회대중당 후보로 경북 청송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조용수는 진보정당의 필요성과 평화통일론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신문 발행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감하고 19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하게 된다.
조용수 개인과 관련된 사료로는 신원증명, 호적등본, 인감증명, 대륜중학교 졸업장, 진주중학교동창회 자료 등 개인 증명과 중학교 시절 사료가 있으며, <소화 35년 주소록>은 일본유학시절의 것으로 그 연락처를 통해 당시의 친분관계 등을 추적할 수 있다. 또한 1961년 사회대중당 후보 출마와 관련된 선거 공약문과 홍보지, 선거구에 뿌렸던 원고 등이 있다. 200자 원고지에 적힌 선거구에 뿌렸던 원고는 조용수의 친필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수감시절 및 재판 관련 자료로서 상고 이유서, 판결문, 형 집행확인서, 사망진단서와 영치물품 차입 전표 등이 있다.
수집된 사료를 살펴보면, 재판 과정에 대한 사료가 부족하여 조용수 사장의 죽음에 대해 사실적으로 확인하는 것 외에는 설명하기 힘들다. 단지 조용수 사형 판결 이후 해외에서 뜨겁게 일어난 구명운동과 국제신문협회, 국제펜클럽 본부 등의 항의성명과 워싱턴포스트 등의 비난 기사와, 조용수가 사형된 직후인 1962년 1월 국제저널리스트협회가 조용수에게 ‘국제 기자상’을 추서했다는 사실로도 조용수 사장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를 알 수 있다.
또한 조용수에게 북한의 공작금을 건네주었다고 지목되었던 이영근 씨는 1990년 정부에 의해 국민훈장을 받아, 민족일보 사건은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었던 바대로 군부세력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사료로 보는 민족일보
민족일보는 제2공화국 당시인 1961년 2월 13일 석간신문으로 창간되었다. 민족일보는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노동대중의 권익을 보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하는 신문’ 등 네 가지를 사시로 정하고 4?19혁명이 가져온 자유의 공간에서 우리 민족의 비원인 통일 문제와 소외된 근로대중에 대해 집중적으로 지면을 할애했다.
4·19 공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혁신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민족일보는 과감한 논설과 보도로 창간되자마자 독자들의 선풍적 관심을 끌었다. 민족일보는 남북협상과 남북 간의 경제·서신 교류 실시 및 남북 학생회담 개최, 중립화 통일·민족자주통일의 추진 등 당시 혁신계가 내세우고 있던 주장을 적극 지지하는 논조를 폈다. 민족일보는 한 달도 안돼 당시 유력지들이 5만 부 정도를 발행할 때 3만 5천 부를 발행했으며, 가판에서는 판매 1위를 달릴 정도로 대단한 관심과 인기를 모았다.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민족일보는 반국가적·반혁명적 신문이라는 이유로 발행을 정지당하여 92호를 마지막으로 1961년 5월 19일 강제 종간되었다.
민족일보 관련 사료로는 사업계획서, 정관, 주주 명단, 기자들의 사령장, 기자 명단, 각종 서류양식, 각종 영수증, 민족일보 조사부의 사진자료 등이 있다. 주주 명단에는 이종률, 윤길중, 서상일, 고정훈 등의 이름이 명기되어 주주들의 면면을 통해 민족일보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민족일보 전용 원고지이다. 갱지로 된 200자 원고지의 옆면에는 ‘(※이 고지에는 계도성 높은 민족일보의 논설만을 쓴다)’라고 기입되어 있어 민족일보의 드높은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독자의 서한으로도 민족일보의 성격과 정신을 확인할 수 있는데, 독자의 서한은 4·19 1주년을 맞아 신문의 글을 보고 느낀 감동 등과 함께 민족의 일꾼이 되고 싶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외에 1961년 민족일보의 혁신적 성격으로 정치쟁점화 되었던 당시의 국회 민의원, 참의원 회의록 철이 있다.
재판과 관련하여 갱지에 등사된 형태로 민족일보의 비용공성을 입증하기 위해 재판부에 제출한 135쪽 분량의 자료가 있으며, 그 외 재판 관련 서류로 추정되는 잉크로 쓴 기록 등이 있다.
해산과 관련한 사료로 압수금품 현 시가표 및 총사본, 주식회사 해산 신청서, 해산 관련 위임장, 해산 청산인 선임 결정 등이 있으며 위임장 등의 서류들은 대부분 감옥에서 작성된 것으로 윤길중, 이종률 등의 주주들의 무인과 간수 부장의 확인이 되어 있어 집행의 강제성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역사의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현재 통과된 과거사법에 의하면 과거 독재정권 하에서 고문, 조작으로 악법을 악용하여 무차별적으로 처벌받아온 민주인사를 재조사하게 되며, 더욱이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은 조사 대상에서 제외된다. 예컨대 엄청난 고문과 조작으로 사형선고 20시간 만에 8명에게 사형을 집행하여 국제적으로도 큰 물의를 일으킨 인혁당 사건, 4·19 이후 진보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진보적인 신문 민족일보를 폐간하고 사장 조용수를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킨 민족일보 사건, 동백림 사건, 통혁당 사건, 중부노동당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등이다.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하다 국가폭력에 의해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분들의 명예회복과, 왜곡되고 은폐된 진실의 규명은 현재의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우리가 보다 참다운 민주화와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사료는 역사를 말한다. 올바른 진상규명과 민주화운동 역사 정리를 위하여 민족일보를 비롯한 의혹사건들뿐 아니라 민주화운동 관련 사건에 대한 광범위한 사료수집과 사료로 밝혀낼 수 없는 내용들을 확보하기 위한 증언, 조사 작업이 요구된다.
사료를 기증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양경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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