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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귀청을 찢는 저 총소리가 들립니까? (……)살인집단 공수부대가 도청을 사수하는 우리를 죽이겠다고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몇 시간 후 (……)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살아서는 두 번 다시 얼굴을 못 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두려워 마십시오! 광주 시민이 우리를 기억할 겁니다. 우리의 죽음이 곧 살아 있는 역사로 기록될 겁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과의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전남도청에서 윤상원 열사가 뿜어낸 포효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비극으로 기록되고 있는 5·18민중항쟁(5·18)은 피의 진압에 의해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5·18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으로 살아 움직였다.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상황에서도 나눔과 대동을 꽃피운 80년 5월의 광주를 당당히 지켜낸 정향자(53) 노동실업광주센터 소장을 전남도청 가까이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5월 당사자들, 특히 앞장서서 싸웠던 사람들은 그 당시 얘기를 꺼려합니다. 그때 봤던 것들이 너무 생생하게 생각나고 되살아나 아직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 때문이지요.” 총칼이 난무하고 유혈이 낭자했던 광주를 외면할 수 없었던 그의 용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5·18은 준비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필연적인 조건이 있었다.”며 그는 말을 이었다. “70년대 초부터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활동을 하면서 노조 활동을 했습니다. 70년대 말은 희망이 넘쳤던 시기였죠. 엄혹한 유신체제가 붕괴되면서 대중들이 우리를 지지해 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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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에 이 지역 최초의 여성단체인 ‘송백회’가 생기고 노동운동도 농민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의 테두리 안에 결집해 있었어요. 그런 토대가 닦였기에 지도부라는 사람들이 숨거나 빠져 나갔어도 10일 동안 광주를 지킬 수 있었지요.” 전남제사노조 위원장으로서 5·18을 맞았던 그는 무엇을 했을까? “도청과 그 근처에 있었던 YWCA, JOC 사무실이 있었던 가톨릭센터를 오갔습니다. <투사회보>를 등사하여 뿌리고 붙이고 ……. 붙이다가 계엄군의 대검에 찔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더 많이 담아가려고 몸빼를 입고 20대 여성 노동자들이 그런 일을 했어요. 도청에서 보급담당도 했지요. 5월이고 비가 많이 왔지만 신 김치가 없었어요. 양동과 대인시장 아줌마들이 매일 싣고 왔어요. 말 그대로 대동이었지요. 멀리 화정동까지 가 본 적이 있었는데 큰솥에 밥을 하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쌀과 김을 걷어다가 주먹밥을 만들더군요.” 5·18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다 중심 주체였다고, 사람에 대한 자발적인 배려와 연대의 아름다움이 곳곳에서 묻어났다고 말을 보탰다. 당시에 겪었던 여러 일들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시신 접수였다고 한다. 무참하게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시체의 상태는 너무 끔직해서 얼굴만 보고는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관이 부족하여 비닐로만 덮어 놓은 것도 많아 바쁘게 오가면서 밟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몇 개월 뒤부터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관이 벌떡 일어나서 다가오지를 않나, 시체를 밟았을 때의 물컹한 기분 때문에 몇 년 동안 가위눌려 살았어요. 칼로 찌르려는 흰 옷 입은 할아버지, 벽에서 나와 칭칭 몸을 동여매는 구렁이들……. 해마다 4월 정도만 되면 두드러기가 일어나고 가위눌림이 심해졌어요.” 20년이 지나니까 가위눌림이 줄어들었다는 그는 그 전까지 밤마다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잠은 쏟아지는데 눈을 감을 수 없는 고통의 시간들이었다.
자발적 배려와 연대의 아름다움 도청이 계엄군에게 짓밟히기 전날이던 26일 저녁, 생리통이 너무 심했던 그는 잠시 작은집에서 쉬기 위해 도청을 벗어났다. 한번도 진다는 생각을 안 해서였는지 도청을 바라보며 그 와중에도 평화와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청이 계엄군에게 무너지면서 그 평화와 자유도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던 시민군들의 고귀한 생명과 함께 스러져 갔다.
5·18 이후 자신의 몸도 지키기 힘들었지만 원풍모방노조에서 지원해 준 470만 원으로 다른 사람들의 도피자금을 대주는 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갈수록 좋지 않아 그도 더욱 깊숙이 숨어 지내야 했다. 이런 생활을 1년 남짓 한 후 그와 같이 일했던 신부님이 감옥에서 나온 것을 계기로 더 이상 숨지 않기로 했다. 5·18을 치열하게 뚫고 지나 왔으나 그는 명망가가 아니었기에 위험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5·18 때의 활동을 회사나 주변에서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던 시간들은 그 이후로도 꽤 지속되었다. 1년 정도의 도피생활을 끝내고 뭔가 하고 싶었지만 다시 일하는 사람도 없고 그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치고 우울해져 위로 받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고 한다. 그때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JOC 활동을 열심히 하는 그를 눈여겨봤던 한 신부님이 친동생을 소개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다. 81년 5월 18일에 ……. 결혼을 했지만 십 년 넘게 노동자로서 살아온 삶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안정적으로 더 열심히 하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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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후유증과 결혼 결혼이라는 인연까지 가져다 준 그의 JOC 활동은 어땠을까? 1970년에 우연히 신문에서 여공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본 그는 몇 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전남제사에 입사했다. 높은 경쟁률 때문에 기대가 컸으나 공장일은 너무 힘들었다. 매일 울며 회사를 다니면서 자신은 다른 노동자들과는 다르다는 교만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우연히 성당에 나가게 되고 JOC 활동을 하면서부터 이런 생각은 바뀌게 되었다. “JOC에서 공부를 하면서 노조가 좋았고 나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보니 노동자 의식이 절로 생겨났습니다. 그 뒤로는 회사생활도 적극적으로 하고 일도 열심히 하여 반장이 되었지요. 반장이 되니까 사람들을 조직하기가 쉬워져 JOC의 공부 모임도 많이 만들 수 있었어요.” JOC에서는 공부 모임 과정을 다 마치면 투사 선서식을 하고 지도 투사가 되는데, 그는 지도 투사가 되어 19명의 지도 투사를 만들어냈다. 한 사업장에서 그렇게 많은 인원이 배출된 것은 전국에서 처음이었다고 한다. 뛰어난 조직가였던 그는 마침내 1974년에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강력한 상대 후보를 누르고 노조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의 삶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공부 모임을 너무 많이 운영하여 그에게 개인적인 생활은 거의 없었다.
생각의 전환, JOC 활동 민주화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의 남편이 노조활동을 열심히 하는 그를 이해할 리 만무했다. 교육이다 회의다 하며 서울에 가서 보름 가까이 있는 때도 있고 밤늦게 들어오는 경우도 다반사이고 어쩌다 집에서 마주할라치면 사람들을 몰고 들어오니 어떠했겠는가. 결혼 전에 몇 가지 조건을 내걸기는 했지만 현실은 서로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5,6년 동안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그래도 다행히 신뢰가 생겨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살면 살수록 좋은 사람, 귀한 사람, 고마운 사람입니다. 부드럽고 섬세한 역할을 잘해줘서 두 아이가 영성적으로 잘 자라줬어요.” 1984년에 전남제사를 그만둔 뒤에도 광주노동운동협의회 활동, 천주교광주대교구 가톨릭노동상담소 활동을 계속 이어가면서 그는 노동운동의 한길에서 광주를 떠나지 않고 있다. 80년 그때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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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최초로 실직자 쉼터를 운영하기도 했던 그는 행려병자가 되기 전에 지원을 해야 경제적으로도 적은 비용이 든다며 노동과 복지는 결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빈곤과 실업문제가 해결되어야 우리 사회의 내적 분열을 막을 수 있다며 지금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놓지 않고 있는 정향자 소장. 그의 명함에는 광주동구 자활후견기관 관장과 노동실업광주센터 소장이라는 직함이 새겨져 있다. 정향자 소장이 목숨을 걸고 그토록 지키려 했던 80년 5·18민중항쟁이 올해로 25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고 더불어 5·18에 대한 인식도 함께 변화했다. 한때 폭도들의 난동으로 매도되었던 5·18은 이제 명예가 회복되어 한국의 민주화운동사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민주화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투쟁의 하나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
| 그렇다고 5·18을 온전히 기억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것이 간단치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5·18 당시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모습이 아닐까.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의 권력 장악 음모에 맞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항거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단결된 힘으로 계엄군을 일시적으로나마 물리친 상황에서 나눔과 자치 그리고 연대에 기초한 민주적인 자치공동체의 모습을 수준 높게 보여주었다.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을 소중한 역사적 경험을 남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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