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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통제를 뚫고 유신 이후 5.18까지를 알린 THE FACT SHEET

보도통제를 뚫고 유신 이후 5.18까지를 알린 THE FACT SHEET

1972년 ‘10월유신’ 이후 1980년 5·18민중항쟁까지 격동기 한국의 상황을 생생하게 알 수 있는 팩트 시트(FACT SHEET)라는 보고서가 있다. 이것은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한국인에 의해 작성된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독일, 캐나다, 프랑스, 벨기에, 호주, 미국, 일본 등 너무도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모여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만들었다.
바로 이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월요모임(Monday Night Group)’이다. 슈라이스 부부(Sue and Randy Rice), 루이스 모리스(Louise Morris), 문동환 목사 부부를 포함한 여러 명의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팩트 시트를 작성하였다.
팩트 시트는 1973년 짐 스텐즐(Jim Stentzel) 씨가 제안하여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보고서는 ‘월요모임’의 구성원들이 미 대사관 관계자, 정부기관의 관계자 혹은 외신기자 친구들로부터 수집한 한국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정보들을 서로 나누고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들은 주로 미군 도서관과 해외통신 및 저널 그리고 한국에서 발행한 성명서, 유인물 그리고 사건의 관계자들인 구속자 가족이나 당사자를 통해 들은 이야기들을 수집하였고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건을 조명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정보들과 함께 이 보고서를 받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 가에 대한 그들의 제안도 정리하여 함께 실었다.
예를 들면 미 의회에 항의방문을 한다던지 항의 편지를 한국의 관련 기관에 보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완성된 보고서는 필요에 따라 한국에서 발행된 성명서, 탄원서, 호소문과 신문기사를 번역하여 함께 묶음으로써 하나의 팩트 시트로 완성되었다.

 

73년부터 81년까지 "월요모임"이 발행
팩트 시트의 편집인 역할은 루이스 모리스 씨가 맡았다. 그는 정리된 내용을 최종 점검하여 최종 본을 작성하였고 이를 인쇄하여 정기적으로 미국, 캐나다, 일본, 독일 등지로 배포하였다. 팩트 시트는 특히 한국을 지원할 수 있는 교회 관계자들이나 외국의 저널리스트들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이 보고서는 한국으로 이주해 온 외국인, 선교사, 사업가 그리고 한국에 머무는 또 다른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해 활용되었고,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주화 운동가들에게도 좋은 정보원이 되었다.

 

 
팩트 시트는 약 9년간에 걸쳐 발행되었다. 첫 번째 보고서는 1973년 박형규 목사의 투옥에 관련된 내용으로 그해 9월에 발행되었다. 주요하게 다룬 이슈들은 민청학련, 인혁당, 김지하, 김대중, 포드 대통령 한국 방문, 정치범 석방, 빅토리아 숄 이야기, 한국 여성근로자들의 어려운 상황 등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고, 1981년에 63번째 팩트 시트 발행을 끝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월요모임’은 1970년 초에 만들어진 50인 모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시위하는 학생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는 페퍼포그와 최루탄에 정확히 적힌 ‘MADE IN USA’는 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이것을 계기로 한국의 비민주적인 상황과 이러한 정부를 지원하는 미국의 관계에 대해 미국인으로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72년 폭압적인 10월유신 이후 모임이 정착되었고 ‘월요모임’으로 발전하였다.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고자
‘월요모임’의 주된 활동은 첫째로 한국의 상황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진실을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었다.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것들이 앞서 말한 팩트 시트이다. 또한 <뉴욕타임즈>, <크리스챤 사이언스> 등의 해외 저널리스트들과 한국의 재야인사, 고문 당한 학생들, 구속자 가족들을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도 하였다. 그들이 서로 안전한 장소에서 만날 수 있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대화를 통역해 주는 역할도 하였다. 
 


실제로 이들은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을 알리기 위해 기자들을 시장으로 데려가서 노동자들과 직접 인터뷰를 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하였다. 또한 가혹한 고문을 받았던 학생들과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를 만나게 해주었는데 그 내용이 <워싱턴 포스트>에 실리기도 했다.
두 번째로 이들은 추방당할 각오를 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담은 당시의 문건, 문서, 성명서 등의 자료들을 해외로 안전하게 옮기는 역할도 하였다. 이 자료들은 한국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선교사, 기자, 사업가들의 여행 가방을 통해 일본과 미국 등 박정희 정권의 손이 미칠 수 없는 곳으로 이동되어 보관되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민주화를 위해 애쓰는 한국인들과 함께 투쟁했다. 이들은 한국의 민주화에 동참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해외인사들과 동료들의 연대를 통해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한국인들의 구명운동과 지원금 마련 등을 위해 활동하였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애쓴 외국인 모임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함으로써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준 ‘월요모임’의 구성원들은 그들에게 누구보다도 든든한 친구이며, 보호자였다. ‘월요모임’에 함께했던 그들에게 “왜 그렇게 행동하셨습니까?” 라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질문했다고 한다. 이는 편안하게 살 수 있는데 왜 굳이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 일에 힘을 쏟고 있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시노트 신부의 자서전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들의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저는 제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 목소리는 제가 해야 할 일들을 알려줍니다.”

 
<전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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