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된 국가 아프가니스탄,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아프가니스탄이 우리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탈리반이 행한 연이은 극단적인 엽기적 행위들로 인해서였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음악, 오락, 놀이 등을 금지하면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모두 빼앗아버렸다.
여성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옷인 부르카를 반드시 착용해야 하고, 직업을 일절 가질 수 없으며 남편이나 부모가 동반하지 않는 한 절대 외출도 할 수 없게 하였다. 남성에 대한 규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면도를 금하는가하면 서양식 복장도 절대 하면 안 되었다. 반드시 하루에 다섯 번 기도를 하되 특별한 예외가 있지 않는 한 이슬람 사원에 모여야 했다.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로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행위 또한 엄격하게 금지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인류 문화의 보고인 바미얀 석불이 무참하게 파괴되어 버렸다. 정해진 부르카를 입지 않은 여성이나 턱수염을 기르지 않은 남성에게 채찍질을 하고, 간통죄를 저지른 사람은 돌로 쳐 죽였다. 어떻게 이런 무지막지한 권력이 20세기 현대 세계에 등장할 수 있었을까?
제국주의가 만든 완충국,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은 지정학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십자로 상에 있다. 이란·사우디아라비아의 중동, 인도·파키스탄의 남아시아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 등장한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들 사이에 절묘하게 끼어 있다.
이 나라에 처음 군침을 흘린 것은 러시아와 영국이었다. 그들은 몇 차례의 내정 간섭과 전쟁을 치른 후 이 나라를 완충국으로 ‘독립’시키는 것을 ‘허락’하였다. 완충국이야말로 두 당사자를 떨어뜨려 놓기에 충분하고 동시에 자신들과 적대적 관계에 놓일 수 있는 각 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매우 적합한 체제였기 때문이었다. 완충국으로서의 아프가니스탄은 필연적으로 외세의 화폐와 무기에 종속되게 되어 있었다.
영국과 러시아 제국의 뒤를 각각 잇는 미국과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이 완충국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에 만족하면서 상호 협력을 모색하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외세에 의해 결정된 정치 체제는 국가와 사회를 이루는 여러 관계들 사이를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특히 부족 관계에서 그러하였는데 주요 부족들이 외세와 결탁하여 갈등을 일으키는 전통이 생겼다. 그것은 아프가니스탄이 비록 하나의 국민국가라는 체제 하에 있지만, 본질적으로 국민국가라는 외투를 쓰기에는 너무 다양한 민족과 문화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불안한 다민족 다문화 공동체들의 국민국가라는 외투는 1978년 공산주의 쿠데타와 1979년 소련의 군사 침략으로 그 균형이 깨져버렸다. 소련군은 1989년 2월 15일까지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해 있었다. 그들은 1986년에 철군하겠다고 결정하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88년 4월 14일 서면으로 제네바 협정을 맺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 결정을 이끌어내는 과정은 1991년 소련 그 자체의 몰락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곧 1992년 4월 성전에 참여하는 전사, 이름 하여 무자히딘(Mujahidin)이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무자히딘은 또 다른 내전을 불러 일으켰다. 그 전사들은 지역과 부족의 차원에서 각 군벌을 중심으로 세를 확산하였고, 결국 그들은 각 군벌로 쪼개져 지칠 줄 모르는 내전에 내전을 거듭하였다. 그 와중에 전 인구의 30%에 해당하는 약 400만 명이 파키스탄, 이란 등지로 피난을 떠났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폐허밖에 남지 않았다.
사실 무자히딘 전사들이 소련군을 퇴각시키는 데에 결정적 도움을 준 것은 파키스탄이었고 그 뒤에서 미국이 적극적으로 군수 물자와 자금을 지원해주었다. 결국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인민민주당의 꼭두각시 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침략하였고, 미국은 그 꼭두각시 공산 정부 대신 친미 정권을 세우기 위해 개입한 것이다. 모두 자국의 이익을 위한 명백한 침략이었다. 두 침략자들은 대리전을 치르면서 아프가니스탄 개발에 소용되는 비용의 50배에 달하는 양의 폭탄을 파괴 목적으로 퍼부었다. 아프가니스탄에 남은 것은 동족상잔, 난민, 마약 그리고 테러 수출뿐이었다.
탈리반, 위기의 끝자락에서 좌절하다 아프가니스탄은 제국주의에 의해 완충 국가에서 출발하여 좌절된 국가로 끝나고 있었다. 그 좌절된 국가의 끝자락에서 등장한 것이 탈리반이다. 탈리반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작품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미국의 이슬람 세력에 대한 지지는 냉전기 미국의 세계 전략의 일환이었다. 미국은 냉전기에 제 3세계에서 본질적으로 반 공산주의적인 이슬람교가 정치화할 경우 소련에 대항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강력한 세력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그들을 암묵적으로 그러면서도 노골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런 미국의 전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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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서 맞아 떨어진 것으로 판명이 났다. 하지만 그 승리 후에 온 것은 20여 년 동안 지속된 내전과 전쟁의 일상화뿐이었다.
위기 상황에 등장한 탈리반은 과거 회귀의 방편을 택하였다. 그것은 1970년대 다우드 정권이 시도한 공화제 개혁과 1978년 공산주의 정권의 쿠데타와 14년 동안 소련의 배후 통치 등을 통해 드러난 부정부패의 만연을 일소하기 위해서였다. 이 차원에서 그들에게 유용한 도구로 활용된 것은 이슬람주의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언어나 부족 혹은 지역을 넘어 전체의 인민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범주는 오로지 이슬람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탈리반의 이슬람주의는 이슬람에 파슈툰왈리(Pashtunwali)라고 불리는 파슈툰 부족 전통의 성격을 강하게 혼합하여 만든 것이다. 파슈툰 부족의 율법과 샤리아(이슬람법) 사이에 큰 모순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지체를 하나로 통합하면서 파슈툰이라는 중심 세력의 이데올로기를 중추로 삼는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현명한 방책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탈리반에게는 국민국가로의 통합보다는 아프가니스탄 최대 권력 집단인 파슈툰족이 권력을 행사하여야 한다는 파슈툰족의 봉건적 집단주의 사고가 더 절실하였던 것이다.
탈리반을 위한 변명 |
미국은 소련이 몰락한 후 세계를 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는 유일 초강대국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세계의 평화는 오로지 그들의 이익에 결부되어야 하고, 문명과 문화는 그들의 시각과 기호에 코드가 맞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량 국가’로 낙인찍히게 되고, 이는 결국 ‘전쟁 억지’라는 전략 하에 통제의 대상이 된다. 이른바 ‘전쟁 억지’를 위한 전쟁이다. 그런데도 정작 단 한 번도 그들이 원한다는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 것은 바로 미국만이 갖는 ‘전쟁 억지’를 위한 전쟁의 본질 때문이다. 그들의 이러한 세계 전략은 결코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다만 더 큰 보복을 다짐하는 정황의 과격화만 이루어질 뿐이다. |
국민국가 아프가니스탄, 재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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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대표, 부산외국어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