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리앗의 힘도 다윗의 열정을 꺽지 못했다/독립을 향한 동티모르인의 꿈과
나는 눈물 속에서 자라났고 눈물 속에서 살고 있으며 눈물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나는 태어날 때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 19세의 어느 동티모르 청년 -
“외세와 독재의 폭압에 맞선 아시아 각 나라 민중들의 투쟁의 역사를 독자들이 알기 쉽게 써주세요.”
원래 이런 원고 청탁을 받을 때는 주관적인 경험과 감정 따위는 잠시 ‘Ctrl+X(오려두기)’해 두었다가 원고를 보낸 후에야 다시 기억 한 편에 ‘Ctrl+V(붙여두기)’해 두는 법이다. 그래야 자칫 사실을 왜곡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고, 글을 쓰다가 자꾸만 옛 기억에 젖는 바람에 마감일을 훌쩍 넘기는 ‘사태’를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9년 8월에 치러진 독립 주민투표 당시 민간 선거감시단 자격으로 동티모르에 잠시 머무른 기억 탓에, 동티모르에 관한 글을 쓰면서 자제하는데 무척이나 어려움을 느낀다. 자카르타에서 대학을 다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고향에 내려왔던 청년 칼리토. 연배가 비슷해 금세 서로를 ‘brother’라 부를 정도로 친해졌던 그 녀석은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되던 동티모르를 혼자 떠나가며 미안해하는 내게 “형은 외국인이니까,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나보다 잘 전할 수 있을 거야.”라며 등을 떠밀었었다.
아침마다 사람 좋은 얼굴로 내게 커피를 권하던 까를로스 아저씨. 자신이 친인도네시아 자치파라고 해서 나를 당황시키더니, 어느 날 단 둘이 있을 때 지갑 속에 감춰둔 독립파 정당(CNRT)의 깃발이 새겨진 스티커를 보여주며 사실은 자신도 독립을 간절히 원하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었다. 그 때의 놀라움과 콧등이 시큰해오던 느낌이란……. 아, 다들 지금은 어떻게 지낼까? 6년 전 그 지옥 같은 순간을 잘 견디고 무사히 살아 있기는 한 걸까?
400년 간의 식민지, 그리고 독립을 향한 첫 걸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북쪽으로 4백 마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1천 3백 마일 가량 떨어진 티모르 섬은 16세기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처음 서구에 알려졌다. 당시 섬의 동쪽엔 벨인들이, 서쪽엔 아토니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동서로 나뉘어 각각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후 서티모르는 제2차 세계대전 뒤 4년 동안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때 인도네시아 편이 되어 함께 싸운 후 |
무려 400년을 식민지 상태로 있었지만, 그 기간 동안 식민지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호세 라모스 오르따(1996년 노벨 평화상 수상)에 따르면, “포르투갈 인들은 비교적 토착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이해가 있었고, 지중해인 특유의 게으름, 태만 등으로 인해” 동티모르인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생활 방식을 유지한 채 살아가도록 그냥 ‘방치’해 두었다고 한다.
학생들과 지식인 층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운동이 서서히 태동하던 1970년대에 접어들어 독립의 불씨는 뜻하지 않게 포르투갈에서부터 당겨지게 된다. 1974년 4월, 무혈 쿠데타로 파시스트 정권을 몰아낸 포르투갈의 청년 장교들이 자국 식민지의 자결권 보장과 해방을 약속한 것이다.
이를 기화로 동티모르 내에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ILIN)>, <티모르민주동맹(UDT)>, <티모르인민민주협회(APODITI)> 등의 정당이 속속 생겨나게 된다.
이 세 정당은 각각 다른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은 티모르의 독립과 전면적인 개혁을 원하는 청년들과 일반 민중들의 가장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반면, 티모르민주동맹은 봉건 지주들과 농업 자본가, 식민지 관료들의 지지에 기반한 친 포르투갈 정당이었고, 티모르인민민주협회는 동티모르의 발전을 위해서는 인도네시아에 병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금방 친인도네시아로 입장을 선회한 티모르민주동맹 우파와 티모르인민민주협회는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략해 강제로 병합시킨 후에 인도네시아 정부를 대신해 동티모르의 행정을 담당하게 된다.
1975년 8월 11일, 독립의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티모르민주동맹 우파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불과 보름여 만에 쿠데타는 진압되고, 민중들의 탄탄한 지지에 기반한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이 수도 딜리를 비롯한 동티모르 전역을 장악하였다. 바로 이때, 호시탐탐 동티모르를 병합할 기회를 노리던 인도네시아가 본격적인 개입을 시작하였다. 쫓겨 온 티모르민주동맹 멤버들을 협박해 모든 동티모르인들은 인도네시아에 병합되기를 바란다는 가짜 청원서를 조작한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침략과 피의 사육제
이를 구실로 10월부터 인도네시아 특수부대(코파서스)가 동티모르 해안을 통해 침투하기 시작했다. ‘코모도 작전’이라 이름 붙여진 동티모르 침공 작전은 초기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영국 등 관련 서방정부의 양해와 묵인, 혹은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외교전과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 ‘공산주의자들’이 동티모르 주민들의 의사를 묵살한 채 학살과 인권탄압을 자행하고 있다는 악의적인 유언비어를 퍼뜨려 침략의 당위성을 획득하는 정보전에 주력했다. 어느 정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판단한 인도네시아 정부는 1975년 12월 7일, 드디어 약 1만 여 명의 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