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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민주화 그 멀고도 험한 여정



지난 6월 10일, 필리핀 전역을 들끓게 만든 전화 녹음테이프가 공개됐다. 사건의 주인공은 필리핀의 FBI격인 전직 수사국 부국장을 지낸 사무엘 옹. 테이프 안에는 놀랍게도 현 아로요 대통령의 선거 부정 의혹이 담겨 있었다. 지난해 5월에 있었던 대통령선거 당시, 아로요가 선거관리위원회 간부에게 상대 후보와 자신의 표차를 백만 표 이상으로 벌였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전한 메시지가 녹음된 것이다. 그러나 아로요 대통령은 “도청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테이프의 진위 여부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없다.”며 야당 및 시민사회단체의 퇴진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필리핀판 X파일
아로요 대통령은 지난 2001년 1월 부패 혐의로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가 에스트라다가 물러난 이후 권좌를 이어받은 당시 부통령이었다. 그리고 남편의 갖은 부패 의혹으로 선거 불출마까지 선언했다가, 지난해 5월 대통령선거에 다시 출마해 정치적 숙적인 전 대통령 에스트라다의 절친한 친구인 영화배우 출신 페르난도 포(Fernando Poe) 후보를 112만표 이상의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가난한 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페르난도 포 후보는 이번 선거 시비가 불거지기 얼마 전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심장마비로 이미 죽은 상태라 정치적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7천여 개의 섬나라인 필리핀에서 투개표 부정시비는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도 몇 개 섬의 집계과정에 대해 선관위가 부정 의혹을 제기하면서 집계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투표 총집계가 끝나기도 전에 선관위에서는 아로요 후보의 ‘사실상 당선’을 발표했다. 또한 상대 후보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의회에서는 아로요 후보의 당선을 인정했다.

선거 부정 의혹이 언론에 나오면서 아로요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급기야 지난 7월 8일, 10명의 주요 각료들이 집단 사퇴와 함께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연이은 정치 부패에 국민들의 정치 혐오와 무관심의 뿌리가 깊어진데다가, 전 국민의 85%가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가톨릭교회에서 아로요 대통령에 대한 지지 표명을 하면서 찻잔의 소용돌이로 끝날 조짐이 보인다.
그러나 국민들의 무관심 한편에는 대안 부재 논리도 자리 잡고 있다. 선거 부정 시비가 있는 아로요 대통령이 물러난 이후 대통령 직을 계승할 부통령 놀리 카스트로가 과연 대통령 직을 수행할 만한 인물인가, 더 나가서 계속 반복되는 엘리트 정치인들의 부패 시비에 자포자기한 심정도 함께 묻어 있는 것이다.

아시아의 민주화 깃발, 필리핀 민주화 과정
7천여 개의 섬나라인 필리핀은 1565년에 스페인의 식민주의자들이 도착하기 전에는 부족국가 형태였다. 민다나오 섬을 중심으로 한 모슬림 술탄체제들과 군도의 나머지 지역에 있던 국가 이전의 형태의 사회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스페인에 대한 수년 동안의 저항으로 마침내 1898년에 독립된 필리핀 공화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도 오래가지 못하고 미국의 식민지배가 이어졌으며, 소위 엘리트 중심의 정치 체제를 위한 기반이 만들어졌다.
14년 동안 지속되었던 마르코스(Ferdinand E. Marcos) 독재체제가 ‘민중의 힘’에 의해 붕괴되면서 필리핀 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에 민주화 바람을 불어넣었다. 한국에도 외신을 타고 들어온 필리핀의 민주화 바람은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불길이 되었다. 그리고 1991년,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의 전진기지였던 필리핀의 클라크와 수빅에서의 미국 공군과 해군의 철수는 필리핀이 아시아에서 독보적인 민주화의
상징이 되게 하였다.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출발한 아키노(Corazon Aquino) 대통령의 혁명정부는 정당정치와 지방자치 등 절차적 민주화를 통해 ‘민주주의의 회복’을 이룩했다. 그러나 마르코스 정부에서 실패한 농지개혁과 함께 국민 절대 다수의 빈곤문제 그리고 정치 부패, 정경유착 문제를 해소하지 못함으로써 민주화의 뿌리는 내렸으나 성장이 멈춰버린 상태인 오늘의 필리핀이 되었다. 결국 민주화는 스페인시대부터 뿌리 내려온 ‘가문의 영광’들이 정치 진출을 되풀이 하는 ‘엘리트 민주주의’ 또는 ‘잃어버린 혁명’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키노의 뒤를 이은 군부 출신 라모스는 1992년 5월의 대통령선거에서 24%의 낮은 지지율로 당선되었으나, 경제 성장을 기치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또한 60년대 말부터 끊이지 않았던 모슬렘과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모로민족해방전선(MNLF)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명문 가문 출신의 라모스 대통령은 1998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연합정당의 영화배우 출신 조셉
에스트라다 후보에게 압도적 표차로 패배하였다. 엘리트 중심의 사회에서 가난한 배우 출신의 에스트라다는 영화에서 나오는 의적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정서를 잘 이해했을 뿐 아니라, 언젠가 나타날 구원의 메시아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2001년 1월 두 번째 ‘민중의 힘’으로 집권하게 된 아로요 대통령은 낙후된 경제회복을 위한다는 명분 하에 미국의 힘을 빌리게 되었고, 1991년에 철수한 미군은 10여 년 만에 모슬렘 과격단체인 ‘아부 샤아프’에 대한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다시 들어와 정기적인 전투 훈련기지를 다시 구축하고 있다.

 


시민사회단체의 정치 수혈
필리핀의 민주화 과정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1986년 민중의 힘으로 권력이 바뀐 이후에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의 정치 수혈이 이어졌다는 점이다. 특히 아키노 정부 때는 독재 권력에 저항했던 인사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봇물을 일으키는 시작 시기였다. 에스트라다 대통령 이후에는 이런 정치 수혈이 각각의 정치 입장 차이에 따라 나눠지는 흐름을 보였다.
반면 정치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 그리고 경제개혁을 제안하는 시민사회단체는 미미한 수준이고 빈곤 개발 또는 혁명을 꿈꾸는 좌파로 남아 있는 상황이다. 좌파 무장그룹인 신인민군(NPA)은 필리핀 북부 루존섬을 중심으로 활동하는데, 한때는 2만여 명 수준의 세력을 유지하였다가 1980년대 말 동구유럽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시작된 논쟁으로 이념적 지향을 달리는 그룹들이 떨어져 나가 많이 약화되었다. 갈라진 그룹들 중에는 합법적인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시민행동당(AKBAYAN)을 꼽을 수 있다. 세계화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웰덴 벨로우 등 과거 민족연합(BAYAN) 및 공산당 계열에서 활동했던 이들이 치열한 논쟁 끝에 갈라져 나왔기에 기존의 좌파 세력과는 관계가 극도로 나쁜 상태이다.
여기에 1990년대 초, 중도적인 시민사회단체들이 이념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신사회운동을 표방하면서 연합체를 만든 것이 오늘의 NGO발전협의회(CODE-NGO)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전국의 2천여 시민사회단체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주로 사회발전 이슈를 내걸고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평소에는 노선에 따라 첨예하게 대립하다가도 전 국민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함께 협의를 한다는 것이다.
에스트라다 퇴진 운동에서 나타났듯이, 좌파에서 우파에 이르기까지 공동 전선(KOMPIL)을 펴서 함께 협력하다가 그 목적이 이뤄진 후에는 다시 각개전투식의 활동을 한다. 아로요 선거부정 시비와 관련하여 만들어진 시민사회연대기구 ‘흑백 총회’는 기존의 좌파 그룹을 포함하여 이번에 사퇴한 전직 관료 출신들이 함께 연대하여 만든 협의체이다.

 

정치·정당개혁 과제
필리핀에서 자주 정치적 변동을 가져올 정도로 심각한 엘리트 관료들의 고질적인 부패문제는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농지개혁의 실패로 기존의 지주가문의 정경유착 세습이 고질화 된데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더불어 출발선부터 잘못되었고 사회민주화가 부분적으로 이뤄지긴 했지만, 사회개혁이 정치와 경제개혁으로 이어지기는 역부족인 상황을 꼽고 있다. 또한 빈곤층의 증가와 함께 기업의 세계화가 부익부 빈익빈을 공고히 하는 양상도 거론되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혁의 목소리 뿐 아니라, 실제로 개혁을 수행할 수 있는 그룹의 정치 입문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필리핀의 정당구조와 선거법은 개혁의지가 있어도 돈이 없는 사람은 선거에 출마하기조차 어렵게 되어 있다.
미국처럼 상원과 하원의원 구조를 갖고 있는 필리핀에서는 모든 중요한 정치적 의사 결정권이 있는 상원의원에 당선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상원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전국에서 다수표를 얻어야만 가능하다. 대다수 유권자가 거주하고 있는 1천여 개 섬에서 표를 얻기 위해서는 평소에 인기 있는 배우 또는 명문 출신가문이라야 지명도를 높일 수 있다. 또한 섬 곳곳 산간벽지에 얼굴 한번 알리러 포스터 한 장을 붙이기만 해도 선거비용 제한을 초과 지출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얼굴 한번 알리기 위해서라도 대통령 후보자에서부터 지방의회 의원 후보자들까지 정책 입장에 상관없는 합종연횡이 선거 때마다 빈번하게 생길 수밖에 없다.
반면 유권자인 국민들은 지방의회 의원부터 자치단체장, 하원의원 그리고 상원의원을 뽑기 위해서 투표용지에 3,40명의 이름을 써내야 한다.  

 

따라서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군소정당이나 신진 후보들은 투표소로 가는 유권자의 암기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지난 90년대 말부터 독일의 정당명부제를 도입하여 그나마 소수의 진보적 목소리를 담아낼 수는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지 정당이 일정하게 득표를 해서 얻을 수 있는 하원의원은 2명을 넘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러다 보니 몇몇 진보그룹에서는 선거 때마다 여러 개의 급조정당을 만들기도 한다. 필리핀의 대표적인 좌파세력인 바얀은 지난 선거에서 여성, 환경 등 10여 개의 정당을 내세워 선거 판에 나서기도 했다.

정치개혁을 위한 시민사회의 과제
현재 정치개혁이 답보상태에 놓여있는 이유 중의 하나로 중앙과 지방권력을 감시, 견제할 수 있는 정치개혁 중심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적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필리핀에는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있다. 특히 1986년 2월 민주화의 봄 이후 시민사회단체들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영어권 국가이면서 아시아에서의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해 국제시민사회단체와 리더들을 지난 20여 년 동안 많이 배출해 왔다. 그러나 정작 필리핀 정치사회구조에 대해 집중하는 그룹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렇게 일상적으로 권력을 감시하고 경제개혁을 제시하는 시민사회그룹이 적은 이유로 국가 경제가 어려워서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재정지원을 주로 해외에서 받고 있는 것을 우선 들 수 있다. 이들 해외지원단체들은 대개 정치 개혁과제 보다는 사회개발 프로그램에 많은 지원을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시민사회단체들이 해외보다는 국내에서의 모금을 시도하고 있으나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다.
또 다른 이유로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빈곤층의 낮은 정치의식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 몇몇 정치사회단체들은 필리핀의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제각각 해석하기도 한다. 에스트라다 대통령에 대한 가난한 민중들의 정서를 예로 들면서 부정부패한 정치인임에도 민중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사람에 대해 귀를 기울어야 한다는 모호한 이야기까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들의 낮은 정치의식에 대한 기준과 정책 개발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논의를 만들기 보다는 대중들의 정치빈곤의식이 왜 생겨났는지 그리고 보다 객관적이고 올바른 가치 기준과 정책 제안을 하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지에 대해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최근에 가난한 사람들의 정당을 만드는 논의를 시작한 그룹이 있다. 이 그룹은 주로 도시 빈민과 농민들의 정치의식을 높이기 위한 노력으로 정당정치를 이야기 하고 있다.
지난 7월 8일 사임한 딩키 솔리만 전 사회복지장관이 사퇴 한 달이 지난 8월 8일에 가까운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오늘의 필리핀 사회민주화의 단면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 있다. 딩키 솔리만은 지난 30여 년 간 줄곧 시민사회단체의 리더로서 많은 역할을 하였으며, 필리핀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지난 6월 27일 그동안 침묵을 지켜왔던 대통령이 처음으로 테이프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절대적인 정치 위기의 상황에서 보다 신뢰할 수 있는 고백적인 표현을 이때까지만 해도 많은 각료들과 국민들은 기대했었다. 그러나 이어 있었던 7월 5일 각료회의에서 기대가 실의로 바뀌면서 사퇴를 생각했다.
나는 ‘정치적 생존자가 되기 위해 (다른) 모든 사회비용을 치룰 것인가 아니면 정치 존립을 위해 개혁과 변화 그리고 신뢰 있는 행동을 취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야 했고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개혁과 변화를 위해 사퇴를 해야 한다고 결심했다.”고 토로했다.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정치.경제 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결국 그 사회의 악습은 세습이 될 것이고 결국은 성장을 멈춘 사회가 된다는 교훈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나효우>
아시아 NGO 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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