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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산맥만큼 험난한 네팔의 민주화운동




18세기 중엽인 1768년, 프리티비 나라얀 왕은 히말라야 산맥 중앙에 있던 네와르 부족들을 단일국가로 통합해 구르카 왕조를 탄생시켰다. 어느 날 카트만두의 계곡을 지나던 나라얀 왕은 힌두교의 신들 중 하나인 고라크 나드 신과 마주치자 존경의 표시로 우유를 바쳤다. 그러나 나드 신은 이를 받아마시자 마자 바로 토해버린 후 왕에게 되돌려줬다. 순간 왕은 우유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고 토한 우유는 왕의 발을 적셨다. 그러자 나드 신은 자신이 토한 우유를 되받아 마셨다면 모든 소망을 이룰 수 있었을 거라며 왕을 꾸짖은 뒤, 우유가 왕의 열 발가락을 적셨으니 나라얀 왕조는 앞으로 세대가 10번 변한 뒤 종말을 맞게 될 거라는 예언을 남겼다.
손자를 무릎에 누인 할머니가 옛날이야기 삼아 들려줄 법한 이 전설은, 그러나 적어도 최근 몇 년 간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맞물리면서 네팔 국민들의 머리 속에서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이야기가 되었다. 나라얀 왕의 11대손인(공교롭게도 전설과 딱 들어맞는 왕조의 10대 국왕이다) 비렌드라 국왕이 아들의 손에 비명횡사하는 ‘우연’이 발생하더니, 뒤이어 왕위를 승계한 갸넨드라 왕이 내각을 해산시킨 것을 기화로 해서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대중 시위와 무장투쟁 그리고 이를 억누르려는 폭력과 억압의 소용돌이가 현재 온 나라를 뒤덮는 등 왕조의 앞날이 살얼음판을 걷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네팔의 현대사와 민주화운동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면 네팔의 왕실과 왕정체제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된다. 그만큼 네팔의 정치와 사회에서 왕실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지금부터 이 글에서는 왕정체제를 중심으로 격변해온 네팔의 정치, 사회 현실과 그에 대한 네팔 민중들의 치열했던 민주화운동의 발자취를 짚어보고자 한다.

 

아름답지만 가난한 나라, 네팔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서쪽, 히말라야 산맥의 중앙부에 위치한 네팔은 중국과 인도, 방글라데시에 둘러싸인 내륙국이다. 석가모니가 태어난 룸비니가 있는 나라지만 국민들의 약 90%는 독실한 힌두교도이고 불교신자는 5% 정도 밖에 안된다.
흔히들 네팔을 히말라야 기슭의 작은 나라라고 알고 있지만, 남한의 약 1.5배 정도의 면적에 약 2천 4백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는 나라니까, 따지고 보면 소국(小國)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국토의 면적이나 인구가 아니라 정치, 경제, 외교적인 면에서 보자면 네팔은 세계에서도 소국 중의 소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국민들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과 등반가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이 주요 외화 수입원인데, 전체 인구의 42% 가량이 하루 1달러도 벌어들이지 못하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는 중국과 인도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통해 국가의 존립과 주권을 보장받아 왔지만, 항상 큰 나라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특히 이웃 인도는 스스로 네팔의 후견인을 자처하면서 네팔이 무기 거래, 대형공사 수주 등으로 중국과 조금 가까워질라 치면 금방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경제적으로도 인도의 캘커타 항은 사면이 육지인 네팔의 유일한 대외무역 창구이기도 하다.
네팔은 1814년부터 1816년까지 영국과 전쟁을 치른 뒤 1923년 독립될 때까지 영국의 간접통치를 받았다. 영국은 친영국파인 라나 가문을 내세워 간접적으로 통치했는데, 라나 가문은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백여 년 넘게 세습에 의한 독재통치를 실시했다. 그러던 1951년, <네팔국민회의당(NCP)>과 인도의 지원을 등에 업은 샤 가문의 트리부반 왕이 라나 가문을 몰아낸 후 왕정을 부활시켰다. 뒤이어 1959년에는 그의 아들 마헨드라 왕이 서구식 의회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총선거를 통해 NCP 내각을 출범시킴으로써 절대 왕정에서 국왕과 민선정부가 권력을 공유하는 입헌군주국으로 전환되게 된다.

군림도 하고 통치도 한다
그러나 ‘군림은 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기본 이념은 절대권력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
국왕과 왕실에게는 영 내키지 않았던 듯 하다. 바로 이듬해 말, 마헨드라 왕은 NCP 내각의 무능함과 부정부패, 외세인 인도의 개입에 따른 국론분열을 이유로 1년 반 만에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와 내각까지 해산시켜 버렸다. 또한 NCP와 공산당 등 모든 정당을 불법화했으며, ‘판차야트(Panchayat)’가 의회의 기능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는 원래 산스크리트어의 5를 뜻하는 ‘판차’에서 유래한 5인 회의를 일컫는 말로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일종의 촌락 단위 원로모임이었는데, 이를 국가 단위로 확대시킨 것이 바로 당시의 판차야트였다.
판차야트 의원들은 직접 선거로 선출된 112명과 국왕이 임명하는 28명을 더해서 총 140명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대의기구라는 건 그저 듣기 좋은 이야기일 뿐, 판차야트를 소집하고 폐회할 수 있는 권한도 국왕에게 있었고 국왕이 주재하는 국가회의의 감독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판차야트 의원들은 국왕의 뜻을 단지 절차적으로 폼 나게 처리해주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결국 네팔에는 합법적인 정당 하나 없는 ‘해괴한’ 네팔식 의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의회뿐만이 아니었다. 총리를 비롯해 모든 각료는 국회의원(즉 판차야트 의원) 가운데서 임명되었고 대법원장과 판사도 국왕이 정했으며, 특히 국왕이 긴급사태를 선포하게 되면 그 즉시 헌법이 정지되게 되는 등 행정·사법권도 완전히 국왕이 틀어쥐고 있었다. 군 통수권 역시 국왕의 몫이었다. 이로써 네팔은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입헌군주제였지만, 사실상 절대왕정 국가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정치활동의 자유를 포함한 국민의 기본권이 제대로 보장될 리 없었다.
누구든 영장과 재판도 없이 18개월 간 구금될 수 있었고, 비합법 정당 활동가나 민주화운동가,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납치, 고문, 살인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또한 대다수 국민들은 절대빈곤에 허덕이고 있음에도 왕의 친인척들과 고위급 관리들은 네팔의 주요 사업체를 독식하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우리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원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의 불만과 민주화 요구가 아래로부터 분출되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그 첫 번째 조짐은 1979년에 일어났다. 어용의회인 판차야트의 해체와 정당 활동의 허용을 요구하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가 7주 간에 걸쳐 이어진 것이다. 그러자 1972년에 마헨드라 왕의 사망으로 왕위에 오른 비렌드라 왕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무마시키고자 판차야트 체제의 존속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그러나 54.8%의 찬성으로 판차야트 체제가 유지되는 결과가 나왔다.
아마도 당시 투표 결과는 높은 문맹률과 아직 많은 국민들에게 남아있던 왕에 대한 막연한 복종 심리 그리고 투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쉬운 농촌사회의 특성 등이 작용했던 것이 아닌 가 추측된다.
아무튼 그렇다고 해서 한번 터져 나온 개혁과 민주화의 열망은 쉽게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다. 1985년에도 전과 유사한 대규모 대중투쟁이 전개되더니 드디어 1990년에 민주화를 향한 민중들의 열망은 활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했다. 비렌드라 왕의 할아버지인 트리부반 왕의 탄생일인 2월 18일 ‘민주주의의 날’을 기점으로 60년 이래 불법화된 NCP와 공산당 등 각 정당, 학생, 노동자들이 전국 단위의 민주화 항쟁을 시작한 것이다.
정부 주최의 기념 행렬에 시위대가 돌을 던지면서 촉발된 시위는 금세 인권단체 활동가, 의사, 변호사, 농민, 교수 등 각계각층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당황한 정부는 수천 명의 시위 주도자들을 검거·투옥하고 경찰뿐만 아니라 군대까지 동원해 시위대에 발포하여 수십에서 수백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민중들은 ‘판차야트를 해체하라’, ‘우리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원한다’ 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면 총파업과 동맹휴업, 대규모 거리 시위로 폭력과 탄압에 맞섰다. 당시 항쟁이 최고조에 달할 무렵에는 총인구 40만 명인 수도 카트만두에서 약 20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하니, 억압적인 체제에 대한 분노와 민주화에 대한 네팔 민중들의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 하겠다.
결국 8주 간의 민중항쟁은 비렌드라 왕이 4월 9일 다당제 의회민주주의 도입과 헌법 개정, 총선 실시 등을 통한

 


정치개혁과 민선정부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명실상부한 입헌군주제 도입을 약속함으로써 승리로 일단락되게 된다. 당시 항쟁이 승리했던 원동력으로는 우파인 NCP와 인민연합전선, 인민민족운동연합 등 7개 좌파계열 연합조직인 ‘연합좌파전선(ULF)’이 함께 결성한 ‘민주주의와 인권회복운동(MRDHR)’이란 통일된 조직체 하에서 유기적인 공동투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점, 네팔의 후견인을 자처해온 인도가 경제제재 조치를 통해 민주화운동 세력의 편에 선 점 등 여러 가지가 꼽힌다.
그러나 뭐라 해도 가장 큰 요인은 아마 당시 아시아의 필리핀, 한국을 거쳐 몽골, 중국 그리고 동구권의 헝가리, 체코 등 전 세계를 휩쓴 민주화 바람에 힘입은 네팔 민중들의 민주주의와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절망은 탄환을 동경한다
하지만 1990년의 승리는 네팔 민중들의 삶까지 바꿔놓지는 못했다. 여전히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정치 불안은 여전했다. 거의 1년에 한번 꼴로 총리가 바뀌는 등 혼미를 거듭하던 네팔 상황은 1994년 총선거를 통해 공산당이 집권했다가 이듬해 붕괴하면서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남미 페루의 공산반군인 ‘센데로 루미노소(빛나는 길)’을 모델로 한 공산당 계열의 마오이스트들(NCP-Maoist)이 1996년 무장투쟁의 깃발을 올린 것이다. 반군들은 입헌군주제의 철폐와 경제적 평등, 여권 신장의 구호를 내걸고 본격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갔다. 초기에 불과 200여 명이 산골 경찰서를 습격하면서 항쟁의 봉화를 피워 올렸던 반군들은 네팔 전역에서 급격히 세를 늘려갔고, 현재는 약 4천 명의 핵심 무장대원들과 만 5천 명 가까운 방계 조직원들을 거느릴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반면 네팔 왕실과 정부는 인도와 중국, 미국으로부터 사들인 최신 무기들로 중무장한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대대적인 반군 소탕작전에 나섰으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전국 75개 행정구역 중 20여 개 정도가 반군 손에 넘어갔고, 그나마 나머지 지역도 수도 카트만두를 제외하고는 낮에는 정부군이, 밤에는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네팔 왕실과 정부는 고질적인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 권위주의 체제로 인한 민중들의 절망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이를 근본적으로 치유하

지 않고서는 결코 물리력만으로 반군의 확산을 막을 수 없음을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도 일부러 귀를 막았는지도 모른다. 왕실과 부패한 관료들은 정치, 경제, 사회개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면 맨 먼저 군주제 유지를 통해 그동안 누려왔던 막대한 기득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두려웠을 것이다.

내릴 수 없는 깃발, 민주주의
아무튼 네팔 왕실이 반군과의 대치 상황에서 별다른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2001년의 ‘왕실 일가족 몰살 사건’이었다.
6월의 첫째 날 밤, 나라얀히티 왕궁에서는 왕실 가족들이 모여서 저녁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만찬이 무르익을 무렵, 잠시 자리를 뜬 차기 왕위 계승자 디펜드라 왕세자(당시 29세)는 이내 손에 소형 기관총과 M16 소총, 엽총을 들고 나타나 아버지인 비렌드라 왕과 어머니 아리슈와랴 왕비를 비롯한 가족, 친척들에게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7명의 왕실 가족들이 비명에 쓰러져 갔고, 또 다른 6명은 심한 총상으로 신음했다. ‘거사’를 일으킨 왕세자도 마지막 남은 탄환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했다. 희대의 엽기적인 ‘패륜살인’이라 할 수 있는 이 사건은 네팔 민중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국왕과 그 후계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위를 이어받은 갸넨드라 왕이 설치한 조사위원회는 이 사건의 진상을 왕세자가 사랑하는 신부 감을 왕비가 심하게 반대하자 이에 격분한 왕세자가 일으킨 우발적인 총기 사고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3년이 넘도록 이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도 네팔 민중들 중에는 유달리 권력욕이 강한 갸넨드라 현 국왕이 군부와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라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사건이 일어난 날, 갸넨드라(당시 왕자)만 그날 그 만찬 자리에 없었고 또 공교롭게도 갸넨드라의 아들인 파라스 왕세자도 현장에 있었지만 부상 하나 입지 않고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사건의 정확한 동기와 진상은 ‘며느리도 모르는’ 상태로 남은 채 시간이 흘러 2005년이 되었다. 여전히 많은 민중들은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고 농촌에서는 정부군과 반군의 교전이 계속되고 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노동자·학생들의 파업과 시위도 빈발했다.
그러던 지난 2월 1일, 갸넨드라 왕은 국영 TV방송에 출연해 듀바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반군의 무장투쟁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혼란만 키웠다며 ‘민주주의와 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내각을 해산시키고 향후 3년 간 자신이 직접 국정을 관장하겠다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주요 정부기관과 우체국, 통신센터, 국영은행 등에는 군인들이 배치되고 전화를 비롯한 외부와의 통신은 차단되었으며, 국제공항은 잠정적으로 폐쇄되었다. 신문과 방송 등의 언론은 사전 검열을 거친 후에야 기사를 내보낼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반발하는 언론인들은 어디론가 끌려가 강제 구금되었다.
비록 기한을 정하긴 했지만, 민주주의의 시계를 과거의 절대군주제 시절로 되돌리려는 국왕의 의도를 저지하기 위한 노동자, 농민,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벌이고 있다. 가뜩이나 먹고 살기 어려운 네팔 국민들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일방적인 비상사태 발표로 또 한번 혼란과 좌절에 몸부림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농촌에서는 정부군이 반군 색출을 명목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함정 살인’하고 반군들은 ‘혁명세’ 명목으로 가난한 농부들의 곳간을 뒤진다. 불행히도 아직까지는 순박한 민중들이 민주화된 땅에서 평온한 삶을 꿈꿀 수 있기까지 네팔의 민주화운동은 드높은 히말라야 산맥만큼이나 험난한 길을 한참이나 더 올라야 할 것 같다. 


<최재훈>
국제민주연대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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